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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령을 지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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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령을 지나다

[최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36> 저수령~마구령/8.26~28

산행 서른 째. 목요일.

하늘 맑고 푸르렀다.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했다. 다시 찾은 고치령(古峙嶺, 770m)의 아침은 공기 신선하고 바람 선선했다. 햇살 포근했다. 풀잎들도 나뭇잎들도 나무들도 햇살을 받아 빛났다. 바람 불었다. 풀잎들도 나뭇잎들도 노래하는 듯했다. 싱그러웠다. 밝고 화사했다. 지난 밤 깊고 깊었던 칠흑 같은 어둠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마음 편안하여 절로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길 좁고 나무 울창하여 고개는 아늑했다. 길 옆 숲가에 장승 서성이며 고개를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편에는 포도대장군(捕盜大將軍)과 단산대장군(丹山大將軍)이 소백지장(小白地將)을 모시고 있었고 다른 한 편에는 태백천장(太白天將)을 다른 세분의 장승들이 모시고 있었다. 태백천장을 모시고 있는 장승들 중 두 분의 모습이 특이했다. 재미있었다. 양백대장(兩白大將)과 항락(恒樂) 장승이었다. 양백대장(兩白大將)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듯 가벼운 미소를 띈 채 해학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고, 항락(恒樂)이라고 써있는 장승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파안대소하고 있었다. 세상의 온갖 희노애락(喜怒哀樂)을 초월한 것 같은 웃음이었다. 희로애락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여 마음 잃어버리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음 상하지 않도록 늘 지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살아가는 동안 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기쁨과 즐거움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마음공부를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늘 기쁘고 즐거울 수 있도록 깊은 마음을 지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바람 싱그럽고 마음 편안했다.
▲고치령 ©최창남

고치령은 소백산줄기와 태백산 줄기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고치령은 소백산 줄기는 끝나고 태백산 줄기가 시작된다. 옛날부터 소백산과 태백산 사이는 양백지간(兩白之間)이라 하여 특별히 여겼다. 양백지간은 큰 난리를 피할 수 있는 십승지의 대명사로 여겨져 왔으며 또한 인재가 많이 나왔다. '인재는 소백과 태백 사이에서 구하라(求人種於兩白)'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으니 얼마나 인재가 많이 나왔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럴 법도 한 일이다. 하늘(태백천장)과 땅(소백지장)을 품고 있는 땅이니 어찌 인재가 많지 않겠는가 말이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양백대장(兩白大將) 장승은 의미 모를 깊은 미소를 짓고 있고, 항락(恒樂) 장승은 그리도 유쾌하게 웃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고치령은 마구령, 죽령과 함께 소백산을 넘는 세 개의 고갯길 중 하나였다. 그러나 양남지방에서 서울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했던 죽령과 달리 장돌뱅이나 인근 주민들이 넘나들던 소박한 고개이다. 수많은 민초들의 땀과 바람과 눈물과 한숨과 아픔이 묻어있는 고개이다. 그러나 민초들의 슬픈 이야기만 지켜 본 것만은 아니다. 단종과 금성대군 그리고 그들을 따르던 많은 이들의 죽음을 지켜 본 슬픈 고개이기도 하다. 이 고갯길은 영월과 순흥을 잇는 가장 가까운 길이었다. 영월에는 단종이 유배 되어 있었고, 순흥에는 수양대군에 저항하던 금성대군이 유배 되어 있었다. 그들은 고치령을 오고가며 연락을 주고받았다. 복위운동을 준비하던 중 거사가 발각되어 모두 죽음을 당했다. 단종과 금성대군 뿐 아니라 고갯길을 넘나들던 이들 모두 죽음을 당한 것이다. 그것을 아파하여 민초들은 지금도 고치령에 산신각을 세우고 단종을 태백산의 산신으로, 금성대군을 소백산의 산신으로 모시고 있다.
바람 서늘했다. 오전 8시 20분 산행을 시작했다. 연화(蓮花)의 세계 펼쳐 내 마음 품어 위로해주던 아름다운 소백산과 이별하였다. 소백산은 조선조의 유명한 풍수지리가이며 실학자인 격암 남사고(南師古)가 죽령을 지나다가 이 산을 보고 '사람 살리는 산'이라고 말하며 말에서 내려 절을 하였다는 산이다. 산줄기 흐르는 곳마다 연화(蓮花)의 세계 열리고 비로(毘盧)의 빛이 비추니 '사람 살리는 산'이라 불린 것은 당연하다.
소백산 마음에 품고 숲으로 들어갔다. 평소와 달리 늦은 출발이었다. 지난 밤 자정이 다 되어 내려 온 때문이기도 했고 산행 거리가 짧은 때문이기도 했다. 고치령에서 미내치를 지나고 1096.6봉에 올랐다가 마구령까지의 7.9km가 오늘의 산행 길이었다. 짧은 산행이었다. 마음 느긋하고 상쾌했다. 몸도 가벼웠다. 몸은 어느 순간부터 산행에 적응되어 있었다. 산행을 시작한 이래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허벅지의 근육통과 무릎의 통증은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마치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하루 종일 스틱에 몸 의지한 채 절룩거리며 걸었던 날들이 그저 꿈결 같았다. 지난 이틀 동안의 30시간 산행에도 몸은 아픈 곳이 없었다. 몸이 새로워지자 걷는 일에 내몰려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볼 수 있었고, 느낄 수 없던 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산도 숲도 나무도 풀도 바람도 구름 등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 마음도 따라 새로워졌다.

숲으로 들어가는 길에 어린 나무들 늘어서 나를 반기는 듯했다. 지난 밤 내내 숲이 품고 있던 서늘한 기운이 몰려 왔다. 정신이 맑아졌다. 나뭇잎 바람에 때로 한들거리고 때로 출렁였다. 숲으로 들어가자 참나무 숲이었다. 신갈나무들 가득했다. 길 양 옆으로 늘어선 모습이 누군가를 맞이하는 듯 보내는 듯하였다. 풀잎마다 물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스틱으로 풀숲을 헤칠 때마다 물방울들이 튀었다.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아름다웠다.
▲숲은 생명을 키우고 ©이호상

백두대간을 걸어 온지 벌써 10주가 지나고 있었다. 전라도 산청군 중산리 지리산 천왕봉에서 시작한 산행이었다. 어느덧 대간 길의 절반을 넘어 소백산을 지나고 있었다. 강원도가 지척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 먼 길을 걸어 온 것이다. 지나 온 길 그대로 가슴에 남아 있었다. 때로 산길을 걸어 온 것이 아니라 저 홀로 마음 길을 걸어 온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때때로 꿈결 같았다.
하루에도 크고 작은 봉우리와 산을 수십 개씩 넘었으니 어림셈해도 1,000개가 넘는 봉우리와 산을 넘어왔다. 제각기 다른 이름을 지니고 있는 그 수많은 봉우리들과 산은 모두 다른 모습으로 다른 장소에 머물러 있었지만 모두 하나의 산이고 하나의 산줄기였다. 지리산도, 덕유산도, 속리산도, 조령산도, 소백산도 모두 다른 이름을 지니고 있지만 하나의 산줄기요 하나의 산이었다. 산들은 결코 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하나 되어 흐르고, 흘러들어 하나 되고 있었다.
백두대간은 하나의 산줄기이고 하나의 산이었다. 지리산은 덕유산으로, 덕유산은 속리산으로, 속리산은 조령산으로, 조령산은 소백산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태백산, 오대산, 설악산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그렇게 흐르고 흘러 금강산과 두류산과 낭림산을 지나 백두산까지 흘러들고 있었다.
백두대간을 걷는 동안 나는 이 산줄기들처럼 그렇게 흘러들기 원했다. 내가 백두대간을 걷는 것이 아니라 산줄기에 몸을 실어 그저 함께 흘러갈 수 있기를 소망했다. 바람에 실리고, 길에 실리고, 산줄기에 실려 몸 맡긴 채 그저 흘러들기 바랐다. 더 이상 흘러들 수 없는 곳까지 그렇게 흘러 갈 수 있기를 바랐다.

참으로 그렇게 흘러들 수 있을까.

마음 간절하여 아득했다. 지나는 숲마다 나뭇잎 무성하고 숲 울창했다. 여름 깊어진 숲은 이미 푸르러질 대로 푸르러 짙었다. 가을이 왔음을 알고 가을을 준비하는 숲이다. 어쩌면 숲 짙어지고 깊어져 가을을 부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름이 가고 있음을 아쉬워하는 매미들의 울음소리 애절했다.

일주일 밖에 허락되지 않은 짧은 생에서 남겨 두고 갈 사랑을 찾지 못한 마음이 오죽하랴.

울음소리 구성지고 구슬펐다. 참나무 우거진 숲이었다. 신갈나무 사이로 간간이 굴참나무 보였다. 숲 바닥에는 둥굴레 가득하였고 숲길에는 나뭇잎 사이로 들어온 햇살 가득하였다. 햇살을 따라 햇살을 밟으며 걸었다.
미내치(820m)에서 잠시 쉬었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마구령 4.8km'라고 적힌 곁에 가야할 방향이 표시되어 있었다.

삶의 길목 길목에도 이렇게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나 온 세월을 따라가다 마음을 접었다. 마구령을 향했다. 헬기장을 지났다. 산행 내내 보이지 않던 야생화들이 있었다. 붉은 엉겅퀴 슬프고 금마타리 웃음 짓게 했으며 억새는 그저 마음에 젖어들었다. 숲은 고요하고 정갈했다. 십승지의 대명사라는 양백지간의 숲이어서 그랬던 것일까. 숲은 풍성하면서도 깊고 정갈하고 고요했다.
▲마을로 들어서다 ©이호상

마구령(馬駒嶺, 820m)이었다. 경북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와 임곡리를 남북으로 이어주는 고개다. 장사꾼들이 말을 몰고 다녔던 길이라고 하여 마구령이라 불렀다고 한다. 장사꾼들이 말을 몰고 장사를 다녔던 고개지만 이곳에도 단종과 금성대군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남겨져 있다.
마구령 북쪽의 남대리는 '정감록'에서 이르는 십승지 가운데 한 곳이자, 남사고가 양백지간에 있다던 숨겨진 명당에 자리한 마을이다. 첩첩 산줄기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펑퍼짐한 너른 터가 있어 순흥으로 유배 왔던 금성대군이 이곳에서 단종 복위를 위하여 병사를 양성했다고 한다. 물론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그 병사들의 대다수도 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시계를 보니 12시 45분이었다. 4시간 25분의 짧은 산행이었지만 시작할 때와 달리 피로가 몰려왔다. 단종의 애절한 삶이 마음을 무겁게 한 것일까. 마음 무거웠다. 쉬고 싶었다. 잠시 앉아 쉬었다. 동료들은 제각기 하고 싶은 일들을 하고 있었다. 마구령 표지석에 기대어 사진을 찍기도 하고 막걸리 한 잔에 산행의 피로를 씻어내고도 있었다.
햇살 뜨거웠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항락(恒樂) 장승이 보고 싶었다.

최창남/글
이호상/사진
Chamsu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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