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대선 정국을 뒤흔든 '안풍(安風)'의 주역이었던 안철수 무소속 후보(서울 노원병)가 24일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무난한 승리였다. 거대 여당의 조직적인 지원을 받은 새누리당 허준영 후보를 '혈혈단신 무소속'의 신분으로 꺾었다. 이를 두고 안 당선인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고 표현했지만, 그를 '다윗'으로 보는 정치권 인사는 아무도 없다.
한 때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을 넘어서는 유력 대선주자였던 그의 낙승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때문에 그가 야권에게 비교적 유리한 서울 노원병에 출마한 것을 두고서도 "노원병이 가시밭길이냐"는 비판도 거셌었다.
문제는 여의도 입성 '이후'다. 독자 세력화부터 신당 창당까지, 숱한 과제가 그의 '새 정치' 앞에 놓여있다. '안철수 식 정치'의 1막은 다소 모호했던 새 정치 의제와 대선 후보직 사퇴로 실패로 끝났지만, 이제 '안철수 국회의원'이 된 이상 그는 한 때 자신에게 반사이익을 가져다준 기성 정치권의 한복판으로 들어가 정치인생의 2막을 시작하게 됐다.
▲ 서울 노원병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안철수 후보가 24일 밤 선거 사무실에서 개표 결과를 지켜보고 있다. ⓒ뉴시스 |
'서생' 안철수, 구름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다?
"정치는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을 함께 갖춰야 한다." 안 당선인의 재보선 출마로 정치권에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이 어록을 인용하는 인사들이 부쩍 많아졌다. 문희상 민주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 박지원 전 원내대표가 일제히 이 말을 인용해 안 당선인을 비판했다. 그가 "서생적 문제의식만 있을 뿐 상인적 현실감각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안 당선인 입장에서야 닳고 닳은 기성 정치인들의 '훈수'로 들리겠지만, 그 스스로 일정 부분 이런 비판을 자초하기도 했다.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둘러싸고 여야의 교착 상태가 계속되자 "대승적으로 한쪽 안을 받아 1년간 실행하고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면 재개정하자"는 다소 '낭만적인' 의견을 내놔 빈축을 사기도 했다.
사실 애매모호하고 두루뭉술한 화법은 늘 안 당선인을 따라다니는 비판 중 하나였다. '새 정치'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그래서 안철수 식 새 정치가 대체 무엇이냐"는 질문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정치권 인사들 사이에선 "정계 3대 미스터리는 박근혜의 창조경제와 안철수의 새 정치, 김정은의 생각"이란 우스갯소리도 떠돌았다.
이리 재고 저리 재느라 '간철수'라는 별명까지 얻은 그였지만, 노원병에 출사표를 던진 후 그의 행보는 과거에 비해 분명 더 거침없고, 단호했다.
일단 '정치'에 대한 입장이 사뭇 달라졌다. 귀국 일성으로 영화 <링컨>을 언급하면서 "정치란 어떤 결과를 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링컨이 어떻게 여야를 잘 설득해 일을 완수해 내는가"를 유의 깊게 봤다고 했다.
지금의 안철수를 있게 한 것은 상당 부분 기성 정치권에 대한 유권자의 실망 내지 혐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정치 혐오가 '안철수 현상'으로 표출됐고, 안 당선인 자신도 이런 반사이익을 극복하지 못했다. 국회의원 정수 축소 등 설익은 정치개혁안을 내놓으며 오히려 대중의 정치 혐오에 기대는 모습도 보였다. 그런 그가 '해결의 정치'를 언급하며 갈등 조정을 정치의 본령으로 인정했다. 과거의 정치 혐오는 오간데 없었다.
자세도 한껏 낮췄다. 대선 후보 시절 내놓은 정치개혁안에 대해 "예전의 이야기를 스스로 점검해서 그 때 생각이 짧았던 부분은 솔직히 말씀 드리겠다"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고 했다.
기자들과 만나선 "텅 빈 운동장에 (주민) 한 분이 계시면 그 분이 가버리기 전에 전속력으로 달리기를 해 만난다. 어떤 경우는 (지역 주민 이야기를) 10분 동안 들은 적도 있다"고 선거운동 과정을 소개했다. "이게 진짜구나 싶다"며 "대선 때와는 차이를 많이 느낀다. (그 때는) 공중에 붕 떠 있었던 것 같다"고도 털어놨다.
숱한 지역구 국회의원들에게 주민 이야기를 10분 경청하는 것은 대단한 일도 아니지만, 이런 자신의 경험을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안 후보의 표정은 공부의 즐거움을 처음 알게 된 학생마냥 상기돼 있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붕 떠 있던" 안 당선인에게 이번 선거 과정은 '상인의 현실감각'을 갖춰가는 과정처럼 보였다.
여의도에 상륙한 '안철수 바람', 미풍 되지 않으려면…
선거 과정도 과거에 비해 거침없었다. 지난 대선에서 '조직'의 쓴 맛을 본 그였기에, 어느 정당에도 빚지지 않는 독자 행보를 보였다. '공학적 단일화'라며 야권 단일화에 선을 그었고, 내심 기다리고 있던 민주당에 지원 요청도 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민주당 일각에선 "신당 창당을 염두에 둔 행보"라는 뒷말이 나왔지만, 결과는 안 당선인의 독자적인 승리다.
문제는 이후다. 그의 국회 입성이 야권 정계 개편의 신호탄이 될 것이란 전망이 많지만, 이제 '300명의 배지 중 1명'이 되어버린 이상 국회에 불어올 '안풍'이 찻잔 속의 태풍으로 그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새 정치를 모토로 내세운 그가 향후 어떤 형태로든 정치 개혁의 목소리를 높이겠지만, 송호창 의원과 단 두 명 만으로는 신당을 창당하더라도 한계가 분명하다. 여의도 밖에선 쉽게 '새 정치'를 주장할 수 있지만, 내부에서도 파괴력이 여전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이를 안 당선인 본인도 모르지 않는 듯하다. 그는 정계 개편 가능성을 묻는 기자들을 질문에 "일단은 살아남는 게 목표"라고 했다. 체급이 대선주자에서 '300분의 1'로 격하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력없이 '바람'만으론 정치 개혁을 이룰 수 없다는 현실을 지난 대선 과정에서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선택은 '정면 승부'를 통한 여의도 입성이었다.
벌써부터 견제도 만만치 않다. 문희상 비대위원장을 비롯해 민주당의 차기 당권주자들까지 한 목소리로 신당 창당을 비토하고 있다. 문 위원장은 "안 후보는 아직 서생"이라며 "큰 꿈을 키우려면 '결국 300명 중 하나로구나' 하고 깨달아야 한다"고 훈수를 뒀고, 박지원 전 원내대표와 유력 당권주자인 김한길 의원도 각각 "신당을 창당하면 제2의 문국현이 될 것", "창당은 새누리당만 반길 일"이라고 경고했다.
이런 견제는 물론 민주당의 불안감 때문이다. 각종 여론조사의 지표상으로도 '안철수 신당'이 민주당의 지지율을 뛰어넘는 상황에서, 안 당선인의 세력화가 이뤄질 경우 가뜩이나 사분오열된 당의 분열이 불 보듯 뻔한 탓이다.
이런 상황에서 안 당선인도 당장 신당을 만들어 정치권에 풍파를 일으킬 생각은 없어 보인다. 일단 내달 4일에 치러질 민주당 전당대회를 지켜본 뒤, 새 지도부 선출 뒤에도 민주당의 내분이 계속된다면 자연스럽게 독자 세력화에 탄력이 붙을 것이란 전망이 많다. 정치권에선 안철수 신당이 현실화된다면 그 시점이 10여 곳의 국회의원 선거가 예상되는 10월 재보선과 내년 6월 지방선거가 1차 분수령이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그러나 그 때까지 '안철수 현상'이 계속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한 야권 관계자는 "10월까지 '의원 안철수'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느냐. 기껏해야 국회 지리 정도나 익히고 입법 과정이나 공부하는 것"이라고 깎아내렸다. 박한 평가지만, 현실적으로 다음 총선을 3년 남짓 남겨둔 상황에서 섣불리 신당으로 이탈할 민주당 의원이 얼마나 있겠냐는 지적이다.
결국 안 당선인이 곧바로 신당을 창당하지 않더라도, 그와 민주당의 '야권 지지층 쟁탈전'은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안 당선인이 민주당 입당에 선을 그은 이상, 그로서는 야권에서 민주당이 누려온 독점적인 지위에 균열을 내는 것이 부여된 숙제일 수밖에 없다. '야권 분열의 주범'이란 혐의를 뒤집어쓰지 않으면서 정치권에 새 정치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을지, '정치인 안철수'의 1차 시험대도 막이 올랐다. 안철수 본인도 말하듯 '여의도 입성'은 그의 정치 여정의 시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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