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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중동 전쟁·독재의 배후, 미국의 국익!"

[박인규의 지구촌 분석] 중동의 폭력이 계속되는 이유유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이 첫 조합원 대상 서비스로 6월 28일 뉴스 큐레이팅 서비스 <주간 프레시안 뷰> 준비호 1호를 냈다. 지난 2일로 준비호 6호를 냈다. <주간 프레시안 뷰>는 정치, 경제, 국제, 생태, 한반도 등 각 분야의 권위 있는 전문가들이 뽑은 뉴스다. 단편적인 정보가 아닌 '흐름으로서의 뉴스', '지식으로서의 뉴스'를 추구한다.

매주 금요일 저녁에 발행되는 조합원에게 무료로 제공되지만, 일반 독자에게는 유료인 콘텐츠다. <주간 프레시안 뷰>를 보고자 하는 독자는 조합원으로 가입하면 된다. 7월 한달 동안 준비 기간을 거쳐 8월부터 본격적인 서비스에 들어갈 예정이다. 내용이 궁금한 독자들을 위해 지난 2일 발행된 <주간 프레시안 뷰>에 실린 글의 일부를 게재한다. <편집자>


지난 7월 29~30일 미국 워싱턴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평화협상이 3년 만에 재개돼 '향후 9개월 내 타결'에 합의하고 협상을 이어가기로 했습니다. 존 케리 국무장관이 취임 이후 4개월 동안 6차례나 중동지역을 방문하며 팔레스타인에 40억 달러의 경제 원조를 약속하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포로 104명을 석방하는 당근을 제시한 끝에 얻어낸 결과입니다.

그러나 중동지역 불안정의 근본원인인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오바마 정부의 이 같은 노력이 성공할 가능성은 지극히 낮습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강경파들은 콧방귀를 뀌고 있고, 팔레스타인 측의 반응도 신통치 않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월 스트리트 저널>의 한 칼럼은 협상 중재에 나선 케리에 대해 "바보가 시킨 심부름을 하는 바보"라고 비꼬았는가 하면, 이스라엘의 한 전직 관리는 "요즘 케리가 하는 짓을 보면 꼭 멍청이 같다"고 비판했다는군요. 또 팔레스타인의 한 전문가는 협상 재개는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마흐무드 압바스 자치정부 수반의 개인적 욕심 때문"이라고 일축했답니다. (☞ 관련 기사 바로 가기 : Will Progress Follow Process in Israel-Palestine?)

중동지역의 실상을 제대로 알려면 워싱턴의 협상장이 아니라 현장의 상황을 주시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7월 30일 밤 수십 명의 탈레반 무장세력이 파키스탄 북서부 데라 이스마일 칸에 있는 교도소를 습격해 재소자 300명을 탈출시켰습니다. 이 중에는 알카에다 간부 등 요주의 인물 24명도 있습니다. 지난 21일에는 미군의 포로 학대로 유명해진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교도소가 습격당해 재소자 500여 명이 탈출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라크 군경 120명이 사망했다죠. 지난 2011년에도 아프가니스탄 남서부 칸다하르 교도소에서 수감자 500명이 탈출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실상 전쟁 상태라고 해야 합니다.

미국은 오바마 정부 출범 이후 분쟁 지역에 대한 미 지상군 투입을 자제하는 이른바 '게이츠 독트린'에 따라 무인기(드론)에 의한 암살 작전을 애용하고 있는데, 이게 오히려 무장 세력의 도발을 확대 강화시키고 있다는 비판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미국이 '전쟁 종료'를 선언한 이라크도 사정이 안 좋기는 마찬가집니다. 7월 29일 이라크 내무부는 이라크가 사실상 종파 간 내전 상황에 돌입했다고 인정하면서 반군을 돕는 자는 엄벌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미국의 침략 덕택에 정권을 장악한 시아파에 대한 수니파 무장 세력의 테러가 급증하고 있다는 겁니다.

▲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라도 군부의 동의 없는 '독재'를 하면, 여론을 빌미로 군부가 대통령을 축줄할 수 있는 것일까? 이집트가 '종교 독재'를 펼친 대통령 지지 세력과 이를 반대하는 세력이 대립하며 내전에 빠져들 우려가 커지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10월 당시 무르시 대통령과 지난 3일 그를 축출한 군부의 실세 알시시 장군. ⓒAP=연합뉴스

이집트의 상황은 더욱 비극적입니다. 주말인 7월 27일 군부쿠데타로 실각한 무르시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시위대에 대해 군부가 무차별 발포로 대응, 80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했습니다. 한 병원에서는 두 달 치 의약품을 이틀에 다 쓸 정도였다는군요. 게다가 무바라크 정권 시절 악명 높았던 공안 경찰이 부활하고, 무르시의 세력기반인 무슬림형제단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작전에 돌입했습니다. 이집트 역사상 최초로 민주적인 선거로 선출된 무르시 정권을 분쇄하려는 야만적 탄압에 대해, 3년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아랍의 봄'이 '피의 여름'으로 바뀌었다는 탄식이 나오고 있습니다.

왜 중동지역은 전쟁과 독재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을까요? 이집트의 사례를 통해 알아봅시다. 지난해 이집트 대선에서 결선에 오른 후보는 무슬림형제단의 무르시와 무바라크 정권에서 총리를 지낸 샤피크였습니다. 즉 이슬람세력과 군부세력의 대표였습니다. 시민을 대표한 세력은 없었습니다. 무바라크의 30년 독재를 종식한 2011년 시민혁명의 주역은 근본적 변화를 갈망하는 젊은 세대와 세속적 자유주의 세력이었지만 이들에겐 조직화한 정치세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집트를 비롯한 중동지역에 자유와 인권과 민주를 지향하는 근대적 정치세력이 형성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으나 가장 큰 원인은 2세기에 걸친 영국과 미국 등 서방측의 간섭과 통제 탓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미국의 독립언론인 로버트 드레퓌스가 지난 2005년 발표한 <악마의 게임: 미국은 어떻게 이슬람 원리주의의 발흥을 도왔나(Devil's Game: How the United States Helped Unleash Fundamentalist Islam)>라는 책이 그 과정을 소상히 밝혀줍니다.

중동지역이 오스만터키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난 것은 1차 세계대전 이후입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란 영화에서 아랍 부족들이 영국 장교 T. E. 로렌스와 함께 독일, 터키 등과 싸우는 과정을 그리고 있죠. 하지만 전쟁 후 영국은 중동지역에 사회주의나 민족주의 등이 득세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슬람주의 세력과 손을 잡습니다. 아랍 부족 중 가장 봉건적이고 잔인하다는 이븐 사우드 가문이 아라비아 반도를 차지해 사우디아라비아를 건국하는 데도 영국의 도움이 컸다고 합니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무슬림형제단도 영국의 재정적 도움으로 창설되고 유지됐습니다. 1928년 영국 통치 하의 이집트에서 창립된 무슬림형제단은 이후 벌어지고 있는 '이슬람 원리주의' 또는 '정치적 이슬람' 운동의 원조 격인 단체입니다.(2006년 민주적 선거를 통해 가자지역을 통치하고 있는 하마스는 무슬림형제단의 팔레스타인 지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슬림형제단의 창립 자금은 영국의 '수에즈운하 회사'가 대준 것입니다. 이후 영국은 자신의 통치 지역에서 사회주의 또는 민족주의 세력을 억압하고 제거하는 데 무슬림형제단을 비롯한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을 활용합니다.

그리고 이 전통은 미국으로 이어집니다. 영국과 미국은 또한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등의 석유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이들 봉건왕조와 동맹관계를 맺습니다. 예컨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5년 2월 얄타에서 스탈린, 처칠과 비밀회담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사우디 국왕을 만나 사우디가 서방 측에 대한 안정적 석유 공급을 보장하는 대가로 미국은 사우디 왕조를 보호해 줄 것을 약속합니다. 지난 2001년 9‧11사태가 일어난 직후, 미국의 안보 및 자원 전문가인 마이클 클레어 교수가 비극의 시작은 바로 이 루즈벨트와 사우디 국왕의 만남이었다고 지적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테러범 19명 중 17명이 사우디 국적이었는데도 미국이 적극적 조치를 하지 못한 것은 그놈의 석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950년대 중동지역에 거대한 민족주의의 바람이 일어납니다. 1953년 이란에서는 모사데그 총리가 취임하면서 왕정을 폐지하고 석유산업을 국유화합니다. 1954년 이집트에서는 청년 장교 나세르가 집권합니다. 이들의 민족주의에 대항한 세력이 바로 이슬람 원리주의이고 미국과 영국은 이를 이용합니다. 예를 들어 이집트에서는 군사혁명 직후인 1954년 10월 26일, 무슬림형제단 단원이 나세르 암살을 시도했고(8발을 발사했는데 실패), 이란에서는 1953년 미 CIA가 주도한 반(反) 모사데그 시위에 이슬람세력이 참여합니다. 모사데그 축출 작전은 결국 성공했는데, 이때 이슬람세력의 주도적 인물이 아야톨라 카샤니라는 인물로 이 사람은 훗날 이란에서 미국을 몰아내고 중동 최초의 이슬람 신정국가 설립을 주도한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스승입니다. 1953년 젊은 성직자였던 호메이니도 모사데그 축출 운동에 참여했다는군요. 결과적으로 보면 미국이 호메이니를 키운 셈입니다.

<악마의 게임> 저자인 드레퓌스는 이 책에서 '지난 반세기를 돌아보면 미국이 1950년대 이집트와 이란에서 일어난 민족주의를 포용하지 못한 것은 커다란 비극, 또는 실패'였다고 지적합니다. 나세르의 경우 '아랍세계의 케네디'라고 불릴 만큼 아랍 민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고, 케네디 자신도 나세르에게 개인적 호감을 느꼈으나 나세르를 소련의 동맹세력으로 판단한 미국 정부가 결국 나세르를 끌어안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나세르의 뒤를 이어 이집트 대통령이 된 안와르 사다트는 무슬림형제단 출신으로 사우디의 권고를 받아들여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캠프데이비드협정)을 맺었으나 결국 무슬림형제단에 의해 암살됩니다.

결국 이집트를 비롯한 중동지역에서 근대적 민주정치가 발달하지 못한 데는 민족주의나 사회주의 등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세력이 생겨나고 발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슬람세력을 지원하고 활용한 영미 등 서방 측의 책임이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 이집트에 군부와 이슬람을 대표하는 정치세력만 있을 뿐 국민 대다수의 열망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이 형성되지 못한 것입니다. 나아가 오늘날 알카에다, 탈레반 등 이슬람 무장 세력들이 활개를 치게 된 것도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점령 이후 1980년대 내내 미 CIA가 이슬람 전사들에게 엄청난 자금과 군사물자 등을 제공하면서 이들의 반소 투쟁을 전폭 지원한 후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은 이번 이집트 사태와 관련, 쿠데타를 쿠데타라 말하지 못하는 묘한 처지에 빠져 있습니다. 로이터통신 보도에 따르면 익명의 미국 관리가 "이집트 사태를 쿠데타라고 규정하는 것은 미국의 국익에 반한다"고 말했답니다. 그 이유는 쿠데타로 규정할 경우 미국 법에 따라 이집트에 대한 연간 15억 달러의 원조를 중단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중동지역에서 사우디 다음으로 중요한 우방국인 이집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란과 시리아 등 적대국에 대해서는 민주와 인권을 설파하면서도 사우디와 이집트 등 친미국가들의 독재와 인권 유린에 대해서는 애써 눈을 감는 미국의 이중잣대 또는 위선이 계속되는 한, 중동의 폭력과 독재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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