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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함께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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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함께 걷다

[최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32> 하늘재~저수령/7.29~31

산행 스무이레 째. 목요일.

지난 두 달 남짓 산을 지나는 동안 나는 늘 기다렸다. 나를 괴롭히던 오른 허벅지의 근육통과 왼 무릎의 통증이 사라지기를 기다렸고, 몸이 산행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 무더운 날에는 바람이 불어오기를 기다렸고, 가슴 답답한 날에는 비 내리기를 기다렸다. 산의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는 날에는 바람 불어 나뭇잎 몸 부비며 흔들리고 숲 출렁이기를 기다렸고, 하고 싶은 말 가슴에 가득한 날에는 골마다 운무 피어올라 내 마음 데려가기를 기다렸다. 그 뿐 인가. 좁은 산길 지나는 이들을 마주칠 때면 먼저 지나가기를 기다렸고, 밧줄에 의지해 암벽을 지날 때면 앞 선 이들 완전히 지나기를 마음 졸이며 기다렸다. 어디 그 뿐인가. 산길을 걷는 내내 끝나지 않는 길 끝나기를 기다렸고, 끝내는 걸을 수 없는 길 끝내 걸을 수 있기를 소망하며 기다렸다. 기다린 것이 어디 그것뿐이랴. 살아가는 일에 쫓기고 젊은 날 세운 뜻에 내몰리어 잃어버린 제 삶이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잃어버린 사랑이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다시 내 삶을 기쁘고 즐겁게 헌신할 수 있게 되기를 기다렸다. 상처 받은 내 영혼이 치유되기를 기다렸다. 마음의 소리를 온전히 들을 수 있기를 기다렸다.
산의 소리를 듣고 싶었다. 산이 내게 하는 말을 가슴으로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많은 순간들이 지나는 내내 듣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다. 그 때마다 기다렸다. 마음을 열고 천천히 걸으며 숲의 울림, 산의 소리가 들려오기를 기다렸다.
나는 산을 걷는 내내 기다렸다.
산은 내가 산을 걷는 내내 기다림을 가르쳐주었다. 기다림은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풀과 나무, 나뭇잎과 바람, 골과 구름 그리고 벌레와 새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이 제 모양대로 살아가는 모습들을 하나씩 하나씩 보여주었다. 모든 생명들의 모습이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고 뜻이 다르기 때문에 숲이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함께 살아가야만 하고 또한 함께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다. 혼자 앞서 빨리 가려고 하지 말고 함께 천천히 가라고 가르쳐주었다. 즐겁고 기쁘게 살아가라고 말해주었다. 숲의 소리였다.
그렇게 산길을 지나며 기다림을 배우는 동안 가까운 길을 가더라도 먼 길을 돌아가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아이들도 아는 아주 간단한 삶의 지혜를 깨닫는데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의 세월이 걸렸으니 말이다.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야 제 삶의 의미를 깨달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삶은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어진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지혜 얻어 마음 새로워지고 영혼 깊어지기를 기다리는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그저 흐른다고 하지만 그저 흐르는 시간은 없다.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할 뿐이다.
▲옛벌재 ©최창남

벌재(625m)에서 다시 산행을 시작했다. 들목재와 문복대를 지나 저수령까지 가는 짧은 거리였다. 짧은 산행 탓인지 마음이 편안했다. 여유로웠다. 부슬부슬 안개비가 내렸다. 안개비가 우리를 감쌌다. 고개와 숲과 산을 덮었다. 고개 한 편에 있는 정자 기둥에는 '이 기둥은 황장목으로 만들었습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작은 팻말이 부착되어 있었다. 다소 생경했다. 안개비 내리는 숲과 어울리지 않았다. 깊은 숲에 들어와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낯선 도시인 같았다. 옛 벌재로 갔다. 옛 벌재는 새로 난 벌재와는 달리 아늑하고 포근했다. 우거진 숲 사이로 나 있는 작은 고개는 마치 걸음과 걸음을 잇고 마음과 마음을 이어줄 것 같았다. 지나온 길과 가야 할 길을 이어줄 것 같았다. 가야 할 길과 갈 수 없는 길을 이어줄 것 같았다. 고개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숲은 서로 길을 내어 고개를 넘어 오갈 수 있었다. 저 길을 따라 숲으로 들어가면 수많은 숲의 이야기들이 가슴으로 젖어들 것 같았다.

"선생님, 이리 오시죠."

김 대장의 말이었다. 고개를 내려가니 백두대간 벌재 표지석이 놓여 있었다. 표지석에는 문경시 동로면 작성리라는 주소도 적혀 있었고 이 작은 고개가 백두산과 지리산을 이어주고 있다는 표식도 되어 있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에게 잊힌 작은 고개지만 백두대간이 지나고 있는 고개이다. 이 작은 고개가 사라지면 백두대간 길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고 끊어지는 것이다. 소중한 고개라 생각하니 살가웠다. 피붙이처럼 정겨워졌다.

숲으로 들어갔다. 숲은 울창하고 길은 편안했다. 부드러운 흙길이었다. 산행거리도 길지 않은 터에 길까지 부드러우니 마음 편안했다. 조금 내리던 비도 그쳐 있었다. 간간이 한 두 방울 바람에 휘날릴 뿐이었다. 이름 없는 봉우리를 지나며 마음 설레고 들떴다.
바람 세찼다. 숲의 모든 나뭇잎들이 일제히 술렁였다. 마치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만에 만나는 옛사랑을 그리워하며 설레는 듯 출렁였다. 그 모습이 지난 밤 나눈 사랑에 볼 붉혀 손사래 치는 여인네 같기도 하고, '오랜 세월 기다렸다'고 '그러니 어서 오라'고 부르는 사랑하는 이의 손짓 같기도 했다. 이름 없는 산의 참나무 숲은 나뭇잎 출렁이는 소리로 가득했다. 그 소리를 따라 걸었다. 나뭇잎들도 나무들도 숲도 산도 함께 걸었다.
▲숲을 지나다 ©이호상

세찬 바람에 떨어진 나뭇잎 흩날렸다. 나뭇잎 한 장 발 앞에 떨어졌다. 숲은 나뭇잎 한 장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나뭇잎 한 장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면 숲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나뭇잎 한 장의 삶과 죽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숲의 삶과 죽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언제쯤에야 나뭇잎 한 장의 의미를 온전히 알 수 있을까. 그것을 깨달아 알게 될 때쯤이면 몸은 죽어 땅에 묻혀 나뭇잎 한 장으로 돌아가겠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본다. 마음도 영혼도 나뭇잎 따라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들목재에 들어섰다. 아침 7시 40분이었다. 들목재는 문복대라고 불리는 운봉산 자락에 깃든 동로면 석항리를 말하는 것이다. '들목'은 순 우리말로서 '들고 나는' 것을 의미한다. 바람이 들고 나고 사람이 들고 나는 곳이 바로 들목재이다. 들목재에 앉아 쉬었다. 들고 나는 것이 많아야 할 고개에 사람 들고 나지 않고 바람만 들고 나다가 오랜만에 사람이 들어서 그런지 불던 바람도 불지 않았다. 들고 난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니 말이다. '들목'이라는 이름이 이 땅에 널리 퍼지기를 소망했다. 제대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아 병을 앓고 있는 이 사회에 소통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했다.

들목재를 떠나 문복대(門福臺, 1074m)로 가는 길에 비 쏟아졌다. 참나무 가득한 숲 위로 비가 쏟아졌다. 무성한 참나무 잎들이 내리는 빗줄기들을 막아서 산길 지나는 우리를 지켜주었다. 빗줄기는 점점 거세졌다. 우의를 입었다. 빗방울이 우비에 부딪치며 '탁탁 타다닥 탁탁 타다닥' 소리를 냈다.

문복대에 올랐다. 문복대는 경북 예천군과 문경시, 충북 단양군의 경계지점에 위치해 있는 산이다. 백두대간이 죽령, 도솔봉, 향적봉, 저수령을 지나 문경 지역으로 들어오면서 맨 처음 품은 큰 산이 바로 운봉산이다. '들목이'라는 아름다운 우리 말 이름을 가지고 있는 동로면 석항리 사람들은 이 산을 '문복대'라고 부르고 있다. 백두대간 산줄기가 소백산을 거쳐 예천군을 지나 문경 땅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지켜 서서 복(福)을 불러오는 문(門)과 같은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백두대간이 지나는 것을 큰 복으로 여겼던 그들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는 이름이다. 백두대간을 복을 내려 주어 생명을 영위하게 하는 하늘길이자 생명길로 여겼던 그들의 믿음과 바람이 그대로 전해진다.

비가 그치자 이내 더워졌다. 한 대장은 문복대 표지석 앞에 맥주와 사과를 내려놓고 복을 비는 듯했다. 비 그친 하늘에 가득하던 뭉게구름 골로 내려와 온 천지가 그대로 구름 바다였다. 골마다 구름이 두텁게 드리워 마치 솜을 펼쳐 놓은 듯 하고 바다 같기도 하였다. 다소 흐린 날씨 탓이었을까. 골에 드리운 구름은 산 아래 들녘까지 내려 뻗은 듯 깊어 보였다. 장엄했다. 하늘길에 서서 발 아래로 두텁게 드리운 구름들을 바라보았다. 구름 위를 걷고 있으니 굳이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이 백두대간은 이미 하늘길이었다.
▲문복대에서 바라보다 ©이호상

길지 않은 산행이었지만 길은 길을 부르며 이어졌다. 장구재로 가는 길에 나리꽃 가득하여 아름다웠고 표지판 하나 변변하지 못했던 장구재(860m)는 외로워 보였다. 그러나 쓸쓸해 보이지는 않았다. 외로운 이들 품어 안은 고요함 같았다. 풀숲 사이로 열린 고개는 아스라했다. 마치 그 고개에 서있으면 오랜 날 기다렸던 그리운 이가 고개 너머에서 걸어올 것만 같았다. 잠시 고개에 서서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리움 밀려 올 듯 눈가 붉어지고 가슴 시려와 이내 길을 재촉했다.

저수령(底首嶺,850m)이었다. 경상북도 예천군 상리면 용두리와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올산리를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경북과 충북을 넘나드는 고개이다. 이 고개 이름이 저수령이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나는 도로가 나기 전에는 길 험하고 숲 우거져 지나는 이들이 절로 머리를 숙여야 했기 때문이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저수령에서 은풍곡(殷豊谷)까지 피난길로 많이 이용되어 왔는데 이 고개를 넘는 외적들은 모두 목이 잘려 죽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왜적의 목이 잘렸다는 의미를 담은 저수령이라는 이름은 통쾌하기는 하지만 아름다운 고개의 이름으로는 안 어울리는 것 같았다. 숲 우거지고 길 험하여 절로 고개를 숙였다는 의미의 저수령이라는 이름이 아름답고 기품 서린 고개의 모습에 어울리는 듯했다. 산이란 본래 지나는 이들의 마음을 씻어내고 비워 겸허함을 가르치는 곳이니 말이다.

언제나 겸허해질 수 있을까.
언제나 산길 지나며 절로 고개를 숙여 마음을 씻어낼 수 있을까.
▲마음 씻어주는 숲 ©이호상

햇살 뜨거웠다. 스틱 허리에 받쳐 들고 산허리를 따라 나 있는 도로를 걸어 내려갔다. 아지랑이 이는지 앞서 가는 이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바람 한 점 없었다.
나뭇잎들은 바람을 기다리며 그리웠고 나는 지나 온 길을 돌아보며 그리웠다.
산은 참으로 정직했다.
아픈 것은 아픔 그대로 품어 안게 했고, 서러운 것은 서러움 그대로 흐르게 했다.
그리운 것은 그리움 그대로 그리워하게 했고 사랑하는 것은 사랑 그대로 사랑하게 했다.

산은 언제나 나와 함께 있었다.
함께 잠들고 함께 걸었다.

최창남/글
이호상/사진
chamsu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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