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어느 한국현대사 연구자가 기자에게 한 말이다. 당시 기자는 뉴라이트의 역사 인식에 관한 기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학자들이 현대사의 주요 주제에 관한 연구 성과를 정리하고, 이를 뉴라이트 쪽 주장과 비교하는 방식이었다. 뉴라이트 쪽 주장이 학계의 연구 성과와 동떨어져 있음을 보여주자는 생각으로 연구자 20여 명을 접촉했다.
그러나 난관에 부딪혔다. 대다수 연구자가 뉴라이트 기피 반응을 보였다. "현대사 공부부터 제대로 하고 오라"는 건 사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여러 연구자에게서 같은 말을 들었다. 학문보다는 정치 공세에 주력하는 뉴라이트가 마치 대등한 연구 성과를 쌓은 것처럼 비칠 수 있다는 우려였다. 뉴라이트 및 그들을 밀어주던 조중동의 도발에 말려드느니 무시하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한편으로는 이들의 심정이 이해됐다. 2004년을 전후해 우후죽순처럼 생긴 뉴라이트 단체들의 역사 공세는 처음부터 학문적인 엄밀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핵심은 제국주의, 분단, 독재로 얼룩진 20세기 한국사의 문제를 근본부터 파헤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을 조명했던 1980년대 이후의 역사학을 뒤집기 위한 이념 공세였다.
조중동이 뉴라이트 성향 인사들의 주장을 심심치 않게 1면에 실어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조선일보>는 해방 50주년이던 1995년 '이승만 살리기' 기획을 대대적으로 진행한 신문이다. '박정희 띄우기'는 <조선일보>뿐만 아니라 <중앙일보>, <동아일보>와도 친화력이 있는 담론이다. 뉴라이트는 '이승만 살리기', '박정희 띄우기'를 소망하던 이들의 돌격대였던 셈이다. 경제 발전의 주역이자 그 과정에서 희생을 감내해야 했던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결과에만 초점을 맞춰 역사를 재구성하고자 한 이들의 선봉대 역할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그간 쌓은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저들의 주장에 담긴 문제점을 차분히 지적하며 끈질기게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논의 지형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바뀔 수 있다는 걱정이었다. 한국을 좌지우지하는 힘센 신문들을 등에 업은 저들이 아닌가.
안타깝게도, 우려는 현실이 됐다. 2013년 한국에선 '5.18 때 북한군 600명이 광주에 침투했다'는 등의 터무니없는 주장이 방송 전파를 타고 나온다. 입에 담기조차 부담스러운 '일베'식 역사 왜곡이 온라인에서 넘쳐나는 사회다. 뉴라이트가 앞장서고 조중동이 그 뒤를 든든히 받쳐준 일련의 역사 공세는 이런 우경화의 주요 배경 중 하나다.
노파심에서 짚고 넘어가면, 우경화를 부른 책임을 역사학자들에게 돌릴 생각은 조금도 없다. 조중동을 배경으로 한 저들의 역사 공세에 대응하는 것은 역사학자들만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듭된 역사 왜곡과 그로 인한 우경화의 위험성에 공감하는 모든 이가 함께 져야 할 짐이다.
허술하지만 치명적인 교학사 교과서, 그리고 일본 극우의 '자학 사관' 논리
▲ 논란이 되고 있는 교학사 교과서. ⓒ교학사 |
이 교과서를 둘러싼 여러 상황에서도 이 점은 잘 드러난다. 뉴라이트의 공세가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교과서 역시 엄밀함과는 거리가 멀다. 솔직히 엄밀함이란 잣대가 민망할 정도다. 인터넷 짜깁기 의혹을 자초한 대목이 여럿임은 물론 기초적인 사항조차 오류투성이임이 드러나지 않았나.
1차 사료를 하나하나 확인하고 문장 하나를 쓰기 위해 그것의 수십 배, 수백 배에 달하는 자료를 보는 것이 역사 연구의 기본이다. 석사 논문 하나를 쓸 때도 그렇게 한다. 정상적으로 생산된 성과라면. 교과서를 쓰신 분들로서 이런 기본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게 낯 뜨거울 수 있겠지만, 분명한 건 자초한 일이라는 점이다.
이처럼 허술하기 짝이 없지만, 더 큰 문제는 치명적인 위험성을 안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 4단체의 검토 결과 등을 종합하면 이 교과서는 이승만과 박정희 친화적으로 역사를 무리하게 재구성하고, 친일파를 민족 자본가로 둔갑시키는 등의 방식으로 일제 강점기에 이뤄진 자본주의적 변화에 초점을 맞췄다.
교학사 교과서 저자들은 기존 교과서가 한국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 어렵게 한다고 주장한다. 뉴라이트가 그간 친일, 분단, 독재에 비판적인 역사학계를 정면 공격해온 것의 연장선상이다. 그러나 20세기 한국사에서 자랑스러운 것은 제국주의 침략과 그에 빌붙은 친일파, 그리고 분단과 독재가 아니라 그것에 맞서 한 걸음씩 문제를 극복해온 바로 그 점이다. 그 문제들을 파고든 것이 '한국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가로막았다'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역사에 대한 '괴담'이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군국주의 침략의 역사를 반성한 전후 일본 역사학에 대해 '자학 사관'이라고 공격한 일본 극우의 논리와 닮았다는 점에서도 '괴담'이다.
친일, 분단, 독재의 문제를 희석시키고 싶어 하는 힘센 세력들이 교학사 교과서를 지원하고 있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올해 상반기에 이 교과서를 만드는 이들의 역사 인식이 논란이 됐을 때 <조선일보>는 "남로당식 사관"이라며 기존 교과서 저자들과 역사학계를 싸잡아 매도했다. 최근 유력 정치인인 김무성 의원은 "좌파와 역사 전쟁" 운운하며 새누리당 의원들을 모아 교학사 교과서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교육부도 교학사 교과서에 대해 단호한 조치를 취하는 대신 기존 교과서 전반을 재검토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해 물타기라는 비판을 자초하고 있다.
교학사 교과서를 두고 "제도권 교육 밖에서 변죽을 울리던 뉴라이트가 권력을 등에 업고 제도권 교육 안으로 들어가려" 한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일본에서는 극우 세력의 후쇼사 교과서가 제도권에 진입한 후 역사 인식 지형 전체가 조금씩 우경화했다. 한국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다.
그런 의미에서 교학사 교과서는 허술하지만 치명적인 '폭탄'이다. 길게 보면 방사능만큼 위험한 이 교과서의 문제에 손 놓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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