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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호랑지빠귀는 왜 남쪽나라로 떠나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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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호랑지빠귀는 왜 남쪽나라로 떠나지 못했을까?

[권오준의 탐조이야기]<4> 홀로 남은 호랑지빠귀

지난 겨울이었다. 어찌나 추웠던지 산새들이 양지바른 곳에 모여들어 햇볕을 쬐고 있었다. 삼한사온이라는 말이 통하지 않을만큼 연일 강추위였다. 추위가 계속되더니 한술 더 떴다. 눈까지 내렸다. 폭설이었다. 그것도 이틀 동안 쉬지 않고. 남한산성이 온통 하얗게 변해버렸다. 등산로만 살짝 덮던 눈은 오후가 되자 국수나무며 찔레나무 덤불을 모조리 뒤덮어버렸다.

산새들이 조잘대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듯 보였다. 매나 말똥가리처럼 사냥을 해서 살아가는 맹금류나 나무를 쪼아 벌레를 잡아먹는 딱따구리에겐 큰 문제가 없겠지만, 다른 산새들은 심각해졌다. 먹이 찾기가 여간 어려워진 게 아니었다. 특히 풀씨를 쪼아먹거나 덤불에 있는 열매 등을 따먹는 작은 산새들에겐 위기였다.

▲ 호랑지빠귀 ⓒ권오준

산성에서 자연보호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먹이를 뿌려주었다. 남문 입구에도, 동문 담장에도 등산로 둘레 곳곳에도 사료를 뿌려놓았다. 먹이를 보자 산새들이 우르르 날아왔다. 박새, 곤줄박이, 동고비처럼 조그만 산새뿐 아니라, 직박구리와 어치, 까치 같이 덩치 큰 새들도 사람이 준 먹이에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몇 포대의 사료를 뿌려주었지만 그것으로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았다. 산새들 숫자가 워낙 많아서인지 먹이는 금방 동나 버렸다. 이튿날이 되자 산새들도 한계치에 다다른 듯 보였다. 특히 작은 새들의 움직임이 둔해 보였다. 뭔가 비장의 카드가 있지 않고선 수습이 안될 듯 보였다.


산성 동문 옆 한 음식점 앞뜰에 고욤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가을이 거쳐 초겨울이 지나갈 때까지도 고욤은 다닥다닥 매달려 있었다. 고욤은 12월이 되니까 까맣게 농익어갔다. 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감은 가을이 되면 새들이 날아와서 모조리 쪼아먹어 초겨울이 되면 으레 하나도 남지 않는다. 그런데 유독 고욤나무 열매는 그대로 있었다. 왜 고욤을 따먹지 않았는지 참 이상한 일이었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날은 더욱 추웠다. 그런데 산새들이 갑자기 고욤나무에 몰려드는 게 아닌가. 여러 종류의 산새들이 한꺼번에 모여든 건 처음이었다. 꼬리가 긴 오목눈이, 숲속의 신사 물까치, 사람 손에도 곧잘 내려앉는 곤줄박이와 박새가 무리지어 날아왔다.

고욤나무를 찾은 건 텃새뿐 아니었다. 시베리아에 살다가 우리나라에서 월동하는 노랑지빠귀며 개똥지빠귀도 고욤나무 소식을 들었는지 무리를 지어 날아왔다. 모두 정신없이 고욤을 쪼아먹었다. 나중엔 청딱따구리도 고욤나무에 날아왔지만, 가느다란 가지에 앉기가 불편해서인지 입맛만 다시다 그냥 되돌아갔다.

저녁이 되자 수천 개의 고욤이 꼭지만 남았다. 산새들은 서서히 발길을 돌리고 있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면서 농익은 고염 수백 개가 바닥에 떨어졌다. 노랑지빠귀와 개똥지빠귀 여러 마리가 바닥에 내려앉아 고욤을 쪼아먹었다. 해질녘까지 산새들은 너도나도 바닥에 떨어진 고욤을 쪼아먹느라 정신없었다.

그 이튿날 아침이었다. 고욤나무 둘레에 전운이 감돌았다. 직박구리가 요란스레 울어대고 있었다. 눈바닥엔 직박구리 몇 마리가 고욤을 쪼아먹고 있었다. 두세 마리는 고욤나무 둘레 참나무와 향나무에 앉아 경계음을 내고 있었다.

▲ 호랑지빠귀의 알 ⓒ권오준

잠시 후 노랑지빠귀와 개똥지빠귀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 순간이었다. 경계를 서던 직박구리가 쏜살같이 내려가 공격을 했다. 노랑지빠귀와 개똥지빠귀들은 몇 차례 더 접근을 시도했지만 어림없었다. 직박구리가 순순히 먹이를 내주지 않았다. 그 어떤 새도 바닥에 떨어진 고욤을 맛볼 수가 없었다. 직박구리 독점이었다.

직박구리가 무지를 지어 맛있게 고욤을 먹고 있는데, 어디선가 호랑지빠귀가 날아왔다. 호랑지빠귀가 날아온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여름철새이기 때문이었다. 이미 남쪽나라에 가 있어야 할 호랑지빠귀가 한겨울, 그것도 강추위와 폭설 속에서 나타나다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최근에 몇몇 여름철새가 남쪽나라로 날아가지 않고 우리나라에서 월동을 하는 사례가 없지 않고, 호랑지빠귀도 월동 사례가 목격되기는 하지만, 산성 호랑지빠귀는 남다른 사연이 있었다.


호랑지빠귀가 직박구리 무리 쪽으로 다가갔다. 고욤을 게걸스럽게 쪼아먹던 직박구리가 호랑지빠귀한테 달려들었다. 자기들 먹이니 어서 가라는 뜻이었다. 호랑지빠귀는 날개를 펴며 대들었다. 다른 직박구리 한 마리가 또 공격을 해왔다. 호랑지빠귀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호랑지빠귀는 당당하게 고욤을 쪼아먹기 시작했다. 그 사나운 직박구리도 더 이상 어쩌지 못했다. 결국 바닥 고욤을 나눠먹기로 한 듯 직박구리가 자리를 내주었다.

가까이 가서 관찰을 해보았다. 그런데 호랑지빠귀가 다리 한쪽을 절고 있는 게 아닌가. 호랑지빠귀는 다리를 다쳐 남쪽나라 가는 걸 포기한 것 같았다. 다리가 부러진 새는 나뭇가지에 앉기 어렵다.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호랑지빠귀는 지렁이를 주로 먹는데, 바닥이 꽁꽁 얼어붙어버린 겨울철이라 지렁이 먹이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나뭇가지에 앉지 못하는 호랑지빠귀에게 높이 매달린 고욤은 그림의 떡이었다. 호랑지빠귀는 바닥에 떨어진 고욤이 마지막 희망이었다. 직박구리의 공격에도 물러서지 않은 이유도 다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기 때문이었다. 호랑지빠귀는 목숨을 걸고 눈바닥 고욤을 먹었던 것이다.

그 뒤로 다리 다친 그 호랑지빠귀를 남한산성에서 보지 못했다. 산성에서 생태 보호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부상당한 호랑지빠귀를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권오준

호랑지빠귀는 참나무 줄기에 둥지를 튼다. 사방이 훤히 보이는 곳에 둥지를 틀어 그런지 알이든, 새끼든 유난히 천적의 공격을 많이 당한다. 재작년에는 호랑지빠귀가 분당 영장산 둥지가 거의 전멸 당하다시피 했다. 묘안을 짜내다가 함석판을 참나무 줄기에 둘러감아주었다. 들고양이 피해라도 막아볼 심산이었다. 다행히 그 둥지 새끼들은 무사히 살아나갈 수 있었다.

'히이 호오-' 하며 다소 으스스한 울음소리를 내는 호랑지빠귀. 올봄 서해를 넘어 우리나라로 날아오는 여름철새들의 중간기착지인 외연도(보령시에서 배로 1시간 30분 거리)에 두 번이나 갔지만 단 한 마리도 보지 못했다. 지난 5월 중순쯤 새끼를 키우고 있는 듯 생태공원 볏짚지붕에 앉아 굼벵이와 지렁이를 부리 가득 물고 사라진 것을 목격한 이후 한 번도 보질 못했다.

해마다 영장산에서만 10여 개씩 눈에 띄는 호랑지빠귀 둥지가 왜 보이지 않는 걸까? 들고양이나 족제비 등 천적의 공격이 계속되어 번식지를 바꾼 걸까? 아니면 기후변화의 영향 때문일까?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덧붙이기: 초겨울까지 산새들은 고욤나무 열매를 일체 건드리지 않다가 1월초 폭설이 계속되자 한꺼번에 날아와서 먹어치웠다. 그것은 혹시 산새들이 고욤나무 열매를 비상식량으로 정해 건드리지 않기로 합의한 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농익은 고욤열매를 12월까지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을까?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동화적인 상상이다.




호랑지빠귀가 새끼 4마리를 키우고 있다. 모두 둥지 떠나기 직전의 영상이다. 한겨울 고욤나무 아래 떨어진 고욤을 먹는 호랑지빠귀의 모습. 직박구리들이 게걸스럽게 고욤을 먹는 모습이다. 직박구리는 호랑지빠귀에게만 자리를 내주었다.






권오준은...


새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며 그를 바탕으로 생태동화를 쓰고 있다. 보리출판사 잡지 <개똥이네 놀이터>에 '둠벙마을 되지빠귀 아이들', '탑마을 언덕의 호랑지빠귀 부부', '용감한 꼬마물떼새, 마노', '홀로 남은 호랑지빠귀', '곡릉천에는 백로가 살아요' 등을 발표했다. 현재 성남 아름방송(ABN)에서 새 생태뉴스를 보도하고 있고, 2010년 5월에는 꼬마물떼새가 멧비둘기를 공격하는 희귀 장면 촬영한 것이 MBC 뉴스데스크에 특종 방영되기도 했다. 우리 새 생태동화 시리즈 중 첫 권인 <둠벙마을 되지빠귀 아이들>이 6월 초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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