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황장산으로 들어가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황장산으로 들어가다

[최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31> 하늘재~저수령/7.29~31

산행 스무엿새 째. 수요일.

눈을 뜨니 새벽 3시 30분이었다. 가볍게 세면을 하고 마당으로 나왔다. 산자락이라서 그런지 기온이 찼다. 칠월 말 한여름을 지나고 있는데도 선뜩했다. 하늘을 바라보다 절로 탄성을 질렀다. 하늘은 별 무더기였다. 별 쏟아지고 있었다. 쏟아지는 별을 마음으로 다 받지 못하여 이리저리 흘려보냈다. 계곡물 소리 정겨웠다. 별빛에 기대어 계단을 내려가 물가에 서니 별은 그곳에도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흐르는 물줄기에도 별 가득했다. 물줄기 바위에 부딪쳐 출렁이고 넘실거릴 때마다 별은 더욱 빛을 발하며 제 모습 드러내고 있었다. 작은 물줄기 굽이칠 때 마다 별도 함께 일렁였다. 그 빛 아련하여 마음도 함께 일렁이는 듯했다. 여러 해 전 써 놓았던 시 '별이 저 곳에 있다'가 생각났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한다
밤을 새워 별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담배 연기 자욱하고 지친 술잔이 일그러져 보인다
답답한 마음에 슬그머니 방을 빠져 나와 밤길을 걷는다
동구 밖 미루나무 아래서 바라보니
하늘에 별 가득하다
가득한 별들 사이로 은하수가 지난다
하늘에만 별 가득한 것이 아니다
몇 걸음 더 걸으니 달빛에 젖은 강물에도 별 가득하다
강물이 은빛으로 넘실댄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가슴이 선뜩해지는 아름다움이 그곳에 있다
살아온 내 인생의 날들이 거기 있다
살아갈 내 삶의 날들이 거기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마음 깊어진다
잰 발걸음으로 돌아가
별이 저 곳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무도 듣는 이들이 없다
모두들 별에 대해 이야기 하느라 바쁘다
그들의 별은
담배 연기 속에서 떠오르고
술 잔 속에서 저문다
나는 말없이 강가로 돌아와 강물을 들여 본다
별 가득 부서져 내린다
은빛이다
은빛으로 출렁이며 유유히 흐른다
별과 달만 흐르는 것이 아니다
나무도 흐르고 풀도 흐른다
나무들 풀들 사이로
내 모습도 보인다
나도 거기 있어 함께 흐른다
나도 흐른다
눈가에 눈물이 고인다
눈물에도 별 어린다
별 가득하다
별이 그곳에도 있다
강가엔
그림자만 남아 있다
('별이 저 곳에 있다' 전문)

언제나 별은 이 곳에 있었지만 사람들의 별은 저 곳에 있었다. 늘 그것이 마음 아팠다. 산은 늘 우리를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우리는 산을 제멋대로 오르며 타고 넘었다. 산은 이리 가라고 산줄기 가지런히 뻗으며 길을 열고 있었지만 우리는 제멋대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고 있었다. 산행 기간 내내 늘 그것이 마음 아팠다. 백두산을 향해 오르던 산길을 돌려 지리산으로 내려가야 하는 산행이 서글펐다. 오늘 산행도 비법정 탐방로가 있다는 이유로 어제 내려온 새목이재에서 시작하지 못하고 벌재에서 새목이재로 내려갈 예정이었다.
▲길에서 만나다 ©이호상

'이렇게 산행을 해도 되는 것인가? 이리 걷든 저리 걷든 대간 길 이어 걸었으니 되는 것인가? 백두대간을 걸었다는 것 외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쩔 수 없는 일인가?'

산은 모든 생명 품어 안은 채 모든 생명에게 열려 있건만 사람들은 사람들이 지나지 못하도록 산길을 막았다. 사람들로부터 숲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숲과 자연이 없으면 사람은 살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사실 숲을 황폐화 시키는 주범은 사람이 아니라 자본이다. 거대 자본이다. 그리고 그 자본으로부터 숲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람뿐이다.
숲은 저 홀로 제 몸 돌보며 풍성하고 산은 저만치 물러서 우리를 바라보며 의연한데 사람들만 저희들끼리 모여 옳고 그르다며 아우성이다.

벌재(625m)로 향했다. 벌재라는 이름이 주는 아담함과 소박함과 달리 벌재에는 제법 큰 도로가 나 있었고 한 편으로는 굵은 철망이 빼곡히 쳐 있었다. 초소도 있었다. 순간적이나마 철망에 갇힌 것 같았다. 굵은 철망이 산을 둘러 빼곡히 쳐져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닌데 새삼스러웠다. 벌재라는 이름은 '붉은 재'에서 왔다고 한다. 벌재의 남쪽 마을이 문경시 동로면 적성리인데 이 이름에서 고개 이름을 따 왔다는 주장이다. 적성리의 적자가 '붉을 적'(赤)이어서 고개 이름이 '붉은 재'가 된 것을 이 고장 말로 '벌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사실성을 알 수는 없으나 그럴 듯해 보인다. '붉은 재' 보다는 '벌재'라는 이름이 살갑다. 그러나 길 새로 열린 벌재는 살가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삭막했다.
▲벌재 ©이호상

산으로 들어갔다. 거의 직각으로 서있는 벽처럼 느껴지는 산길이었다. 걸어 오르지 못하고 산길에 붙어 올랐다. 마른 나무뿌리 부여잡으며 몸을 산길에 찰싹 붙였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로 미끄러지고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가쁜 숨 입 밖으로 몰아내며 산을 오르는 동안 머리는 그저 하얬다. 능선에 올라 겨우 숨을 돌리자 그제야 불어오는 바람결을 느낄 수 있었다. 숲을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새벽 숲은 물 머금은 안개 그득했다. 바람이 허공을 움켜쥐듯 지났다. 그 기운에 놀란 나뭇잎들 흔들렸다. 타다닥 타다닥 소리가 났다.
'바람이 없다면 산길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고마운 마음이었다. 928고지를 지나 조망바위에 앉으니 멀리 치마바위가 보였다. 정상 일대에 있는 화강암 절벽이 치마를 펼친 것 같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정말 치마처럼 흰 바위에 검은색 줄이 그어져 있는 것 같았다. 주름치마처럼 보이기도 했다. 시샘을 하는 것인가. 구름이 치마바위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지나고 하늘은 조금씩 어두워졌다.
'비가 오려나.'
서둘러 길을 나섰다. 하늘 어두워지고 바람 거세지더니 폐백이재에 이르렀을 때 빗방울이 떨어졌다. 귀신이 나온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은 혼자서는 이 길을 지나지 않는다는 고개이다. 곱게 차려입은 새색시가 시부모에게 폐백을 드리는 광경을 떠올려 폐백이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치마바위라는 이름도, 폐백이재라는 이름도 모두 처녀와 관련되어 있는 이름이다. 아무래도 채 전해지지 못한 처녀의 가슴 아픈 사연이라도 묻혀 있는 듯하다.
▲매달리다 ©이호상

치마바위에 올랐다. 구름이 지나고 있었다. 구름 속에 앉아 산줄기를 바라보았다. 김 대장은 황장산 구간은 늘 운무에 가려 있어 좀처럼 조망을 열어주지 않는다고 하였지만 굳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산은 시야를 열어 주었다. 구름 지나자 푸른 산줄기 눈에 가득했다. 만수봉, 포암산, 부봉, 주흘산, 조령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길이 물길처럼 흐르고 있었다. 하늘엔 휘감아 도는 물길처럼 구름 꿈틀거리며 흐르고 골마다 피어오르는 운무는 불꽃처럼 타오르며 빨려 들어가듯 하늘로 올라 그대로 구름 되어 흐르고 있었다.
황장재(985m)로 가는 길에 노란 원추리 꽃 한 송이 피어 아름다웠다. 제법 굵어졌던 빗줄기는 황장재에 도착했을 때 그쳤다. 산행을 서둘렀다. 비 내리기 전에 암릉이 많은 황장산을 넘어야 했다. 칼날 바위가 눈앞에 있었다. 마치 사진에서나 보던 금강산을 닮은 듯 끝이 뾰족한 작은 봉우리들이 칼날처럼 서 있었다. 스틱을 접고 두 손으로 바위를 더듬어 잡으며 건넜다.

황장산(黃腸山, 1077m)에 올랐다. 지나는 구름 사이로 지나온 길을 바라보니 대미산이 보였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구름 사이로 문수봉과 운달산도 드문드문 하였다. 동북으로 뻗은 산줄기를 바라보니 가야할 길 아득했다. 늘 가보고 싶었던 소백산(小白山, 1439.5m)이 거기 있어 나를 부르는 듯했다.
▲기다림을 보다 ©이호상

황장산은 문경시 동로면에 있는 산으로 조선 말기까지는 작성산(鵲城山)으로 불렸다. 이는 산경표에 기록되어 있는 이름으로 고려시대의 산성으로 보이는 작성산성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천황의 정원'이라고 하여 '황정산(皇廷山)이라고 불렸다. 지금도 그렇게 부르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또한 이 산은 '황장봉산(黃腸封山)'이라는 다른 이름도 가지고 있다. 이는 조선조 숙종6년(1680년) 이 일대를 나라에서 '봉산'(封山)한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봉산이란 나라에서 궁정이나 선박 등에 필요한 목재를 얻기 위해 나무를 심고 가꾸기에 적당한 지역을 선정하여 국가가 직접 관림, 보호하는 산으로 지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곳에는 황장목이 많았다고 한다. 황장목은 줄기의 고갱이 부근에 송진이 적절히 베어들어 속살이 누런 소나무를 말한다. 그 모양이 마치 누런 창자와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균열이 적고 단단해 임금의 관이나 대궐을 만드는데 쓰였다. 대원군이 이 산의 황장목을 베어 경복궁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아쉽게도 지금의 황장산에는 황장목이 없다. 모두 참나무로 숲의 천이(遷移)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멧등바위에 섰다. 아득했다. 밧줄이 걸려 있었다. 위로가 되었다. 밧줄에 익숙해진 탓이다. 멧등바위를 오르는 이들이 있다. 가까운 벗들 부부 동반으로 온 듯 시끌벅적하였다. 한 사람 한 사람 오르는 것을 기다렸다. 기다리며 지나는 구름 바라보았다.
▲백두대간 남한구간 중간지점 표지 ©이호상

밧줄을 타고 내려와 점심 식사를 한 후 차갓재로 향했다. 나무 울창해 햇살이 들지 않는 고개에는 '백두대간 남한구간 중간지점'이라는 표지석이 백두대장군과 지리여장군을 좌우에 거느린 채 서있었다. 앞면에는 중간지점을 나타내는 주소와 위치가 써있었고 뒷면에는 끊어진 백두대간 길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시적 언어로 쓰여 있었다.

통일이여! 통일이여!
민족의 가슴을 멍들게 한 철조망이 걷히고
막혔던 혈관을 뚫고 끓는 피가 맑게 흐르는 날
대간 길 마루금에 흩날리는 풋풋한 풀꽃 내음을 맘껏 호흡하며
물안개 피는 북녘 땅 삼재령에서
다시 한 번 힘찬 발걸음 내딛는
니 모습이 보고 싶다
2005년 7월 16일
문경 산들모임

그 뜨거운 마음이 전해왔다. 총칼로 끊어진 이 땅이 다시 이어지기를 원하는 간절한 바람이 전해왔다. 설레는 마음으로 이 땅의 등줄기인 백두대간을 걷게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고마운 일이다.

새목이재를 향했다. 산행을 시작한 것이 어제 같은데 벌써 백두대간의 절반을 지나고 있었다. 마음으로 걸어온 길이었다. 몸으로 걷지 않고 마음으로 걸었기에 걸어올 수 있었던 길이었다. 마음 길 따라 걸었기에 걸어올 수 있었던 길이었다.
가야할 길이 제법 남았는데 천둥이 치더니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늘을 따라 숲은 어두워졌다. 우의를 꺼내 입고 하루 전 내려왔던 새목이재의 길을 따라 내려갔다.
마을에 이르자 비가 그치고 햇살이 비쳤다. 산길 내려 온 우리를 만난 마을 주민은 반가웠던지 집 안 깊숙이 숨겨 두었던 오미자 주를 권한다.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는 마을답게 사람들도 소박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지닌 것 같았다.
▲봉산 표지석 ©최창남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황장산 봉산 표석이 있는 동로면 명전리 옥수동마을에 들렸다. 푸른 산자락은 푸른 논을 풀어 놓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온통 푸르렀다. 논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니 길 곁에 봉산 표석이 보였다. 오랜 세월 말없이 그 자리를 지켜 옛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황장산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숲 푸르고 논길 또한 아름다워 마음 가득 설렌 날이었다.

최창남/글
이호상/사진
chamsup@hanmail.net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