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서 초급학교까지는 전철을 타고 다닌다. 학교와 제일 가까운 후세라는 역에서 내리면 다른 선을 타고 온 동무들과 다 같이 20분 거리를 학교까지 걷는다. 차가 많이 다니는 길을 피하면서 골목길로 가는데 널찍한 주차장의 철로 만든 대문 앞을 지나가게 된다. 파랗게 칠해놓은 철문은 손가락으로 문지르면 흔적이 남는다. 몇 해 동안 그 길을 지나가면서 아이들이 낙서를 했다. 낙서는 아이들의 이름이나 '소녀시대', '동방신기', '똥', '바보' 등등 하나 둘이 아니었다. 어느 날 우연히 그 길을 지나가시던 선생님께서 낙서를 알아보시고 아이들에게 따져 물으셨다. 아이들은 의논해서 그때 6학년이었던 우리 아들을 비롯한 고학년 학생들만이 졸업한 형과 누나들, 그리고 저학년 동생들의 '죄'까지 도맡아 선생님의 꾸지람을 듣기로 했다. 아이들에게 한 마디씩만 혼내신 다음 선생님 두 분이 고학년 아이들을 앞세우고 철문까지 나가셨다. 선생님도 아이들도 물걸레로 낙서를 지우려고 노력해봤지만 닦아도 문질러도 낙서는 지워지지 않았다. 선생님도 함께 주차장 주인을 찾아가서 사과했다. 주인아주머니는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말아요'하시면서 그냥 웃으셨다고 한다.
ⓒ리명옥 |
그런데 나는 내가 어렸을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고 또 듣기 싫었던 말을 아이들에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희가 한글로 써놓은 낙서를 봐서 주인아주머니도 조선학교 아이들이 한 거겠지 짐작은 하셨을 거야. 그런데도 아이들이니 뭐 그럴 수도 있지 해서 가만히 계셨던 것 같은데 주인아주머니가 그런 분이셨다는 거 솔직히 엄마는 행운이었다고 생각해. 너희들이 밖에서 잘못하면 사람들은 너희만 잘못했다고 생각해주지 않아. '조선인은 역시 못됐다'고 생각하는 거야. 제발 행동 좀 조심해라."
어렸을 때 부모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면 정말 듣기 싫었다. 나나 옆집 일본 아이들이나 똑같이 이곳에서 태어나서 똑같이 이곳에서 자라고 있는데 눈칫밥 먹고 살 생각은 티끌만치도 없었다. 덜 친한 아이들은 싸우면 꼬박 '조선인인 주제에 왜 일본에서 살어? 빨랑 돌아가지 못해?'라는 말을 했었다. 그런 말들을 들어도 하나도 무섭지 않았고 화는 나지만 참 불쌍한 애들이구나 하는 생각조차 들 정도였다.
어느 정도 컸을 때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살인사건이 있었다 치자. 피해자는 우리 할아버지이고 가해자는 옆집 일본 아이의 할아버지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어떻게 세상을 떠나셨는지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말씀하시면서 그래도 옆집 아이한테 죄가 있는 것은 아니니 미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런데 옆집 아이가 나에게 묻는다. "니 할아버지 살인사건으로 돌아가셨다며? 참 안됐다. 근데 그런 죽임을 당하는 이유가 뭔가 있었던 거 아니니?" 나는 놀라고 화가 나고 가슴이 찢어질 듯하지만, 그래도 마음을 다잡고 생각한다. 가해자의 자식과 피해자의 자식 중 어느 쪽이 사람된 도리로 생각했을 때 창피하고 힘들까. 너의 할아버지는 아무런 죄가 없었는데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와 너의 할아버지는 무고한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 중 하나를 감당해야 한다면 어느 쪽이 덜 힘들까? 일본 아이들은 몰라서 그런 거다. 그래도 언젠가 알게 될 것이고 알게 되면 우리가 여기 있는 의미도 알게 되겠고, 앞으로 가해자가 되지 않으려고 하는 노력을 하겠지 하는 희망적인 생각으로 여유로웠던 것이다.
친해지고 싶은 일본사람들에게는 꼬박 내가 우리학교에서 배운 역사와 사실들을 그대로 말할 수 있었다. 서로 알게 되면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거라는 사람들에 대한 믿음을 갖고 줄곧 살아왔다.
유치원에서 고급학교까지 꼬박 민족학교에 다니고 난 뒤 일본의 사립대학에 진학했다. 거기서 꼬박 일본학교만을 다닌 재일동포들과 거의 처음으로 만났고 친해졌다. 나에게는 늘 '리명옥'이라는 이름밖에 없고 이름을 보고 '일본사람 아니네요'라는 말을 들어도 '네~ 재일조선인이에요'하고 거의 건성으로 대답할 수 있을 만큼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다. 그런데 내가 대학에서 처음 만난 친구들은 자신이 재일조선인이라는 것을 외면하거나, 외면하고 싶어하거나 아니면 그 사실을 인정하기 위해 대단한 마음고생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무심코 한 말들 때문에 깊은 상처를 받곤 했다.
"조선사람이니까 우리말 할 수 있는 건 당연한 거 아니니?", "왜 일본식 이름을 쓰니? 니가 당당하지 못하면 일본사회에서 재일조선인 차별은 없어지지 않아." 그 말들을 나와 똑같은 동포에게, 나보다 더 힘들게, 용감하게 살아왔던 친구들에게 했던 나 자신을 떠올리면 지금도 몸서리 치고 싶을 정도로 창피하고 후회된다.
꼬박 조선학교에서 자란 나는 정말 천진난만했다. 일본사회에 대한 인식도 너무 낙관적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역시 아이들을 조선학교에 보내고 있다. 천진난만했으면 좋겠다. 세상을 보는 눈이 삐딱하지 않고 희망적이었으면 좋겠다. 내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배우는 과정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신을 뿌리째 사랑할 방법을 될수록 어릴 때에 알았으면 좋겠다. 그런 바람 때문에 나는 아이들을 조선학교에 보내고 있다.
몇 해 전 일본정부가 고교무상화 제도를 시행하기 직전에 극히 정치적인 이유로 조선고급학교를 그 제도에서 제외하는 결정을 내렸다. 잇따라 오사카에서는 '조선학교 제외 문제'가 텔레비전의 힘을 빌려 잘 나가던 하시모토 당시 오사카부 지사의 안테나에 걸렸다. 늘 하는 수법인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한 이슈 만들기'에 이용되었다. 정말 잘못 걸렸다는 생각에 답답하고 화가 치밀었다.
오사카는 일본에서 재일동포들이 제일 많이 사는 곳이다. 오랜 시간에 걸치는 우리 동포들의 운동과 이 지역에 함께 사는 일본사람들의 지원으로 많지는 않지만, 지자체 단위에서 우리학교에 보조금이 지급되어왔다. 그런데 하시모토 지사가 솔선해서 '이 보조금을 세금으로 꼭 대줘야 하는지 어떤지 심사를 해야겠다'는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텔레비전을 켜면 뉴스쇼같은 프로그램에서도 출연자들이 조선학교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평생 단 한 번도 조선학교는커녕 재일동포나 일본의 과거사나 일본 속의 소수자 문제에 관해서 관심을 가져본 일이 없을 것 같은 연예인들조차 조선학교가 일본에 존재해야 되느냐 마느냐에 대해서 말을 했다. 그런 배타적인 인물이 대표를 지내는 지방정당이 선거 때마다 압승한다. 오늘날에 와서도 안타깝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조선학교문제를 과거사 청산문제로 생각하고, 또 민족적소수자 자녀들에게 보장되어야 할 민족교육을 받을 마땅한 권리에 대한 유린으로 생각하는 일본사람들과 함께 일본정부, 오사카부와 오사카시에 항의하면서 이 긴 시간을 버티고 있다.
지금 고3인 큰딸이 중학교 졸업식 날에 아빠, 엄마한테 편지를 주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빠, 엄마께'로 시작하는 편지 내용을 옮겨본다.
ⓒ리명옥 |
15년을 이 나라에서 살면 '조선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배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이도 알게 되는 것이다. 학부모로서 15년째가 되면 이 땅에서 그 배움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딸이 쓴 편지를 보면 내가 전업주부인 것 같지만 아이 셋을 조선학교에 보내는 가정에 맞벌이가 아닌 집은 없다. 비싼 학비에 기부금을 보태면서 학교에 보내고 있지만 밤낮없고 일요일도 따로 없는 우리 선생님들이 받는 월급은 아르바이트 잘하는 고교생들이 한 달에 버는 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이들이 지내는 곳인데 유리창 한 장 깨져도 바로 고쳐줄 수 없는 핍박한 형편이 오늘 날 우리학교의 모습이다. 어머니회나 아버지회같은 학부모 조직들이 다른 일들을 뒤로 미루고 악착같이 돈을 모아야 한다. 학교가 학교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기부를 해도 다른 일본학교에 기부하는 것처럼 납세할 때 공제되지도 않는다.
조선학교 아이들은 어쩌면 일본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재일동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진심으로 이해해주고 함께 할 수 있는 일본사람이나 남북조국의 동포들을 만날 기회도 많고, 동시에 우익적이고 배타적인 세력의 표적이 될 기회도 많다.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조국의 통일을 희망하고 남북에 다리를 놓을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꿈을 꾼다. 그리고 재특회(재일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모임) 같은 우익 세력의 공격을 받아도 아이들은 겁을 먹든 화를 내든 '조선사람'인 내 신세를 탓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는 이런 부분이 조선학교가 가지는 가장 큰 가치다.
어렵게 자신의 뿌리를 찾고,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는 조선학교에 다니지 않는 숱한 동포 아이들을 위해서도 늘 눈에 보이는 존재인 조선학교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려운 일들이 많지만 조선학교를 포기할 수 없다. 부모들과 동포들 그리고 선생님들의 고민과 걱정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오늘도 천진난만하게 학교에 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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