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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재벌가의 '혼외 자식' 특종을 놓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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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재벌가의 '혼외 자식' 특종을 놓친 이유

[편집국에서] <조선일보>와 방상훈 사장의 가르침

기자들은 물론 보도 당사자들도 잘 알지 못하는 언론보도에 관한 법률 조항이 하나 있다. 가사소송법 제10조 '보도 금지'에 관한 조항이다.

"가정법원에서 처리 중이거나 처리한 사건에 관하여는 성명·연령·직업 및 용모 등을 볼 때 본인이 누구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정도의 사실이나 사진을 신문, 잡지, 그 밖의 출판물에 게재하거나 방송할 수 없다."

이 조항을 알게 된 계기가 있었다. 2005년께 이니셜의 앞글자만 대도 다 알만한 재벌그룹 가문에 제기된 친자확인 소송 사건을 취재하면서였다. 이야기는 이렇다. 재벌그룹 회장의 아버지에게 '혼외 자식'이 있었고, 이 혼외 자식이 어른이 된 뒤 친자확인 소송을 냈다. 그러니까 소송을 낸 당사자는 재벌그룹 회장의 이복형제였던 것이다. 그를 만났을 때 한 눈에 봐도 '굳이 유전자 검사를 하지 않아도 알겠구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재벌그룹 회장과 닮아 있었다.

소송의 대상이 국내 굴지의 재벌기업이기에 그가 친자로 확인됐을 때 재산 상속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 소송 대상이 화제의 인물이어서 많은 독자들이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질 것이라는 점, 그리고 소송의 당사자가 보도를 원한다는 점 등을 고려해 '이거 기사가 된다'고 봤다. 여기에 더해 기사 제목 앞에 '단독', 혹은 '특종'이라는 머리말도 붙일 수 있겠다는 욕심도 생겼다. 당시 모 여성 월간지 기자와 함께 취재를 했지만, 인터넷신문이었기에 먼저 기사를 낼 수도 있었다. 특히 단순 의혹제기가 아니라 친자확인 소송이라는 '팩트'(사실)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보도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다.

취재를 마친 뒤 데스크에 보고를 하기 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는 변호사에게 보도의 법률적 문제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그 때 전혀 예상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게 바로 가사소송법 제10조 보도 금지에 관한 조항이었다.

"김 기자님. 혹시 가사소송법 제10조 보도 금지 조항 아세요?"
"아니요."

해당 조항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가사소송에 관한 사건들은 대부분 혼인, 이혼, 친자확인, 입양 등 개인의 사생활과 관련된 내용이기 때문에 법률을 통해 사생활의 보호를 엄격하게 강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변호사는 설명을 끝내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도를 할 수는 있습니다. 같은 법 벌칙조항(가사소송법 제72조 '보도 금지 위반죄')에 따르면 '보도 금지 규정을 위반한 사람은 2년 이하의 금고 또는 1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돼 있어요. 이와 같은 벌칙을 감수하면서까지 보도를 해야 할 만 한 공익적 가치가 있는 내용일 때는 보도 할 수 있겠죠. 그런데 그런 가치가 있는 내용인가요?"

내 대답은 "아…, 음…, 글쎄요…"였다.

그리고 데스크에 취재 내용과 변호사 자문 결과를 보고했다. 데스크의 결정은 "킬"이었다. 다소 아쉬웠지만, 한 재벌가의 재산 싸움도 아닌, 어쩌면 불행한 일일 수도 있는 개인사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며 '공익적' 보도라고 주장할 자신이 없었다.

이 사건 이후 개인적으로 '가사소송법 제10조' 트라우마가 생겼다. 각종 연예지와 TV에서 쏟아져 나오는 연예인들의 이혼, 혼외 자식 보도를 보면서 "저거, 저거, 다 걸면 걸릴텐데"라는 생각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소송은 한 건도 이뤄지지 않은 것 같다. 확인한 바에 따르면 가사소송법 제10조에 관한 대법원 판례도 아직까지는 없다. 재벌 혼외 자식 사건을 함께 취재했던 여성지는 기사를 냈지만 아무런 문제제기가 없었던 것 같다.

<조선일보>의 '혼외 자식' 보도가 화제다. 일단 가사소송법 위반은 아닌 것 같다. 이와 관련된 의혹이 친자확인 소송이나 양육비 청구 소송 등으로 가정법원에 제기된 사건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일보>가 보도로 인해 피해를 입을 당사자들을 얼마나 고려했는지는 의문이다.

▲ <조선닷컴> 13일자 첫 화면.

사석에서의 이야기는 되도록이면 기사로 전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지만, 이 시점에서는 조선일보사 방상훈 사장의 '가르침'을 조선일보 데스크에 전하는 것이 공익적 목적에 부합된다 판단해 몇 마디 공개할까 한다.

'장자연 사건'으로 고초를 겪던 방상훈 사장은 올해 초 한국기자협회 간부들과의 만남에서 억울함을 토로하며 이런 말을 했다.

"어느 정도 의혹의 상당성이 있으면 기자가 쓸 수 있다고 봐요. 하지만 쓸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최선을 다 해서 팩트 파인딩을 해야지. 어느 날 초등학생 손자가 '할아버지가 네이버 검색어 1등이야. 그런데 장자연이 누구야?'라고 묻더라고요. 도대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소송을 하려고 알아보는데 변호사들이 그러더라고요. 있는 사실을 없게 할 수는 있지만, 없는 사실을 없다고 하는 건 힘들다는 거예요. 소송 누가 하고 싶어 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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