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신라 유적지 연구를 위해 남한을 샅샅이 뒤진 그녀가 지금은 북한을, 그 중에서도 개성을 할 수 있는 한 촘촘히 들여다보고 있다. "사실 처음에는 북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 국립극동연구원 한국분원의 소장이 되었고, 한반도를 연구하는 연구자로서 북한 지역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한반도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한국 사람들에게는 금지의 공간인 북한을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그녀가 참 부러웠다.
"나는 매우 행운아다. 인생을 통털어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살아왔다. 물론 죽고 사는 것처럼 선택할 수 없는 일들도 있지만 그 외의 부분에서는 정확히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살아왔다. 고고학자로서의 인생에도 만족한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점은 이 자유를 얻기 위해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며 하고 싶은 것을 다하며 살아왔다는 그녀가 무척이나 부러웠다.
하지만 더 부러웠던 것은 "학비에 있어서 프랑스는 한국과 달리 국립대학의 등록금이 매우 싸다. 한화로 한 20만 원 정도? 아마 현재는 물가가 올라 35만 원 정도? 꾸준히 학업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학비가 싼 대신 세금을 많이 내야 한다.(웃음)"는 그녀의 대답이었다. 우리네 청춘들도 그녀처럼 국가나 사회 혹은 다른 개인들에 의해 구속받지 않을 '소극적 자유'만을 누리는 것이 아닌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스스로 원하는 바를 성취해낼 수 있는 '적극적 자유'를 맘껏 누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인터뷰 내내 바라고 또 바랬다.
▲ 엘리자베스 샤바놀 프랑스 국립극동연구원 한국분원장 ⓒ프레시안(최형락) |
최근들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나 활동이 있다면 듣고 싶다.
요새 북한에서의 프로젝트로 굉장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행해질 프로젝트에 몰두하고 있다. 내년에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프랑스와 한국 간 외교 역사에 관한 전시회를 준비 중에 있다. 2006년에 고려대학교 박물관과 프랑스에서 동시에 전시회를 개최한 바가 있었는데 내년 전시회에 이때 쓰인 전시의 일부분이 쓰일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 독일 등 다른 외국 각지를 돌며 진행될 순회 전시회에도 쓰일 예정이다. 말하자면 유럽 외교 역사에 관한 전시회의 시작이라고 보면 된다. 또 다른 일로는 '개성 유적'에 관한 책을 집필하고 있다. 요즘은 너무 바빠서 다른 일을 할 짬이 없다. (웃음)
그리고 최근에 작은 진돗개를 키우기 시작했다. 이름이 '나예'다. 아름다울 '나'에 예술 '예'를 써서 나예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몇 달 전에 12 살 먹은 애완견이 죽어서 슬퍼하던 중에 유기동물 보호소에서 '나예'를 데려와 기르기 시작했다. 순종 진돗개는 아니지만 상당히 귀엽다.(웃음)
연극이나 콘서트와 같은 공연을 좋아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공연이 있다면?
예술, 음악, 발레, 뮤지컬과 같은 공연에 관심이 많고 좋아한다. 이 분야 사람들도 많이 알고 있다. 개인적으로 강산에 씨와 친분이 깊다. 강산에 씨는 18년간 알고 지냈는데 부인과도 잘 알고 지내는 사이다. 최근에 콘서트도 다녀왔다. 또한 얼마 전엔 뮤지컬 '바람의 나라'를 보고 왔다. '바람의 나라'는 고구려와 관련된 이야기로 모두 3편으로 구성된 시리즈 물이다. 2001년에 공연한 1편은 못 봤지만 2006년부터 2009까지 2편이 무대에 올랐고, 이번에 보고 온 것이 3편이다. 유명한 배우들은 아니었지만 젊은 배우들이었고 기획이 상당히 좋았다.
한국 고분을 연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프랑스인으로 한국 고분에 대해서 연구한다는 것이 매우 특별해 보인다.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다면?
사실 나는 과학도였는데, 어느 날 고전 예술, 역사에 흥미를 갖게 되어 역사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파리에 있는 루브르 박물관 대학에서 박물관학 학위를 받고 나서 파리4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정말 우연히 오게 되었다. 마치 운명처럼.(웃음) 일본에 갈 예정이었는데 비행기 값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대한항공을 타게 됐고, 일본 가기 전 서울에 잠시 머무르게 되었다. 당시 오래 머물진 않았지만 한국에 다시 돌아오게 되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파리4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한국에 자리가 나게 되었는데 아무도 지원자가 없었다. 사실 나는 공부를 위해 중국을 갈 예정이었는데 한국에 가겠다고 자원을 했다. 이후 고대 한국미술사와 고고학 전공으로 두 번째 석사 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공부했는데, 한국에 와서 당시 한남대에 계시던 최병현 교수님(현 숭실대 교수)께 도움을 받았다. 대전에 머물렀기 때문에 '백제'에 관련된 연구를 많이 했고, 무령왕릉을 연구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신라 고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삼국시대에 대해 연구하고 싶었는데 그 당시는 북한에 가기도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고구려 관련 유적에 접근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자연히 백제와 신라중심으로 연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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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하지 않는 분야를 연구하면서 혹시 외롭다거나 힘들다고 느낀 적은 없는가?
물론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만큼 재미있다. 유럽 학생들에게 종종 하는 얘기가 '전문적인 직종에서 재미있게 일하고 싶다면 스스로 그 길을 개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대학원에 있을 때 누구도 한국에 오려 하지도 않았지만 즐거웠기 때문에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었다.
한국에 잠시 머무는 동안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는데 어떤 인상을 받았었나?
그 당시 한국인들은 지금과 매우 달랐다. 늘 웃는 얼굴이었고 지금보다 적은 스트레스 때문인지 굉장히 행복해 보였고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 당시에는 이야기한 것처럼 한국 고대사는 프랑스에서는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던 미개척분야였을 것 같다. 한국으로 선뜻 떠나오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용기가 어디서 나왔나?
일본을 왕복하며 한국에서 머문 이틀 동안 받은 인상 때문이다. 지금도 기억하는데 처음 도착한 날이 서울에서 민방위훈련이 있기 하루 전인 1981년 2월 14일이었다. 당시 머물렀던 숙소가 서울가든호텔이었는데 잠깐이긴 하지만 서울 시내 구경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훈련 때문에 바깥을 돌아다니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리고 모든 상점이 일제히 닫힌 모습에 약간 충격을 받았다. 그 때가 전두환 정권 시기였다. 그게 한국에 대한 첫 인상이었다. 매우 강렬했다. 그리고 프랑스에 돌아가 공부를 한 후 1986년 연구를 위해 한국에 다시 오게 되었다. 한국에 와서 대전 유성에서 살았는데 당시에는 시골이었다.(웃음)
한국고분을 연구하면서 한국문화에 대한 이해도 클 것 같다. 본인에게 한국 문화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중국 역사도 같이 공부해야 해서 힘든 점들이 많지만 그만큼 흥미로운 점들이 많다. 삼국시대를 이룬 한반도와 중국으로부터의 영향, 일본과의 연관관계를 연구하려면 상당한 지적 수준이 요구된다. 그렇기 때문에 도전할만하다고 생각한다. 친구들 중에 한국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최근에 꽤 있는데 대부분 근대한국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다. 한국 고대에 대해 공부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만나보기 힘들다. 어렵기 때문이다. 만약 나에게 다시 한국 고대사 공부를 하라면, 다시 할지는 모르겠다.(웃음) 그러나 여전히 나에게 재미있고 흥미로운 것은 사실이다.
더하자면 한국에는 많은 아름다운 고대 예술이 있다. 특히 백제 고분에서 아름다운 예술품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가끔 이해하기 힘든 고고 유적들도 있지만 계속해서 연구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해가 될 때가 있다. 그럴 때 매우 행복함을 느낀다. 현재는 대부분 고려시기에 대해 그 중에서도 개성 성벽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다.
고구려 고분연구로 북한도 왕래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특별히 북한 고대사에 대해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있다면?
사실 처음에는 북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 국립극동연구원 한국분원의 소장이 되었고, 한반도를 연구하는 연구자로서 북한 지역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개인적인 여행으로 북한에 가보았다. 이때 북한 유적 연구소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할 수 있었고 이후 북한 사람들과 개성 성곽 연구 프로젝트를 같이 시작하게 되었다. 지금은 이와 관련해서 북한 정부와 공식적으로 MOU를 체결하여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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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들은 외국 사람들보다 오히려 북한을 오가기도, 북한 사람들과 교류하기도 쉽지 않다. 여러 가지 법적 제약들이 많이 있다. 프랑스 국적을 가졌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은 쉽게 가지지 못하는 경험을 하는 것 같다.
꼭 그렇지도 않다. 몇 년 동안 남북한 고고학 전문가들이 팀을 이뤄 개성 만월대를 연구했다. 개성공단이 시작되기 전인 2004년에 발굴 팀이 조직되었고, 이후 2007년부터 2010년 천안함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 이 팀이 만월대 발굴 연구를 진행했다. 그리고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곧 다시 시작할 예정으로 알고 있다.
개성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면?
비록 이것도 꽤 오래 전 이야기가 되었지만 개성을 볼 수 있는 것은 남한 사람들에게 기회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북한을 돌아볼 기회이기 때문이다. 개성은 고려의 수도였던 만큼 한국사에 중요한 유적들이 매우 많다. 남한 사람들은 주요 문화유적지로 경주나 공주만을 생각하는데 개성도 역사의 일부분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곳의 유적을 발굴하는 것은 그 역사를 일깨울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개성이라는 공간이 남과 북을 이어줄 수 있는 다리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
그렇다면 북한에서 발굴활동을 하며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
남한 고고학자들과 일하는 것이 즐거운 것만큼 북한 고고학자들과 일하는 것도 즐겁다. 같은 한반도 역사를 공유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통하는 것이 많다. 또한 역사학자로서 개성에서 하는 작업은 매우 흥미롭다. 나는 신라 고분전문가이기 때문에 개성에 가기 전엔 개성의 고분을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삼국시대의 역사와 조선의 역사가 간극이 큰 만큼 개성에 가는 것은 나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북한의 좋은 사람들과 일하고 있기 때문에 매번 갈 때마다 행복을 느끼고 보람을 느낀다.
20여 년 동안 한국에서 생활했다. 거의 한국 사람이 다 되었을 것 같다. 한국 생활 중 가장 좋은 점은 무엇이고, 가장 불편한 점은 무엇인가?
알다시피 나의 가족과 친구들이 한국에 있다. 인생의 반은 프랑스에 있었고, 반은 한국에 있었다. 양국을 오가며 한국에서 어떤 어려움도 느끼지 않고 산다. 물론 처음에는 한국어도 전혀 할 수 없었고, 문화차이로 어려운 점들도 많았다.(웃음) 현재와 비교해 그 당시의 한국은 폐쇄적인 사회였다. 더욱이 내가 살던 유성은 그 때 당시 완전 시골이었다. 정말 어디를 가든 참기름 냄새가 났다.(웃음)
이제는 어떤 어려움도 없다. 단지 한 가지 한국에 살며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사람들이 길을 다니며 다른 사람들을 보고 다니지 않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치고 지나가는 일이 있어도 미안해하지 않는다. 길에서 누군가 곤란을 겪고 있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아마 이 부분은 한국에서 평생 산다 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에 갔을 때는 반대였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대단했다. 프랑스는 그 중간 정도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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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더 말하자면 오늘날 프랑스도 많이 변했다. 파리의 전철에서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배려심이 많이 사라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전에는 그런 일이 전혀 없었는데 애석한 일이다. 세계가 이렇게 변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웃음)
한국은 사실 여러모로 정치, 경제, 문화 여러 면에서 미국을 따라하는 경향이 많다. 프랑스인과 동시에 유럽인으로서 미국식 모델을 많이 따라가는 한국 사회를 볼 때 어떤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부터 받은 인상이 문화적으로 미국보다는 유럽과 한국이 매우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은 많은 변화가 있었고 매우 경쟁적인 사회가 되었다. 자살률도 매우 높고 한국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는 것 같다. 서로 충분히 돕고 살지 않는 것 같다. 돈과 물질적인 것만 매우 중요시한다. 가족과 친구의 가치를 되새겼으면 한다. 아까도 얘기한 것처럼 길거리에서 서로 먼저 치고 지나가고 사회 전반적으로 그런 분위기인 것 같다.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무슨 이득을 얻을 수 있겠는가. 사회의 높은 위치에 서고 싶다면 다른 사람과 싸워서는 안 된다. 스스로와 싸워야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경쟁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은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며 스스로를 라이벌로 삼아야 한다. 돈과 물질적인 것이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고 싶다. 어떤 소녀였나?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에 특별히 행복이라는 것을 느끼진 못했던 것 같다. 많이 심각한 아이였던 것 같다. 어릴 때 부모님께 종종 화를 냈고 그럴 때는 나에게도 화가 나 방으로 가 울곤 했다. 또 화를 풀기 위해 피아노도 쳤다. 11살 때부터 기숙학교에 다녔는데 그 기간은 어려운 일도 많았고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공부는 열심히 했다.(웃음) 많은 것을 배우고 공부했다. 테니스도 배웠고, 17살 때 비행기 조종을 배우기 시작하며 행복을 느낀 것 같다.(웃음) 그래서 전반적으로 진지하면서도 행복한 10대를 보낸 것 같다.
특별히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면?
1930년대 비행기를 조종한 여인들을 매우 존경했다. 비행은 일종의 자유를 상징했기 때문이다. 비행을 처음 배우기 시작하며 프랑스의 지형을 알게 되었다. 부모님이 리옹 주변에 살았기 때문에 산을 넘어 비행하며 근사한 경치를 볼 수 있었고 나도 세계의 일부분이라는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비행하는 것을 너무 좋아했고, 비행에 관련된 인물들을 함께 좋아했던 것 같다. 그 외에도 몇 년 전에 사망한 프랑스 저널리스트 프랑스와즈 지루(Francoise Giroud)를 존경한다. 그녀는 기자로 일하다 '렉스프레스'지를 창간했으며 프랑스 첫 여성 장관이 된 인물이다. 페미니스트였으며 훌륭한 일도 많이 했고 많은 책을 집필해 남겼다.
어릴 적부터 자의식이 강한 소녀였던 것 같다. 프랑스 여성들은 사회활동은 어느 정도 활발한 편인가? 프랑스도 혹시 남성에 비해 여성을 차별하는 문화가 있나?
경우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한 가지, 10대 때부터 나는 내 인생을 책임지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이 늘 '네 인생이고, 네가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누군가 도와주길 기다리지 마라'라고 얘기하셔서 그런 것 같다. 그러나 내 세대의 많은 친구들이 그렇게 살지 못 한 것 같다. 상류층에 속하는 친구들 대다수가 가정주부다. 프랑스도 많이 변하고 있는 것 같긴 하다. 내가 처음 비행기 조종을 배울 때는 여자가 나밖에 없었다. 지금도 아주 많진 않지만 꽤 많아졌다고 한다. 프랑스 여성들은 북유럽 여성들에 비해 전통적이다. 프랑스 여성들은 일하는 동시에 가정을 돌본다. 매우 가정 중심적이다. 내가 알기로 프랑스는 일하는 여성에 대한 정부 지원이 잘 되어 있는 편이다. 그래도 집안에서 해야 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프랑스 여성들은 전반적으로 강하다.(웃음) 프랑스 여성들의 삶도 쉽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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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시기, 가슴에 품었던 꿈이 있다면 무엇이었나?
꿈이라기보다는 아까 얘기한 것처럼 나에게 주어진 모든 기회를 잡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에는 경비행기 조종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물론 아버지가 안 좋아하셨지만.(웃음) 대신 교수가 되자 좋아하셨다.(웃음) 어릴 때 1930년대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들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다. 나도 그들처럼 되고 싶었다. 결국 전문 조종사는 되지 못했지만 비행기 조종사 자격증도 취득했고, 전반적으로 지금의 내 인생에 만족한다.
현재 꿈이 있다면 듣고 싶다.
꿈은 있지만 공개하고 싶지 않다.(웃음) 꿈은 인생을 즐겁고 행복하게 만든다. 늘 꿈을 안고 살아간다.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프랑스와 한국 청년들과 나누고픈 이야기가 있다면?
우선 정말 하고 싶은 바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의 힘이 된다. 그리고 누군가 무엇을 거저 줄 것이라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스스로 해내야 한다.
마지막으로 엘리자베스 샤바놀에게 자유란?
나는 매우 행운아였다. 인생을 통털어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살아왔다. 물론 죽고 사는 것처럼 선택할 수 없는 일들도 있지만 그 외의 부분에서는 정확히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살아왔다. 고고학자로서의 인생에도 만족한다. 그렇게 자유를 누리며 살아왔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점은 이 자유를 얻기 위해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10대 때도 장래에 대한 많은 선택지들을 마련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17살 때 경비행기 조종을 했는데, 지금도 기억하는 것이 경비행기에 처음 도전할 때 매우 두려워했다. 첫 비행 전날에는 잠도 잘 수 없었다. 그러나 스스로를 컨트롤 했고 해낼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에 도전하기에는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만큼 가치가 있었다.
그리고 내 생각에 기회가 생기면 바로 그 기회를 낚아채야 한다. 누구도 오고 싶지 않아 하던 한국에 내가 자원한 것처럼 말이다. 북한에 가기 전에도 무서웠지만 가보니 그냥 사람 사는 곳이었다. 이렇게 두려움을 극복하고 늘 새로운 기회가 왔을 때 도전하는 것이 자유라 생각된다. 나에겐 그것이 자유다.
하고 싶은 공부를 다하고 살아왔다는 이야기는 엄청난 등록금의 압박에 공부를 계속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하는 한국 청년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부러운 이야기다. 프랑스의 학비가 싼 것이 계속 공부를 할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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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및 정리: 정치경영연구소 김경미, 양태성, 조윤경)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들을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들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 분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들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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