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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달산 지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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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달산 지나며

[최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37> 마구령~화방재/9.2~9.4

산행 서른 하루 째. 화요일.

여러 날 만에 다시 찾아 온 마구령(馬駒嶺, 820m)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지난 밤부터 내리던 비다. 새벽녘에 잠시 그치더니 아침이 되자 다시 내렸다. 제법 많은 비였다. 우의를 입었다. 산행을 시작했다. 갈곶산(966m)을 향했다. 갈곶산 지나고 선달산(先達山, 1236m)을 넘어 구룡산(九龍山, 1345.7m)에 이르면 태백산(太白山, 1567m)이 하룻길 이었다. 신라 일성왕 5년(138년) 그 까마득한 옛날에도 하늘에 제사 드리던 산이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하늘에 제사하였다. 그리고 제사를 드리는 산을 '밝은 산' 즉 '백산'(白山)이라고 불렀다. '밝은 산'(白山) 중에서도 가장 '밝은 산'이 바로 '크게 밝은 산'인 태백산(太白山)이었다. 그 산에 가고 싶었다. 하늘 가까이에서 하늘에 제사 드리던 곳을 눈으로 보고 싶었다. 제사 드리던 이들의 마음을 올올이 느껴 보고 싶었다. 그 신성한 산의 기운을 온 몸으로 느껴 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할 수만 있다면 내 영혼 하늘의 기운으로 씻어내고 싶었다. 내 마음 산의 밝은 정기로 위로하고 싶었다. 지나 온 날의 고단한 짐들을 다 내려놓고 싶었다. 허락한다면 삶의 의미를 새롭게 찾고 싶었다. 살아가게 될 삶에 대한 잃어버린 열정과 투지를 회복하고 싶었다. 다시 역사의 시간들과 투명하게 마주 서고 싶었다.

▲산행준비 ©이호상

비 내리는 숲은 적막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깊은 적막이었다. 새소리도, 짐승 지나며 풀숲 헤치는 소리도, 숲을 지나는 이들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숲을 지나는 바람 만이 그곳이 숲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숲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바람 불어 나뭇잎 흔들렸다. 나뭇잎 소리는 때로 깊은 밤 먼 바다에서 들려오는 파도소리 같기도 하고, 때로 비오는 도로 위를 지나는 자동차 바퀴 소리 같기도 하고, 때로는 수백 수천의 말들이 달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여린 풀들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억새와 원추리와 금마타리도 비에 젖은 채 흔들리고 있었다. 제법 자란 참나무들도 굵은 가지를 흔들고 하늘을 향해 곧게 자란 금강소나무도 가지 흔들고 있었다. 비 내리는 탓일까. 처녀림을 지나는 것 같았다. 순결한 숲을 지나는 것 같았다. 뿌리를 흉하게 드러내며 쓰러져 죽은 나무조차도 순결해 보였다. 나무에게는 불행한 일이겠지만 다른 생명들에게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은총이다. 땅 속에 묻혀 발아되지 못하고 있던 어린 씨앗들이나 햇빛을 받지 못하던 어린 풀들이나 관목들, 벌레들에게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설렘과 흥분의 시간이다. 숲에서는 죽음조차도 숲을 풍성하게 하는 아름다운 하나의 덕목일 뿐이다. 죽음조차도 순결하다.

갈곶산에 올랐다. 표지석도 없어 그냥 지나칠 뻔 했다. 비가 그쳤다. 우의를 벗고 점심을 먹었다. 고기볶음과 우엉과 깻잎을 반찬으로 맛나게 먹었다. 산줄기들을 바라보았다. 남쪽으로 산자락에 부석사(浮石寺) 품어 안은 봉황산(鳳凰山, 819m)이 보였다. 양백지간(兩白之間) 깊은 산중이니 비로(毘盧)의 빛이 비추고 연화(蓮花)의 세계가 열리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늦은목이재를 향해 가는 길에 뒤 따라 오던 맑은 물 김명옥 작가가 말을 건넸다.
"선생님, 우리들 한글 이름은 지어주시고 선생님 한글 이름은 안 지으세요? 지으셨어요?"

"내 이름? 오래 전부터 쓰던 이름이 있지. '마음 길'이야. 마음 길 따라 살고 싶어서 마음길이라고 지었지."

제 욕심 따라 살아가지 않고 마음 길 따라 살아가고 싶었다. 제 신념이나 목표를 따라 살아가지 않고 마음 길 따라 살아가고 싶었다. 욕심은 스스로를 망치며 신념은 다른 이들을 해치고 목표는 삶을 구속시키기 때문이었다.
나의 지나 온 삶은 대체로 신념과 믿음이 만들어 놓은 가치에 따라 해야 할 일을 하며 살아온 삶이었다.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는 삶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해야 할 일을 하는 삶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하고 싶은 일이 곧 해야 할 일이 되는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 내 마음 길과 모두를 살리고 이롭게 하는 삶이 언제나 일치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

늦은목이재를 지나며 내처 선달산(先達山, 1236m)을 향했다. 나무계단 촘촘히 놓여 있었다. 내리던 비 그쳐있었지만 숲은 고요하고 적막했다. 바람 지나며 숲의 적막이 얼마나 깊은지를 알려주고 있을 뿐이었다. 물푸레나무 가득했다. 드문드문 거제수나무도 보였다. 나무 사이를 지나는 바람에 거제수나무의 벗겨진 껍질이 소리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선달산 ©이호상

선달산은 소백산과 태백산 사이에 솟아 있어 대간을 조망하기에 좋은 산이다. 정상에서는 동쪽으로 남대천과 어래산(御來山, 1064m)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박달령(朴達嶺, 1009m)이 보인다. 또한 부드러운 구릉으로 이루어져 산행하기 수월하다. 선달산이라는 이름의 뜻은 분명치 않다. '신선이 놀았다'고 하여 선달산(仙達山)이라고도 하고, '먼저 올라야한다'고 하여 선달산(先達山)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선달산(先達山)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온전히 짚어낸 것 같지 않다. '먼저 선'(先), '통달할 달(達)', '뫼 산(山)'자를 쓰는 선달산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먼저 깨달아 알은 산'이란 의미이다. 그런데 '선(先)'자가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시간적 의미에서의 '먼저'가 아니라 '선험(先驗)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선달산이란 이름은 '이 산이 선험적 지혜인 진리가 담겨 있는 산'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지나친 해석일까.

선달산은 아주 부드러운 산이다. 걸으며 명상하기 좋은 산이다. 숲은 깊고 고즈넉하다. 산길은 흙길이고 오르막과 내리막도 심하지 않은 산이다. 누구나 그저 잠시 가쁜 숨을 내쉬면 한 재를 넘을 수 있는 산이다. 더욱이 이 산은 경상북도 봉화군에 위치해 있다. 봉화군은 바로 '인재는 소백과 태백 사이에서 구하라'(求人種於兩白)는 말이 있는 양백지간에 속한 땅이다. 그러니 인재 넘쳤던 양백지간의 봉화군 선비들이 이 산을 걸으며 마음을 닦지 않았을까. 더욱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이 그렇게 멀지 않은 영주시 순흥면(順興面) 내죽리(內竹里)에 있었으니 지나는 길에라도 서원에서 공부하던 이들이 때로 이 산을 찾지 않았을까. 이 산을 찾아 이 산을 걸으며 깨우침을 얻지 않았을까. 이 산에서 깨우침을 얻은 것이 고마워 선달산(先達山)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은 아닐까.
선달산이라는 이름은 양백지간에 자리한 산 이름으로는 너무나 어울린다. 안성맞춤이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태백산과 땅에 머물러 비로의 빛을 비추어 연화의 세계를 펼쳐 놓은 소백산 사이에 있는 산이니 선달산(先達山)이름을 충분히 가질만하다.
이런 저런 생각들로 마음 분주한 중에 즐거웠다. 사실 소수서원과 선달산은 제법 멀리 떨어져 있어 산책을 나오기는 어렵다. 마음먹고 찾았거나 지나는 길에 들렸다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만 말이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소수서원(紹修書院)은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최초의 서원이다. 조선조 중종 38년인 1543년 풍기 군수 수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바로 소수서원이다. 건립 당신엔 백운동서원이었으나 후일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와 서원을 널리 알리고 권장하기 위해 조정에서 사액과 전토를 주도록 건의하였다. 이에 명종은 1550년(명종 5년) 이를 권장하는 뜻에서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이라고 친필로 쓴 편액글씨를 하사 하였다. 이로서 소수서원은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사액서원이란 편액(간판)을 하사 받은 서원으로 나라로부터 서적과 학전(學田), 노비 등을 하사 받으며 면세와 면역의 특권을 아울러 받은 서원을 말하는 것이다. 소수서원은 한국 최초의 사원인 동시에 사액서원의 시초이기도 하다.

▲선달산에서 ©이호상

선달산에 오르니 짚신나물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표지석 뒤로 산오이풀과 수리취, 엉겅퀴 등 온갖 야생화들이 피어 있고 그 뒤로 흰 구름 흘렀다. 하늘은 언제 비가 왔냐는 듯 파랗기만 했다. 선달산 아래로 흰 구름 두텁게 드리워 골마다 구름 가득했다.
바람 지나고 구름 지나는 곁으로 영주국유림관리소에서 세운 백두대간 안내판도 설치되어 있었다. '백두대간의 가치'에 대해 소개하고 있었다.

백두대간은 지형, 기후, 토양, 수분 등 자연환경과 온갖 동식물이 어우러진 생태계, 그리고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공간 등 다양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첫째, 생물종이 다양하고 풍부한 한반도의 핵심생태 축으로 대륙의 야생동식물이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통로이자 서식지이다.
둘째, 천연림이 많이 분포하는 대표적인 산림지대로 여가와 휴양, 생태관광 및 교육 장소이다.
셋째, 민족정기의 상징이며 귀중한 문화유산의 터전이다.
넷째, 태산준령이 이어지는 한반도의 지붕으로 한강, 낙동강, 금강의 발원지이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해서 금강산, 설악산, 태백산, 소백산을 거쳐 지리산까지 이어지면서 국토의 골격을 형성하는 큰 산줄기이다. 산을 단절, 고립된 봉우리로 보지 않고 백두산을 민족의 성산, 국토의 뿌리로 하여 흐름을 가지고 이어지는 맥으로 이해하는 전통적인 산 인식체계이다.

▲박달령으로 ©최창남

박달령(朴達嶺, 1009m)을 향했다. 선달산에서 내려서는 길은 비 온 탓인지 미끄러웠다. 보이지 않던 투구꽃이 보였다. 이질풀 만발하였다. 쇠물푸레나무 자주 눈에 띄었다. 숲은 점점 깊고 울창해 아름드리나무 가득했다.
숲이 환해졌다. 햇살이 제 몸 그대로 드러내며 투명하게 숲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햇살에도 질서가 있는 듯 햇빛은 저마다 줄지어 숲을 비추고 있었다. 숲은 점점 환한 빛으로 가득 차올랐다. 나뭇잎도 투명하게 빛나고 큰 나무에 가려졌던 여린 풀들도 반짝였다. 돌멩이 하나 흙 알갱이 하나까지도 빛나고 있었다. 숲은 순식간에 환한 빛으로 가득 차고 생명들은 감추어 두었던 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생명 가득 차 넘실대고 있었다. 경이로웠다. 나는 숨 죽여 바라보았다.

박달령으로 내려섰다. 경상북도 봉화군과 강원도 영월군을 이어주는 고갯길이다. 고갯마루란 늘 이별과 기다림이 있는 곳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눈물 어린 이별이 있고 먼 길 떠났던 님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설렘이 있는 곳이다. 어디 이별과 기다림만 있는가. 희망도 있고 기쁨도 있었을 것이다. 그 옛날 보부상(褓負商)들이 많이 넘었다는 이 고개에 어찌 희망과 기쁨이 없었겠는가. 짐을 꾸려 고개를 넘으며 돈 벌어 가족들과 기쁨어린 재회를 나누려는 보부상들의 희망이 어려 있는 고개이다.
산령각이 보였다. 이 고개를 넘으며 웃고 울었을 이들을 위해 마음 한 조각 남겨 두고 싶었다. 바라보다 마음 그저 바람에 띄웠다.

모두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벽리에 있는 송어 양식장 식당에서 저녁을 먹기로 한 날이었다. 차에 올랐다. 창을 여니 바람 선선하였다.
바람 사이로 노을 빛 붉게 물들던 이른 저녁이었다.

※ 바로잡습니다 : 지난 36번째 글 '고치령을 지나다'에서 산행날짜가 서른 째가 아니라 서른 하루째입니다. 그리고 본문 중에 '전라도 산청군 중산리'는 '경남 산청군 중산리'입니다.

최창남/글
이호상/사진
chamsu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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