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포 번식지는 마치 잘 꾸며놓은 세트장 같았다. 냇가에는 적당한 높이의 잡초가 우거진데다 군데군데 상류에서 흘러내려온 콘크리트 구조물과 바위가 박혀 있어 촬영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어디선가 꼬마물떼새가 특유의 경계음을 울리기 시작한다.
"삑 삑 삑 삑-"
▲ 꼬마물떼새(학명: Charadrius dubius, 영문명: Little Ringed Plover, 몸길이 약 16cm) ⓒ권오준 |
▲ 꼬마물떼새의 알 ⓒ권오준 |
한 마리가 "삑 삑-" 하면 다른 한 마리가 맞은편에서 "삑 삑-"하며 받아친다. 꼬마물떼새 부부의 호흡이 척척 들어맞는다. 그런데 둥지가 안보인다. 녀석들은 자갈밭에 그냥 알을 낳는데, 알의 보호색이 워낙 뛰어나 찾기가 쉽지 않다. 한참 동안 교각 뒤에 숨어 있었더니 그때서야 암컷이 둥지에 들어가 쪼그려 앉는다.
암컷은 그 뜨거운 햇볕을 받아가며 알품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수컷은 20~30미터 떨어진 곳에서 경계를 서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가만히 있다가도 일단 자신들의 영역에 누가 오기라도 하면 난리다. 수컷이 "삑삑삑-" 거리며 달려든다. 암컷도 재빨리 둥지에서 나와 "삑삑삑-"거리며 소리친다.
며칠 뒤 위장막에 들어가 촬영을 하고 있는데 야생 미나리를 캐러 동네사람 서넛이 개울에 왔다. 꼬마물떼새는 사람들이 들이닥치자 목청껏 경계음을 울리기 시작한다. 미나리꾼들이 둥지 가까이 다가오자 이번엔 색다른 작전을 펼친다. 한 마리가 날개를 늘어뜨리고 느릿느릿 도망치는 게 아닌가.
"어어, 저 새 좀 봐. 다쳤나 봐."
▲ 다친 척 하는 꼬마물떼새 ⓒ권오준 |
누군가 한마디 한다. 꼬마물떼새의 작전이 기가 막히게 통한 셈이었다. 꼬마물떼새는 의상행위(擬傷行爲)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친 시늉 하는 자신을 따라오면 사람들은 둥지에서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계산이었다. 미나리꾼들은 신기한 듯 꼬마물떼새를 따라가다가 이내 추격을 포기하고 만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었다. 둥지에서 사람들을 멀찍이 떼어놓는데 성공한 꼬마물떼새는 쏜살같이 반대편으로 날아가 버렸다.
작은 산새들은 대개 열이틀이나 열사흘 정도면 새끼들이 알에서 깨어나는데 비해 꼬마물떼새는 포란기간이 좀 길다. 5월 19일에 새끼 4마리가 부화를 했다. 거꾸로 계산해보면 녀석들은 4월 하순에 알품기를 시작한 셈이다. 포란기간이 25일에 이른다.
꼬마물떼새 새끼들은 그야말로 손가락만하다. 새끼들은 알에서 깨어나자마자 눈도 뜨고 곧바로 돌아다니며 직접 벌레를 잡아먹는다. 새끼들 깃털은 보호색 덕분에 눈에 띄지 않는다.
이튿날이었다. 꼬마물떼새의 경계가 더욱 강화되었다. 포란 때보다 새끼를 지키려는 의지가 더욱 확고해보였다. 까치가 내려앉는 순간 부부가 삑삑거리면서 요란스럽게 울어댄다. 그 사이 어린 새끼들은 풀숲이나 자갈 틈에 잽싸게 몸을 숨겨 위험을 피한다.
아침 8시쯤이었다. 멧비둘기 한 마리가 개울에 날아왔다. 멧비둘기는 하필 꼬마물떼새 부부가 새끼 키우는 곳에 내려앉아 물을 마시려는지 기웃기웃 거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수컷으로 보이는 녀석이 삑삑거리며 종종걸음으로 달려갔다. 곧 자신보다 덩치가 훨씬 큰 멧비둘기 앞에 다가섰다. 일촉즉발의 긴박한 순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러웠다. 유치원생 꼬마가 강호동 선수와 한판 붙어보자고 달려드는 꼴이었다. 서둘러 캠코더 레코딩 버튼을 눌렀다.
'파다다닥-'
어라, 그 작은 녀석이 날개를 활짝 펴 멧비둘기를 공격하는 게 아닌가. 태권도로 치자면 이단옆차기를 한 셈이었다. 멧비둘기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처음엔 '나 물 마시러 왔는데 너 왜 이러냐?'하며 어이없다는 듯 꼬마물떼새를 무시해버렸다.
꼬마물떼새는 자신의 경고가 통하지 않은 것에 몹시 화가 난 듯 보였다. 다시 멧비둘기의 길을 가로막아섰다. 아무리 마음씨 착한 멧비둘기라도 이번엔 더 참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웬걸! 꼬마물떼새의 두 번째 추가공격이 시작되었다.
'파다닥 파다다닥-'
▲ 부화 3일차 꼬마물떼새 새끼 ⓒ권오준 |
이번엔 공중회전 이단옆차기였다. 공격 강도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멧비둘기가 화들짝 놀라 뒷걸음쳤다. 멧비둘기는 예기치 않은 공격에 그만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경고를 무시한 채 개울에 다가가서 물 마셨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멧비둘기는 갈증 해소를 포기한 채 줄행랑을 놓아버렸다.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미처 방송용 카메라를 꺼내지 못했지만, 이 장면은 아쉬운 대로 소형 캠코더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곧바로 MBC 아나운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꼬마물떼새 얘기를 했더니 보도국으로 바로 연결해주었고, 여의도에서 즉시 퀵서비스 오토바이가 달려왔다. 내로라하는 조류학 교수도 혀를 내둘렀던 꼬마물떼새의 멧비둘기 공격 포착 장면은 그렇게 MBC <뉴스데스크>에 특종 보도됐고, 그 꼬마 녀석은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용감한지 당당하게 보여주었다.
그런데 용감한 꼬마물떼새 부부에게 감당하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새끼들은 냇가에서 벌레를 잡아먹으며 활동하다 체온이 떨어지면 어미품에 들어가 몸을 녹이곤 하는데, 비가 와서 쌀쌀해진 날 새끼 한 마리가 사라져버렸다. 자세히 관찰해보니 어미는 작은 날개 품에 세 마리밖에 품어주지 못했던 것이다. 아빠는 반대편에서 망을 보아야 하기 때문에 새끼들을 모두 지켜주는 건 쉽지 않았던 것이다.
며칠 뒤에는 새끼 한 마리가 다리를 절룩거렸다. 아마도 자갈 틈에 다리가 끼어 부러진 것 같았다. 어미는 부상당한 새끼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작은 바위 위에서 새끼에게 올라오라고 신호를 보냈다. 새끼는 넘어지고 뒹굴며 혼신의 힘을 다했다. 어미는 재활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다친 새끼는 안타깝게도 천적을 피하지 못했다. 그 옆에 있던 다른 새끼 한 마리도 함께 천적 눈에 띄어 희생당한 것으로 결론 내렸다.
용감한 꼬마물떼새는 결국 새끼 한 마리만 살려냈다. 장마가 시작된 6월 20일까지 부부와 새끼를 계속 관찰하며 촬영을 했는데, 개울이 넘치자 식구들은 그때서야 다른 곳으로 떠나버렸다. 마음이 텅 비어버렸다.
엊그제 그곳에 사는 생태사진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오포 개울가에서 꼬마물떼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올해는 꼬마물떼새의 알 품기 이전 스토리를 촬영할 계획이다. 또 어떤 사건이 벌어질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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