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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재에 서다

[최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29〉 이화령~하늘재/7.23~24

산행 스무나흘 째. 목요일.

조령산의 새벽은 상쾌했다. 민박집 앞 너른 마당에는 창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어른거렸다. 어둠은 숲에 머물고 있었고 나무들은 깨어나려는 듯 요란했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나뭇잎들은 서로 부딪히며 '파라락 파라락' 소리를 냈다.

수 백 년 전에도 저 나무들은 저렇게 소리를 냈겠지.
저 소리를 벗 삼아 잠들었던 이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조선 시대의 새재는 한양에서 부산 동래까지 이어진 영남대로 가운데 가장 큰 고개였으니 많은 사람들이 이 고개를 지나기 위해 머물렀으리라.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들어 쉬어간다는 험하고 높은 고개이니 사람들 또한 이 고개에서 잠들었으리라.

수 백 년의 세월을 넘어 온 숲과 머물었던 이들이 살갑게 느껴졌다. 어둠 곁에 앉았다. 계곡 물 흐르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러나 새벽의 정적 속으로 빨려 들어간 듯 숲은 고요했다. 물 흐르는 소리, 바람 지나는 소리,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들이 어우러진 숲은 깊은 정적 속에 있어 소리가 사라진 듯했다. 깊은 적막만이 머물고 있었다.
일찍 잠든 밤도 아니었건만 새벽이 내게만 서둘러 찾아온 듯 이르게 눈이 떠졌다. 코고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듯 울려났다. 잠든 이들 놓아두고 마당으로 나온 길이었다.
하늘 길인 백두대간을 걷기 시작한지 두 달이 지나고 있었다. 대간 길의 절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몸은 조금씩 산행에 적응해 가고 있었고 산길을 지나는 마음은 즐거웠지만 때로 이 길을 따라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때때로 왜 걷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숲은 수많은 이야기를 전하고… ©이호상

그저 이 땅의 등줄기라는 백두대간을 걸어보는 것인가.
다큐멘터리 '백두대간 공존의 숲' 촬영을 위해 힘듦을 이겨내며 견디고 있는 것인가.
총칼에 의해 끊어진 하늘 길 백두대간을 이어보고 싶은 염원에 마음 기울여 걷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산 지나고 숲 지나며 마음을 씻다 보면 어리석은 제 뜻에 매몰되어 잃어버린 제 삶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일까. 잃어버린 자신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에 걷고 있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다시 사랑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던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저 걸을 뿐 알 수 있는 것도 말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민박집엔 불 밝혀 있었다. 모두들 일어나 산행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조령 3관문에서 하늘재까지의 산행이었다. 그러나 비법정탐방로가 있다는 이유로 하늘재에서 산행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마음 편치 않았다.

하늘재는 하늘길인 백두대간을 지나는 이들 외에는 거의 행인이 없는 옛 고개이다.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에서 충북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 사이를 이어주는 고개이다. 하늘과 맞닿아 있다 해서 하늘재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기도 하지만 높이는 525m로 그리 높지 않다. 하지만 하늘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갯길이다. 최초로 뚫린 고갯길이다.
신라 제 8대 아달라(阿達羅) 왕이 재위 3년(156년) 북진을 위해 길을 열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겨릅산', '계립령'으로 기록되어 있고 고려사에는 '대원령(大院嶺)'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마골점(麻骨岾)', '마골산(麻骨山)'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뿐 아니라 한원령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늘재 ©최창남

하늘재라는 이름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이 이름은 많은 함축된 의미를 안고 있다. 하늘에 맞닿아 있어 하늘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안고 있다. 그것은 하늘재라는 이름이 고단한 삶을 살아가던 민초들의 소망과 간절한 바람이 깃들어져 있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민초들의 소망길이요 백두대간과는 또 다른 하늘 길이었기 때문이다. 고단한 현실 너머에 있는 관음 세계와 미륵 세계를 이어주는 통로요 들어가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관음 세계와 미륵 세계를 향해 열려 있는 그들의 소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단지 이 고개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 관음리이고 서쪽에 있는 마을이 미륵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하늘재가 관음리와 미륵리를 이어주는 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하늘재가 민초들의 사랑을 받았던 이름이었다는 것은 관음리와 미륵리라는 마을 이름에서 쉽게 알 수 있다. 관음리와 미륵리가 있었기에 하늘재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고 이 이름들 안에 살아가기 힘든 그들의 삶이 그대로 담겨 있다. 슬픔과 절망과 분노와 희망 등이 그대로 담겨 있다. 삶이 얼마나 고단하였으면 마을 이름이 자비의 상징인 관음리가 되고 민초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시는 미륵이 되었을까.

그들의 마음이 그러했으니 이 두 마을을 이어주는 이 고개는 당연히 하늘재가 되었으리라.
이 고개를 지나고 그 마을로 들어갈 때 마다 고단한 세상을 하루 속히 떠나 하늘에 오르기를 염원하였으리라.
등 따습고 배 불리 먹을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고대하였으리라.

하늘재라는 이름에 담겨 있는 그들의 절망과 희망을 느끼며 마음 슬프고 아팠다.

또한 삼국이 서로의 북진과 남진을 막거나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차지해야 하는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던 이 고개는 마의 태자 이야기를 빌어 민초들의 마음 한 자락을 다시 오늘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하늘재에서 충주 방향으로 내려가면 '미륵사지'가 있다. 고려 초기에 세워진 사찰이다. 이 사찰에 부드러운 얼굴의 미륵석불이 세워져 있다. 이 석불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북향석불'이다. 당시 민초들은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던 마의 태자와 덕주 공주 남매가 세웠다고 믿었다고 한다. 석불은 마의 태자 자화상이고 북쪽을 향하고 있는 것은 덕주 공주 상인 월악산 덕주사 마애불을 바라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랬을 것 같지 않다. 고려 초에 세워진 사찰에 마의 태자가 지나며 석불을 세웠을 것 같지도 않고 쫓기는 길에 그런 여유가 있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륵 대불을 마의 태자 자화상으로 생각했던 것은 천 년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마의 태자에 대한 애틋한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마의 태자는 끝까지 나라를 지키고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그의 마음이 민초들에게 전해졌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소백산 줄기를 지나면서도 망한 나라의 수도인 경주 방향을 바라보며 울었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마의 태자가 눈물 흘렸다는 봉우리가 소백산 줄기의 국망봉(國望峰)이다.
가난한 삶을 살았던 이들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마음이 전해진다.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하늘재는 더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려는 듯 고요했다.
바람이 불어왔다. 젖은 숲 사이로 불어온 바람에 나뭇잎 나부꼈다.

월항삼봉(月項三峰, 856m)이라고도 불리는 탄항산(炭項山)에 이르렀을 때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불어왔다. 나뭇잎들은 펄럭였고 숲은 물결처럼 출렁였다. 갈망하는 듯 그리운 듯 외로운 듯 슬픈 듯 했다. 옛날에는 봉화를 울리던 곳이라고 하여 산 남쪽 월항 마을 사람들은 봉화봉이라고 불렀던 산이었으나 봉화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물기 머금어 젖은 숲이 햇살에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나뭇잎 하나하나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소나무와 바위들도 빛나고 있었다. 남쪽으로 주흘산이 보였다. 산이 솟아오를 때 산 밑에 도읍을 정하리라 생각하고 솟아올라 왔다는 산이다. 솟아보니 서울의 삼각산이 먼저 솟아 있어서 삼각산을 등지고 앉았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령산, 포암산, 월악산 등과 더불어 소백산줄기의 중심을 이루는 아름다운 산인 주흘산은 백두대간 길에서 벗어나 있어 멀리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어찌 모든 것에 욕심을 내랴. 남겨두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평천재를 지나 부봉(釜峰, 917m) 갈림길에 이르렀을 때 빈산 김남균 대장은 부봉을 들러 가자고 말했다.

"부봉이 백두대간 줄기에서 벗어나 있지만 정말 아름다워요. 조망도 참 좋아요.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르니 조금 힘들더라도 다녀오시지요?"

부봉은 문경새재 제2관문인 조곡관 뒤에 우뚝 솟아 있는 바위산으로 6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있고 물박달나무, 자란초, 미치광이풀, 냉초 등 희귀식물들이 많아 경치가 빼어난 아름다운 산이다. 그러나 아무도 따라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아무에게서도 반응을 얻어내지 못하자 김 대장은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 역시 따라 나서고 싶지 않았다. 우리를 위해 산행을 권하는 김 대장의 마음이 고마웠지만 그저 산행을 빨리 마치고 쉬고 싶은 마음 또한 있었다. 여러 가지로 안쓰럽고 미안했다. 빈산 김 대장에게 말했다.

"김 대장님, 좋은 스승은 많은 것을 한꺼번에 가르치는 것이 아니에요. 마찬가지로 좋은 제자도 한꺼번에 많은 것을 배우려고 해서도 안 되고요. 그러니, 부봉은 아쉽지만 나중을 위해 남겨 놓고 오늘은 그저 지나치시지요?"
▲동암문에서 쉬다 ©이호상

김 대장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부봉이 그리웠던지 홀로 길을 달리해 부봉으로 갔다. 우리는 잠시 더 쉰 후 길을 이어갔다. 동암문에 이르렀을 때 늘 곁에 있었던 듯 김 대장이 우리의 뒤를 따라왔다. 산사람다운 빠른 발걸음이었다. 바라보고 웃으니 그도 웃었다.

암행어사 박문수가 이 산을 넘을 때 마패를 관문 위의 봉우리에 걸어놓았다고 하여 마패봉(馬牌峰)이라고도 불리는 마역봉(馬驛峰, 927m)에 올랐을 때 어두워져 있던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땀으로 찌든 몸 시원했고 마음 가벼워졌다.

다시 조령 제3관문으로 내려섰다. 12시 40분이었다. 이르게 끝난 산행이었다. 이번 주의 산행을 생각하자 마음 한 구석이 허전했다. 조금은 허무한 느낌이 들었다. 첫날인 화요일은 자동차 고장으로 늦게 내려와 산행을 하지 못하였고, 둘째 날인 수요일은 조령산을 넘은 후 오후 3시에 산행을 이르게 마쳤다. 그리고 마지막 날인 오늘은 더 이른 시간에 산행을 마쳤다. 정오 조금 지났을 뿐이었다. 이번 주의 산행을 모두 마친 것이다. 이제 숙소로 돌아가 식사를 한 후 집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아 있었다. '이런 날도 있고 이런 산행도 있지.'하고 마음 편하게 생각하였지만 쉽게 그리 되지 않았다. 마음 편치 않았다. 산행을 위해 준비한 사람들의 수고와 노력 등 많은 일들이 생각났다.
약수에 목 축여 어지러운 마음을 씻고 길을 따라 내려갔다. 제3관문을 지나 숙소로 가는 길에 산림청에서 세운 백두대간 조령이라고 쓴 거대한 표지석이 보였다. 표지석에는 조령의 유래가 자세히 쓰여 있었다.

"백두대간 조령산과 마패봉 사이를 넘는 이 고개는 옛 문헌에는 '초점'(草岾)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鳥嶺)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어원은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또한 '하늘재'(麻骨嶺)와 '이우릿재'(伊火峴) 사이에 있다고 해서 '새(사이)재' 혹은 '새(新)'로 된 고개라서 '새(新)재'라고도 한다.
조령은 조선시대에는 영남과 한양을 잇는 중요한 길목으로서 영남대로(嶺南大路)라 불렸으며 군사적 요충지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령 혹은 새재라고 부르는 이 고개의 또 다른 이름은 문경새재이다. 이 고개는 영남의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품고 과거를 보기 위해 넘던 고개였다. 황간의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과거에 떨어지고, 풍기의 죽령을 넘으면 대나무처럼 죽죽 미끄러진다 하여 문경새재를 넘는다는 속설이 있는 고개였다. '경사스런 소식을 듣는다'는 뜻을 지닌 문경(聞慶)이란 지명의 이름에 기댄 속설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위로 받고 싶었으리라.
▲햇살 드리우다 ©이호상

내려가는 길에 산을 찾은 이들의 발길이 분주했다. 세상으로 내려가는 길은 산길과 달리 어수선하고 시끄러웠다. 산을 찾아 온 이들도 마음 다스리지 못해 어수선했고 산길을 지나 집으로 가고 있는 이들도 마음 다스리지 못해 시끄러웠다.

이렇게 산행을 이어가도 되는 것일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마음을 지나갔다. 빗방울이 조금씩 굵어지고 있었다. 식사를 하고 짐을 정리한 후 차에 오르는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많은 비였다. 폭우였다.
끝났다던 장마는 아직 끝나지 않은 듯 했다.
아직 한 낮인데도 어두웠다. 바람 불었다. 나뭇잎 부딪히고 나뭇가지 흔들렸다. 물결이 이는 듯 숲이 일렁이고 출렁였다. 차창을 조금 여니 바람과 빗방울이 들이쳤다. 시원했다. 그제야 마음에 이는 많은 생각들을 조금이나마 내려놓을 수 있었다.
흔들리는 빗줄기만큼이나 마음 흔들린 산행이었다.
하늘재 마음에 품어 애틋했던 산행이었다.

최창남/글
이호상/사진

Chamsu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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