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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샘에 마음 씻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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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샘에 마음 씻고

[최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 〈30〉 하늘재~저수령/7.29~31

산행 스무닷새 째. 화요일.

새벽이었다. 고요했다. 잠 못 이루던 지난 밤 내내 요란하던 매미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하늘재 근처에 숙소를 구하지 못하여 다시 찾은 조령산의 여름밤은 깊고 창 밖은 어두웠다.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아직 지나지 않은 밤이 깊어 가야 할 길 아득히 느껴지는 새벽이었다.
하늘재에서 포암산과 대미산을 넘어 차갓재까지 가는 동으로 뻗은 약 18km의 산길이다. 지리산에서부터 북쪽 방향으로 뻗어 오르던 백두대간은 속리산을 지나며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흐른다. 대미산과 황장산, 벌재와 저수령을 거쳐 도솔봉에 올랐다가 죽령을 넘어 비로봉과 국망봉에서 가슴 쓸어내리고 고치령과 마구령과 박달령을 건너 구룡산을 마음에 품고 태백산에 이르기까지 백두대간은 동으로 흘러들고 있다. 그러다 태백산에서 낙동정맥을 만난 후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어깨 나란히 하고 첩첩한 산줄기 풀어놓으며 장대한 줄기를 북으로 뻗고 있다.
▲빛은 길을 열어주고 ©이호상

그렇게 동 쪽으로 흐르는 산줄기에서 맞는 새벽은 지나 온 길과 사뭇 달랐다. 해 뜨는 이른 새벽 숲은 눈부시고 밝았다. 물방울 달고 있는 나뭇잎들은 햇살을 받아 무지개 빛깔로 영롱하게 빛나곤 했다. 숲 사이 드리운 안개조차 반짝이며 뚜렷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숲은 보여주지 않던 깊은 속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길을 열어 주었다. 눈길 닿는 곳마다 나뭇가지를 치우고 나뭇잎을 거두며 속살을 보여주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러나 북으로 나있는 산길은 이와 달랐다. 북으로 흐르는 새벽 숲은 언제나 수많은 이야기를 감춘 듯 내밀한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 듯 신비로웠다. 숲은 밝음과 어둠으로 가득 차 아스라하고 신비했다. 드러난 것은 분명하고 감추어져 있는 것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 있는 것들의 모호함과 불투명함 때문이었는지 드러난 것들 조차도 때로 드러나지 않은 것처럼 모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북으로 흐르는 산줄기의 새벽 숲은 속살을 드러내지 않았다. 눈길은 언제나 모호함과 아스라함 그리고 신비로움에 막혀 돌아오고 길은 깊은 숲에 막혀 돌아올 뿐이었다. 그저 숲의 울림을 듣고 느끼며 숲의 깊이를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서둘러 산행 준비를 마치고 하늘재로 향했다.

관음리와 미륵리를 이어주는 고개인 하늘재는 그저 평범한 고개였다. 특별할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좁은 산길이 나 있을 뿐이었다. 특별한 것이 있다면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세운 초소가 있다는 것과 하늘재의 또 다른 이름인 계립령유허비가 세워져 있다는 것이었다. 계립령유허비에는 이 고개의 간단한 내력과 비를 세운 이유가 기술되어 있었다.

"... 태초에 하늘이 열리고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영남과 기호지방을 연결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맞아 장구한 세월 동안 역사의 온갖 풍상과 애환을 고스란히 간직해온 이 고개가 계립령이다.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와 충북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는 이 고개는 속칭 하늘재, 지릅재, 겨릅사, 대원령이라 부르기도 하며 신라가 북진을 위해 아달라왕 3년(156년) 4월에 죽령과 조령 사이의 가장 낮은 곳에 길을 개척한 계립령은 신라의 대로로써 죽령보다 2년 먼저 열렸다. ...(중략)... 조선조 태종 1년(1414년) 조령로(지금의 문경새재)가 개척되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령로가 험준한 지세로 군사적 요충지로 중요시되자 계립령로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점차 떨어지게 되어 그 역할을 조령로에 넘겨주게 되었다.
오랜 세월동안 묵묵히 애환을 간직해 온 계립령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보고 고개를 넘은 길손들에게 지난 역사의 향취를 전하고 그 뜻을 기리고자 이곳에 유허비를 세운다.
- 2001.1 문경시장-"

사람들이 잊고 있는 세월은 아쉬웠던지 제 흔적을 그렇게 돌조각에 남기고 있었다.
바람 없는 맑은 날이었다.

나무 사이로 나 있는 계단을 따라 숲으로 들어갔다. 숲은 젖어 있었다. 어두웠다. 숲길을 헤쳐 나갔다. 조금 걷자 돌길이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돌길이었다. 김 대장이 말을 건넸다.

"이 돌은 자연석이 아니라 성벽을 쌓았던 돌이래요. 무슨 성벽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돌길이 아니라 무너진 성벽이었다. 의식하지 않고 걸으면 그저 지나칠 수 밖에 없는 무너지고 버려진 성벽이었다. 역사 속에 또렷이 기록되어 있는 작성산성(鵲城山城)이었다.
문경군 동로면 황장산에서 충북 쪽으로 트인 험한 계곡의 물길 하류에 자연의 험준함을 이용해 쌓은 성벽이다. 누가 쌓았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고려 공민왕이 전란을 피해 대지국사의 안내를 받아 황장산 부근에 머물렀을 때, 작(鵲) 장군이 황장산에서 새 진지를 다듬고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올 뿐이다. 또한 그 보다 훨씬 앞서 927년 견훤이 이 성을 지키다 고려 태조 왕건의 공격을 받은 뒤 성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다는 이야기도 아울러 전해진다. 어쩌면 천 년의 세월을 건너 온 유서 깊은 성일지도 모르는 성이다. 이 나라의 역사를 두 눈으로 지켜보고 수많은 이들의 꿈과 희망을 품어 안고 있었던 성이다. 그러나 이제는 세월과 함께 잊힌 성이다. 이제는 산길에 묻혀 발에 밟히고 차이는 그저 돌멩이일 뿐이다.
세월의 흔적은 그렇게 산길에도 남아 제 이야기를 지나는 이들에게 전하고 있었다.

중복이었다. 아침부터 몹시 더웠다. 햇살이 정면에서 비쳐왔다. 몸은 벌써 뜨거워져 있었다. 하늘샘에 도착했다. 목을 축였다. 시원했다. 몸의 열기가 조금은 가라앉았다.

'샘의 이름도 하늘 샘이라니...'

관음리와 미륵리, 하늘재와 하늘샘이라는 이름에 담겨 있는 그들의 애틋하고 애절한 소망이 느껴졌다. 마음 슬프고 아팠다.

'어쩌면 이렇게 간절한 이름이 있단 말인가...!'
▲원추리 ©이호상

눈물 흘렸다. 흘린 눈물 마음에 씻고 포암산(布巖山, 962m)을 행했다. 길가에 노란 원추리 꽃 함초롬히 피어 가쁜 숨 몰아쉬는 이들을 맞아주었다. 잠시 걸음 멈추고 숨을 돌렸다. 마음 가라앉혔다. 순간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들어왔다. 숲으로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볼 수 없었던 것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무와 숲 사이 가득하던 안개의 결도 보이고, 그 너머에 있는 나뭇잎이 파르르 떨며 울리는 울림도 보였다. 햇살이 수맥을 따라 흐르고 기공을 투과하는 듯했다. 수맥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도 기공이 숨 쉬고 있는 모습도 보이는 듯했다. 숲은 모든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오랜 세월 마음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들을 토해 내려는 듯이.
▲하늘을 보다 ©최창남

월악산국립공원의 가장 남쪽에 있는 포암산은 여러 개의 다른 이름을 지니고 있다. 거대한 바위가 우뚝 선 모습이 거대한 피륙을 펼쳐 놓은 것같이 보인다고 하여 '베바우산'이라고 불리기도 했고, 희고 우뚝 솟은 바위가 삼대 같다고 하여 '마골산'(麻骨山)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또한 '작성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산으로 오르는 길은 가팔랐다. 밧줄에 매달리고 스틱에 의지하며 암릉을 올랐다. 암릉에 매달린 내 곁으로 구름이 지나고 운무 피어오르고 있었다. 허공을 밟고 오르는 것 같았다. 허공에 떠 있는 듯 구름에 실려 가는 듯하였다.
아득한 마음 끌어안고 정상에 오르니 포암산이라고 쓴 표지석과 돌탑이 나를 맞아 주었다. 뜨거웠고 바람 한 점 없었다. 무더웠다. 고추잠자리 한가로이 날고 있었다. 풀숲에 앉은 고추잠자리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무덥고 지친 중에도 어린 날처럼 마음 편안했다. 마치 어린 날 개울가에 앉아 있는 듯 했다. 고추잠자리, 밀잠자리, 말잠자리, 왕잠자리 잡으러 개울가를 뛰어다니던 유년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함께 뛰어 다니던 친구들의 이름이나 얼굴이 생각나는 듯했다. 입가에 절로 웃음 번졌다. 마음 평온했다.

포암산을 내려섰다. 내려가는 길은 오르는 길과 달리 부드러웠다. 흙길이었다. 마치 다른 산인 것 같았다. 김 대장은 하늘재에서 오르는 사람은 험한 산으로 기억하고 반대 방향에서 오르는 사람은 부드럽고 포근한 산을 기억한다며 저 혼자 웃었다.
만수봉 갈림길을 지나고 조릿대 우거진 숲길을 지나니 구름 아래 산 첩첩 늘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부르고 있었다. 참나무 가득한 숲은 뜨겁게 달궈진 듯 온 몸이 타는 듯했다. 지친 몸을 부축이고 달래느라 쉬웠다. 점심 식사를 하였다.
▲포암산을 지나다 ©이호상

대미산을 향해 떠났다. 뜨거웠다. 바위가 마치 꼭지처럼 생겼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꼭두바위봉'(838m)을 지나 1062.4봉에서 내려서니 부리기재였다. 잠시 쉬었다. 모두들 힘들어 했다. 더위에 지쳐있었다. 산행을 시작한 내내 나를 괴롭히던 오른다리의 허벅지 통증과 무릎의 통증은 김명옥 작가에게 옮겨간 듯했다. 조금씩 아파오던 무릎의 통증은 이번 산행부터 심해져 있었다. 맑은 물 김명옥은 산행을 늦게 시작했다고 통증도 늦게 찾아온다며 쓴 웃음 지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오르는 듯 마는 듯 대미산(大美山, 1115m)에 올랐다. 천고지가 넘는 높은 산을 오른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산은 부드러웠다. '크게 아름다운 산'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는지 산은 부드럽고 너그러웠다.
대미산은 백두대간 상에 위치한 큰 산으로 문경지역 모든 산의 주맥(主脈)이다. 조선 영, 정조 때 발간된 문경현지(聞慶縣誌)에는 대미산을 문경제산지조(聞慶諸山之祖)라고 적고 있다. 대미산에서부터 문경구간의 백두대간이 시작된다는 의미이고 문경의 산들 중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대미산은 발음은 같으나 뜻을 드러내는 한자 표기는 자료에 따라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산경표나 문경현지에는 '검은 눈썹의 산'이라는 의미의 '대미산'(黛眉山)으로 표기되어 있고, 대동여지도에는 '두루 크다'는 의미의 '대미산'(大彌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가 '크게 아름다운 산'이라는 의미로 부르는 '대미산'(大美山)과는 다른 의미의 이름들이다. 오늘날 부르고 있는 '대미산'(大美山)이라는 이름은 퇴계 이황 선생이 지은 것이라고 1926년 발간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은 전한다.
그러나 '크게 아름다운 산'이라는 이름과 달리 그다지 조망은 좋지 않았다. 정상은 억새만 무성할 뿐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다. 대간 길 벗어나 숲으로 들어가면 미처 만나지 못한 아름다움이 숨어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때로 우리 사는 삶이 그러하듯이.
▲눈물샘 ©이호상

뜨거운 날씨에 쫓겨 산을 내려와 샘으로 향한다. 내려 선 산의 숲이 울창하다. 넝쿨들이 나무를 휘어감아 마치 원시림에 들어온 듯 하고 설앵초 홀로 피어 낯설었다. 샘으로 내려갔다. 젖은 길은 매우 가파르고 미끄러웠다. 나뭇가지를 붙들고 스틱에 의지하며 내려갔다. 조심스레 내려가 내려 온 길을 돌아보니 온통 꽃밭이었다. 노루오줌, 산꿩의 다리, 동자꽃, 이질풀, 나리꽃 등 온갖 야생화들이 어울려 피어 있었다.

'샘이 있어서 이렇게 많은 꽃들이 필 수 있었을까.
눈물샘이 있어 이렇게 수많은 생명들이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눈물샘에서 목을 축이고 얼굴을 씻었다. 물통에 물을 받아 머리에 부었다. 차가운 기운이 심장을 타고 핏줄을 지나 발끝까지 전해졌다. 큰 눈썹 아래 있는 샘이어서 '눈물 샘'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샘이다. 눈물샘이라는 이름이 잘 어울리는 듯했다.

'이 샘은 정말 이 산의 눈물이 아닐까. 어디 하나 모난데 없이 두루 뭉실한 이 산이 생명 품어 안기 위해 흘린 눈물이 아닐까. 그 눈물로 인해 수많은 꽃들이 저토록 아름답게 피어 있는 것이 아닐까.... 나도 저 꽃들처럼 다른 이들의 눈물로 인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흘린 눈물들도 다른 이들을 살아가게 하고 있을까...'

눈물샘에 머물며 쉬었다. 젖어 있는 숲은 깊었다. 산행을 다시 시작했다. 차갓재로 향했다. 그러나 산행은 곧 멈추었다. 지친 체력으로 차갓재까지 가기 어렵다고 판단한 한 대장의 결정이었다. 새목이재에서 마을로 내려섰다. 그러나 길은 쉬이 나오지 않았다. 알지 못하는 길을 찾아 가고 길 아닌 길을 만들며 나아갔다. 내를 건너고 숲을 벗어나자 마을이 보였다.
길을 따라 내려가니 마을이었다.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마을 곁으로 제법 큰 내가 흐르고 있었다. 산으로부터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었다. 마음 비칠 것 같았다.
배낭을 내려놓고 나무 밑둥치에 기대어 앉았다.
▲산행을 마치고 ©이호상

'눈물샘에서 흘러나온 물도 함께 흐르고 있겠지...'
'저렇게 흘러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씻어주겠지...'

그렇게 흐르고 흘러 제 마음 잃어버리고 사는 이들에게 까지 흘러가기를 빌었다.
바람 선선하고 마을로 난 길 다정한 오후였다.
저녁이 오려는지 하늘 저 편 붉어지고 있었다.

최창남/글
이호상/사진
chamsu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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