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들의 대학행이 꼬리를 물고 있다. 지난 3월 초에 박희태 전 국회의장의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의 석좌교수 임용으로 시끄럽더니,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로, 나경원 전 새누리당 의원이 서울대 행정대학원 초빙교수로 대학 강단에 섰다. 아마 이런 행태는 세 대학으로 그치지 않고 도미노처럼 퍼질 것이다. 이 상황에서 정치인의 잇따른 대학행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우선 그 중의 한 명인 오세훈 전 시장의 경우를 보자. 한양대는 지난 6일에 오세훈 전 서울시장을 임용하여 1년간 1주일에 한 차례씩 <고급도시행정 세미나> 수업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공공정책대학원은 올바르고 유능한 행정인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하여 관련 이론과 실무를 연구하는 특수대학원이다. 이에 비춰볼 때 행정경험이 풍부한, 그것도 대한민국의 수도이자 인구 1천만이 넘는 국제 도시의 행정을 맡은 전임 시장을 교수로 임용하는 것은 표면상으로는 바람직하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행정경험이 많고 높은 자리에 있었다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교수로서 능력과 자질, 인격을 갖추었느냐는 점과 아울러 학생들이 그로부터 배울 만한 것이 있느냐는 점이다.
오세훈 전 시장은 유능한 변호사로서 <오 변호사 배 변호사>, <그것이 알고 싶다> 등을 진행한 유명 방송인, 시민단체 활동가로 활동하다가 정치에 입문하여 제16대 국회의원과 제33·34대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한 행정가다. 서울 시장 재임 중 그가 가장 총력을 기울여 추진한 것이 용산 재개발사업과 이를 연계한 한강 르네상스 사업인데, 총사업비 31조 원에 달하는 용산재개발 사업은 이미 디폴트(채무불이행)로 귀결되었다. 이 사업은 도덕적으로만이 아니라 행정적, 경제적으로도 실패한 사업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것만이 아니다. 겉치레라 할 동대문디자인 플라자에 4200억 원, 디자인 거리 조성에 1940억 원, 홍보비로 1500억 원을 투여하면서도, 700억 원이 아깝다고 무상급식을 극도로 반대하여 이에 대한 주민투표를 강행하고 이것이 무산되자 2011년 8월 24일에 시장직에서 사퇴하였으며, 상대적으로 수해방지에는 돈을 아껴 우면산 산사태가 나고 18명이 죽은 것에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이런 여러 사유로 대다수 국민은 그를 '개발 위주의 구태를 반복하다 실패한 행정가', '사람보다 겉치레 사업에 더 골몰하여 적지 않은 사람이 죽은 데 책임이 있는 시장'으로 기억한다. 과연 개발을 성찰하는 21세기에 개발 위주의 행정을 펴다 실패한 이로부터 수강생들이 배울 것이 무엇인지 의문이다.
다른 두 사람도 오 전 시장과 오십보백보다. 박희태 전 국회의장은 2008년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돈 봉투를 살포한 혐의로 기소돼 유죄를 선고받은 인물이다. 법을 위반한 사람이 학생들에게 법을 가르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나경원 전 의원은 중학교 1곳, 고등학교 2곳을 운영 중인 사학재단 홍신학원 나채성 이사장(73)의 딸로 사립학교법 개정 시 이의 반대를 주도한 인물이다. 지금 대다수의 사립대학에서 자유롭게 학문을 탐구하고 이를 올바로 전승하는 데 가장 큰 장애는 재단의 전횡과 비리이다. 대학이 학문의 전당으로 자리잡는 데 가장 큰 장애였던 사람이 한국 최고의 대학에서 과연 어떤 진리를 가르칠 수 있는 지 의문이다.
혹자는 이를 진영의 논리라거나 오 전시장과 나 전 의원은 범법행위를 한 것도 아닌데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을 펼 수 있다. 하지만, 필자는 어느 개인을 나무라거나 특정 대학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비판의 초점은 한국 대학 전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학정신의 위기와 권력유착이다. 대학은 '진리욕구의 실천 도량이자 진리 탐구의 전당', '국가와 사회의 건전한 발전을 이끄는 지식과 진리의 생산과 소통과 전승의 장', '양심과 비판지성의 보루'이다. 이 때문에 중세시대에 왕도 이곳을 함부로 넘보지 못하였으며, 시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노래하였다.
하지만, 지금 한국 대학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시장에 포섭되었다. 진리는 교환가치로 대체되고, 지성은 효율성 앞에 무너져 내렸다. 대학당국이 가장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백년지대계로서 교육이 아니라 취업률, 교수의 연구업적과 같은 계량적 수치다. 이것이 곧바로 대학평가의 서열과 정부의 지원과 기부금, 입학생의 점수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진리를 탐구하기보다 스펙을 쌓고 취업준비를 하는 데 더 몰두한다. 교수들은 "논문 쓰느라고 공부를 하지 못한다."라는 말이 대학가에 유행할 정도로 논문 수를 늘리는 데만 골몰한다. 대학당국은 대학평가의 점수를 높이고, 정부의 재정지원금과 학교발전기금을 늘리는 데만 혈안이 되어있다.
이 상황에서 정부와 대학의 유착관계는 더욱 공고해졌다. 연구비를 포함하면, 사학에 대한 정부의 재정지원금은 대학 전체 재정의 거의 절반에 이른다. 한마디로 말하여 교과부와 대학당국은 갑과 을의 관계다. 대학의 자율성은 형해만 남았다. 교과부가 부당한 명령을 대학에 강요하더라도 이를 재정지원과 연계하기만 하면 대학은 교과부의 명령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교과부의 일개 인사가 지방 대학에 특혜를 주고 이를 빌미로 그 대학의 교수나 총장으로 가는 일도 여러 차례 있을 정도로 유착관계는 공고하다. 재단의 비리가 있는 대학은 말 그대로 약점을 잡힌 것이기에 권력과 언론에 더욱 취약하다. 이런 구조적 요인 속에서 세 사람의 정치인, 그것도 여당에 한정된 인사만이 대학교수로 임용되었다. 반면에 정부에 비판적인 인사에 대해서 대학은 가혹하다. 한 예로, 서울대 김세균 교수가 단지 희망버스를 탔다는 이유로 15년 이상 재직하면 거의 자동으로 추대되는 명예교수 심의에서 배제되었다. 누가 보아도 교육적인 고려보다 권력과 끈을 맺으려는 욕구가 우선이었을 것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한없이 쓸쓸해진다. 이제 '진리욕구의 실천 도량'으로서 대학정신은 정녕 죽은 것인가. 신자유주의의 유령이 교정을 배회하고, 대학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돈과 계량적 수치의 경배자가 되었다. 밤을 새워 진리를 탐구하고 올곧은 목소리로 비판적 지성의 구실을 하고 온 열정과 사랑을 다하여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 세상을 온통 뒤집을 정도로 지적 호기심을 가지고 진리를 배우고 질문을 던지는 학생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권력과 '창조적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권력을 비판하고 감시하던 시대의 양심으로서 대학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대학은 그 사회의 미래다. 미국과 유럽의 흥망은 대학의 흥망과 정확히 비례한다. 대학이 사망하면 그 사회 또한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 대학에서 생산된 진리가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사람들의 삶에 새로운 지식과 상상력과 가치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새내기부터 취업에만 골몰하는 기업연수생이 어찌 창조적인 상상과 혁신을 하고 타인과 협력하는 공동체의 일원이 될 것인가. 논문 편수를 늘리는 데만 혈안이 된 지식기사, 혹은 취업중개인으로 전락한 자가 어찌 진리를 생산하고 허위와 부조리를 비판하며 학생들을 사랑으로 가르치겠는가. 권력에 휘둘리고 대학평가에 발목을 잡힌 대학이 어떻게 학문의 전당으로 남을 수 있겠는가.
이제 우리 모두 나서서 대학을 시장에 포섭시키고 기업연수원으로 전락시키며 학생을 창조력과 상상력, 인간성과 공동체의 윤리를 상실한 단순한 반복기사로 만드는 신자유주의 정책과 사고를 폐기하자. 정권은 재정지원을 빌미로 대학을 통제하는 구태를 중지하고 대학에 자율성을 부여해야 한다. 대학평가는 폐지하거나 대학의 진정한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방향으로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사학재단의 전횡과 비리를 견제하고 감시할 수 있도록 사학법을 개정하고, 교평과 같은 기구에 심의권만이 아니라 의결권도 주어야 한다. 대학당국도 마찬가지다. 대학이 수행해야 할 이념과 목표는 진리의 창달, 창의성 신장, 인간성 도야, 사회정의의 기여이지 상업적 이익이 아니다. 법인과 재단은 돈벌이의 유혹에서 떠나 학생들을 창조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하는 주체로, 타인과 상생하는 참다운 인간으로 길러내는 데 주력하자. 더 늦기 전에, 모두가 나서서 처절하게 성찰하고 근본적으로 혁신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없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