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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령산은 길을 열고

[최창남의 '백두대간을 따라 걷다'] 〈28〉 이화령~하늘재/7.23~24

산행 스무사흘 째. 수요일.

조령산으로 들어갔다. 다시 찾아 온 우리가 반가웠던지 여기저기서 새들의 노랫소리 들려왔다. 새들의 노랫소리는 숲을 감아 돌다가 마음으로 들어오기도 하고 하늘로 오르기도 했다. 어제 내린 비 탓이었을까. 하늘은 시리도록 맑았고 숲에서는 향기가 났다. 나무가 뿜어내는 향기와 젖은 낙엽의 냄새가 어우러져 그윽하며 싱그러웠다. 세월 깊은 오랜 숲의 묵직하고 퀴퀴한 냄새가 나지 않았다. 싱그럽고 맑은 기운이 가득했다. 눈길 닿는 곳마다 숲은 깊고 울창했다. 때로 원시림을 지나는 것 같기도 했다. 처음 오르는 길이 아니었건만 낯선 길을 가는 듯 새로웠다. 그러나 다시 보는 너덜 길 반가웠고 산허리에 가까스로 매달린 좁은 길도 살가웠다. 다시 조령샘에 올랐다. 목을 축였다. 눈부시고 가슴 시리도록 맑은 물이었다. 가쁜 숨으로 눌려있던 가슴이 트였다.

물은 산의 영혼이 아닐까. 수 천 수 만 년 변함없이 깊고 맑은 모습으로 산을 지나는 이들의 마음을 씻어주고 몸 위로해 주던 산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까. 정기가 아닐까.

조령샘의 맑은 물에 마음을 적시며 산행을 즐길 수 있기 바랐다.

조령산(鳥嶺山, 1025m)은 충청북도 괴산 연풍면과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경계선상에 위치해 있다.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예전에는 공정산(公正山)이라는 운치 없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산림 울창하고 암벽지대가 많은 조령산은 기묘한 모양의 바위와 절묘한 봉우리 그리고 노송 등이 어울려 눈길 닿는 곳마다 한 폭의 그림인 천하절경의 명산이다. 주위에 신선봉(神仙峰, 967m)과 주흘산(主屹山, 1106m)을 거느리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월악산, 문수봉, 소백산 등으로 이어지고 남쪽은 속리산으로 이어진다.

소백산맥의 줄기에 우뚝 솟은 천하의 명산 조령산은 우리가 산으로 드는 것을 쉬 허락하지 않았다. 지난 금요일(18일)에는 탈진으로 인해 산행을 조령샘에서 멈추어야 했고 어제(22일)는 자동차 고장으로 산으로 들어서지 못하였다. 백두대간 산행 중 가장 험한 구간이라는 조령산을 넘는다는 긴장감과 기대감으로 설레었지만 산길은 열리지 않았다.
산은 오늘에야 비로소 길을 열어주었다.
산으로 들어서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세 번 만이었다.
마음과 몸이 준비된 후에야 산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가르침이 아니었을까.
산은 우리를 받아 주었다. 마음이 편안해 졌다.
햇살이 비쳤다. 올려다 보니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였다. 새털을 닮은 구름들이 점점하였다.
▲숲은 길을 열고 ©이호상

정상을 향했다. 풀숲에 노란 원추리 아름답게 피어 산을 오르는 이들을 위로했다. 숲은 깊었다. 살아가고 쓰러진 나무들 가득했다. 어제 만난 조령의 숲이 생각났다. 숲은 깊고 울창하여 생명 가득했다. 흙으로 돌아가는 생명들 또한 많았다. 바람에 꺾이고 부러진 나무들 위로 숲의 분해자인 버섯이 빠르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흙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병들어 죽어가는 나무들도 있었다. 암에 걸린 나무들도 있었다. 그 나무들은 죽어가고 있지만 죽어감으로써 숲을 이롭게 하고 있었다. 숲을 풍성하고 아름답게 만든다. 병든 나무에 꼬인 벌레들을 잡아먹기 위해 새들이 모여들기 때문이다. 병든 나무들에게는 슬픈 이야기지만 숲으로 보면 좋은 일이다. 이처럼 숲에는 태어나는 새로운 생명과 주검들이 어우러져 있다. 언제나 한 생명의 주검은 다른 생명의 탄생으로 이어지며 숲을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삶과 죽음이 하나인 곳이 숲이다.
서로 다른 삶과 죽음의 모습을 지니고 있기에 서로를 살리고 있는 곳이 숲이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기에 모두가 하나인 곳이 바로 숲이다.
서로 다른 생명의 모습을 지니고 있기에 모두를 살릴 수 있는 곳이 숲이다.
때로 서로가 살아가는 근거가 되고 이유가 되고 목적이 되기도 하는 곳이 숲이다.
사람 사는 세상과는 달리 어떠한 이유로도 서로를 해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곳이 숲이다.

정상에 오르자 백두대간 조령산이라고 쓴 표지석이 눈에 들어왔다. 바위에 앉으니 나무 가지 아래로 첩첩한 산줄기 아득하였다. 산줄기와 산줄기들이 품은 골에서는 운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올올이 피어올라 구름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하늘에 구름이 가득했다.
어제 비 내린 탓일까.
유달리 운무 가득했다. 운무를 타고 나무도 바위도 산도 모두 하늘로 오르는 듯 했다.

비 내린 탓만은 아니니라.
산이 깊으니 골이 깊으리라.
골이 깊으니 바람 거세고 운무 또한 가득하리라.
▲지현옥 추모비 ©김남균

정상 한 편에 나무로 만든 작은 비석 세워져 있었다. 이 산에서 산에 마음을 빼앗기고 산악인이 된 후 1999년 4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서 불꽃같은 짧은 생을 마감한 여성 산악인 지현옥의 추모비였다. 그녀는 에베레스트 등정과 가셔브럼Ⅱ봉(8035m) 무산소 단독 등반 등 여성으로서는 믿지 못할 기록을 남겼다. 전문 산악인으로서의 그녀의 삶은 주검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정상에 오른 것 보다 여성 산악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극복하는 데 더 많은 노력과 수고를 기울여야 했다. 슬픈 현실이다. 지현옥은 1993년 한국 여성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대장으로 뽑혔다. 그녀는 숱한 차별과 좌절을 이겨내고 세계 최고봉 등정에 성공하였다. 후배 여성 산악인들이 자신처럼 차별 받지 않고 활동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산이 준비된 이들에게 길을 열어주듯이. 훗날 지현옥은 당시의 심경을 밝혔다.

"에베레스트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시험무대였다. 온 몸을 갈기갈기 찢을 것 같던 육체적 고통을 첫 원정에서 체험했다면 에베레스트에서는 넘을 수 없는 편견을 넘어가야만 했다. 여성 등반가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 앞에서 좌절의 고통과 서러움을 이겨내고서야 에베레스트로 가는 길은 열렸다. 그런 사회적 냉소와 질시에 비하면 시체가 나뒹구는 에베레스트 사우스콜의 죽음의 공기도 견딜만했다. 여자끼리 만의 오기로 뭉쳐진 팀을 이끌었고, 나는 그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견뎌내게 하는데 성공했다."

얼마나 마음의 상처가 깊었을까.
얼마나 자신과 함께 했던 대원들이 자랑스러웠을까.

그녀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다.

끝나지 않는 길을 따라 산을 내려 왔다. 절벽 위쪽에 노란 원추리 피어 위태했다. 제 몸을 던져서라도 지나는 이들을 위로하기 위함이었을까. '근심을 잊게 하는 풀'이라는 원추리가 곳곳에 피어 있었다. 봄철에는 어린 싹을 따고 여름철에는 꽃을 따서 김치를 담가 먹거나 나물로 무쳐 먹는다는 원추리였다. 한방에서는 약재로도 쓰이는 꽃이다. 이래저래 말 그대로 근심을 잊게 해주는 풀이다. 이구화가 쓴 '연수서'에는 원추리에 대해 이렇게 쓰여 있다.
▲원추리 ©이호상

"원추리의 어린 싹을 나물로 먹으면 홀연히 술에 취한 것 같은 마음이 황홀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를 망우초라고 한다."

망우초(忘憂草)라는 한자 이름도 그럴 듯하지만 '넘나물'이라는 우리말 이름이 더 정겹다.

멀리 거대한 암봉이 보였다. 신선암봉(神仙巖峰, 937m)이었다. 우리를 따라 오는 듯 길을 따라 흐르는 구름과 함께 걷다보니 신선암봉의 너른 바위가 우리를 반가이 품어주었다. 말 그대로 구름을 타고 온 신선이 머물렀을 것 같은 암봉이었다.
바위에 앉으니 그대로 신선이 된 듯했다. 눈앞은 기암괴석과 깊은 골들 어우러져 기묘하고 장엄했으며 골마다 피어오르는 운무와 어우러져 신비했다. 황홀했다. 그대로 선경이었다.

신선이라고 어찌 이런 광경을 쉽게 지나칠 수 있었겠는가.

나처럼 머물러 마음 내려놓고 있었을 것이다.

형제삼봉을 향했다. 밧줄에 매달리고 바위 부여잡으며 암벽을 내리고 오르기를 거듭했다. 거대한 암릉을 오르며 지친 몸을 쉬느라 잠시 돌아보니 지나온 길 보이지 않고 산줄기 첩첩하였다. 가까이 있었던 하늘은 저 멀리 물러나 아득했다. 거대한 암릉을 오르자 커다란 바위 위에 소나무들 뿌리 내려 살아가고 있었다. 바위들은 그 단단한 가슴 열어 여린 씨앗을 받아들이고 품어 큰 나무로 키워내고 있었다.

나도 저 바위들처럼 생명들을 받아내어 품어 줄 수 있을까.
수많은 생명 품어 안을 수 있을까.
▲생명을 받아들이다 ©이호상

형제삼봉을 지나기 전 점심 식사를 하고 산길을 이어가다 무너진 성터에서 잠시 쉬고 나니
조령 3관문이 지척이었다.

3관문인 조령관에 내려섰다. 하늘에는 그 많던 구름 사라져 푸르기만 했다. 조령(鳥嶺, 650m)이었다. 문경새재라고 부르는 새재였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당신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진격을 막기 위해 내려왔던 조선의 장수 신립(申砬, 1546~1592)이 지키지 않아 온 나라가 전란에 휩싸이게 되는 슬픈 역사의 현장이다. 신립은 천혜의 요새인 새재를 지키지 않고 충주 탄금대로 물러나 배수진을 치고 왜적을 막았으나 전멸하고 말았다. 자신이 거느린 기마병을 믿고 택한 전술이라고 하지만 상황에 맞는 전술 선택이 아니었다. 그가 선택한 지형은 저습지였고 전날 비까지 내려 온통 진흙탕이었기 때문이다. 말도 보병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으니 왜적의 조총에 일방적으로 당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윤제학은 그의 책 '산은 사람을 기른다'에서 신립의 이해 할 수 없는 전술과 관련한 전설을 전하며 재미있는 촌평까지 달아 놓았다. 전설의 내용은 이러하다.
선조의 명을 받고 내려온 신립은 새재를 지키려고 하였는데 꿈에 한 처녀가 나타나 탄금대에 배수진을 칠 것을 호소했다. 신립은 그 처녀의 말대로 하였다가 전멸하였다. 그 처녀는 일찍이 주흘산의 요귀로부터 신립이 구해준 처녀였는데 자신의 연정을 신립이 받아들이지 않자 원한을 품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원귀가 되었다는 것이다.
윤제학은 이 전설을 소개한 후에 재미있는 촌평을 달아놓았다.

"어쩌면 처녀 귀신은 삼척동자라도 당연히 구사했어야 할 전술을 포기한 신립(지배자)에 대한 민중들의 원망과 비웃음의 상징이 아닐까. 모름지기 우두머리가 된 사람이라면 마땅히 여럿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일이다. 산은 참 별것도 다 가르쳐 준다."

참으로 통찰력 있는 해석이다. 그러나 한 나라의 존망을 결정하다시피 한 전쟁에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처녀 귀신 이야기를 만들어낸 민초들의 마음에서는 윤제학의 해석과는 다른 마음이 엿보인다.

아마도 원망과 비웃음 보다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하였던 신립의 행동을 억지로라도 이해하기 위한 슬픈 노력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해서라도, 억지로라도 이해하지 않으면 그들의 처지가 너무 슬프고 비참했을 것이니 말이다.

"선생님, 이리 오시지요."

한 대장이 약수를 내밀었다. 조선 숙종 34년(1708년) 성을 쌓을 때 발견되었다는 조령 약수였다. 이 고개를 넘었을 수많은 사람들의 목을 적시고 마음을 적셔주었을 물이었다. 사시사철 마르는 법도 없고 많이 마시면 장수를 한다고 하여 백수영천(百壽靈泉)이라고 불렸다는 약수이다. 맛나게 마셨다. 조령산을 넘으며 흘린 땀방울이 모두 씻겨 나가는 듯했다.
▲조령3관문 ©이호상

3관문으로 들어가니 숲 사이로 길이 나있었다. 도로를 따라 내려갔다. 숙소인 조령산 휴양림 식당으로 향했다. 숲은 우거졌고 계곡에서는 맑은 물이 흘러내렸다. 스틱을 씻고 손을 씻었다. 물이 차가웠다.
흐르는 물에 씻은 탓이었을까.
몸은 차가워지고 마음은 맑아졌다.
종일 불어오지 않던 바람이 계곡을 타고 흘러내렸다.
물길을 타고 바람 흐를 때마다 찬 기운이 몸을 지났다.
지나온 조령산이 그곳에 있는 듯 흐르는 물길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나뭇가지 흔들리고 나뭇잎 출렁거리는 오후였다.

최창남/글
이호상/사진
Chamsu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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