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지방선거부터 줄곧 유지돼온 '야권 단일화' 공식도 깨졌다. 이번 선거를 사실상 '독자 선거'로 꾸려가려는 안철수 후보(무소속) 쪽에서 먼저 단일화 선 긋기에 나섰고, "작은 정당이란 이유로 숱하게 양보해온" 진보정당 후보들도 이렇게 된 이상 단일화에 나설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결과적으로 야권으로선 투표율이 관건일 수밖에 없는 상황. 후보들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4·24 재보궐선거의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11일, 네 명의 후보들은 각각 '바닥 민심 훑기'에 주력하는 모습이었다.
▲ (왼쪽부터) 새누리당 허준영, 통합진보당 정태흥, 진보정의당 김지선, 무소속 안철수 후보. ⓒ뉴시스 |
■ '새 정치' 첫 발 내딘 안철수, 숙제는 투표율!
"국민이 새 정치를 선택해야 정치가 바뀌고, 여러분의 삶이 바뀝니다."
이날 낮 12시 서울 노원구 상계동 롯데백화점 앞. 작은 유세차량 위에 마련된 연단에 오른 안철수 후보는 상기된 표정이었다. 넉 달 전 대선 후보로 이른바 '중앙 무대'에서 뛰었지만, '예비 후보'에만 머물렀던 그에게 선거운동 출정식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한 달간 늘 입고 다니던 남색 점퍼 대신 파란색 선거 운동복을 입었다. "기호 5번 안철수입니다"라는 인사로 말문을 연 그는 "4월 24일이 어떤 날인지 아십니까? 노원이 대한민국의 중심에 서는 날이고, 새 정치의 중심이 상계동이 되는 날"이라며 유권자의 지지를 호소했다.
4월 중순에 접어들었는데도 눈발까지 날리는 쌀쌀한 날씨였지만, 지지자들의 환호도 뜨거웠다. 우산을 쓰거나 비를 맞으며 유세를 지켜보는 사람들 중엔 "신기하다"며 스마트폰을 꺼내든 젊은층이 눈에 띄었다. 유세를 지켜보던 대학생 박모(23) 씨는 "평소 안철수 후보를 좋아해 왔고, 대선 때도 지지했었는데 사퇴해서 안타까웠다"며 "우리 동네에 큰 정치인이 와서 기대가 된다. 안 후보를 뽑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 후보의 감회도 남다른 듯 했다. 그는 마들역에서 첫 선거운동을 마친 소감으로 "새롭다. 제가 본격 유세는 처음이지 않나"고 했다. 또 "한 달 전 처음 인사드리기 시작했을 때 반응은 '신기하다'였는데, 한 달 동안 발로 걸어다니면서 주민들을 만났더니 지금은 '반갑다'로 반응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 안철수 무소속 후보가 11일 노원역 앞에서 출정식을 마친 뒤 지지자와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연합뉴스 |
지지율에선 가장 앞서고 있지만, 안심하기 힘든 상황이다. 야권 후보가 3명 나선 가운데 관건은 투표율. 지지율 격차를 오차범위 이내까지 따라잡으며 추격하는 허준영 후보에게 새누리당의 든든한 조직표가 있는 점을 감안할 때, 가뜩이나 낮은 보궐선거의 투표율을 끌어올리는 게 안 후보로선 시급한 과제다.
캠프 관계자는 "2011년 분당을 보궐선거에선 강남 쪽 출퇴근 인파가 많아 직장인들의 퇴근길 투표율이 높았지만, 노원은 동부간선도로의 교통 체증 때문에 그 때 만큼의 저녁 투표율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사전투표제에 기대를 걸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재보선부터 도입되는 사전투표제는 유권자들이 부재자 신고를 하지 않고도 미리 투표할 수 있는 제도로, 주말인 19~20일 양일간 진행된다.
캠프 차원에서도 적극 홍보하고 있다. 안 후보가 착용한 어깨띠엔 '19일(금)·20일(토) 먼저 투표하세요'라는 문구를 넣었다. 통상 재보선 투표율은 35% 안팎으로, 20~40대 직장인이 주된 지지층인 안 후보 쪽에선 투표율이 선거 승패를 가를 주요한 변수다.
안 후보는 지역 현안으로 교육·복지·주거·일자리 4가지를 꼽으며 "노원병 출마는 제게 운명인 것 같다"고 말했다. 유세는 차량을 통한 '확성기 식 선거'보다, 유권자들과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형식의 '토크 유세'에 주력한다는 계획이다.
■ '지역 일꾼론' 내건 허준영, 새누리당도 '화력 집중'
다른 후보들이 지지자들과 함께 대대적인 출정식을 연 반면, '지역 일꾼론'을 내세운 새누리당 허준영 후보는 별도의 출정식 없이 환경미화원들과 거리 청소를 하는 것으로 공식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빨간 점퍼 차림의 허 후보는 "국민들은 정치판에 신경 쓸 겨를없이 바쁘다"며 "무엇인지도 모르는 새 정치에 사람들이 실망하기 때문에 노원병을 맡길 수 없다"고 안철수 후보를 겨냥했다. 주민들에겐 "지역에 봉사하러 온 자수성가형 일꾼"이라고 자신을 소개했고, 오후엔 가족과 함께 급식 봉사에 나서기도 했다.
▲ 새누리당 허준영 후보는 별도의 출정식 없이 시립수락양로원을 방문해 가족들과 자장면 배식 봉사활동을 했다. ⓒ뉴시스 |
새누리당의 총력 지원을 받고 있는 허 후보는 '힘 있는 여당 후보'를 내세우며 바람몰이를 하겠다는 계획이다. 출정식은 열지 않았지만, 황우여 대표가 상계동 중앙시장을 직접 찾는 등 세몰이에 나서고 있다.
당 차원의 고공전도 치열하다. 공식 선거운동 시작과 함께 당 지도부는 안 후보를 '철새 정치인'으로 비판하는 등 맹공을 퍼부었다. "노원병 선거는 철새와 지역 일꾼의 싸움"(정우택 최고위원), "유권자는 성실한 일꾼을 원하지 '정치공학도'를 원하지 않을 것"(이상일 대변인) 등 '안철수 공격'에 화력을 집중하고 있다.
안 후보가 다음 대선을 위한 정치적 발판으로 노원병을 선택했다는 비판인데, 안 후보 쪽에선 직접적인 대응을 하지 않으면서도 '민생 문제를 해결하는 새 정치'를 내걸고 지역 밀착형 정치를 하겠다고 맞서고 있다.
■ 김지선 "노회찬 무죄에 한 표를!", 정태흥 "뉴타운 전면 백지화"
민주통합당이 후보를 내지 않은 가운데 다른 야당 후보들의 선전 여부도 관심거리다.
오후 1시30분, 마들역 일대에선 김지선 진보정의당 후보의 출정식이 열렸다. 연단 위엔 조준호 공동대표, 심상정·박원석·김제남·정진후 의원 등 당 지도부 및 소속 의원이 총출동해 지지를 호소했지만, 단 한 명만은 예외였다. 삼성 X파일 판결로 이곳에서 의원직을 상실한 김 후보의 남편, 노회찬 공동대표다.
대법원의 판결로 1년간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상실한 노회찬 대표는 연단 멀찍이서 유세를 지켜봤다. '김지선 후보의 옆에만 서도 선거법 위반'이라는 선거관리위원회의 경고 탓이다. 발언 한 마디 없이 유세를 지켜보던 노 대표는 "오늘은 몇 미터 접근 금지냐"는 기자의 질문에 "글쎄, 오늘은 선관위가 얘기를 안 해주네…"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선거 과정엔 함께할 수 없지만, 진보정의당은 '노회찬 무죄에 한 표를!'을 선거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삼성 X파일 판결로 무너진 정의를 바로 세우는 선거로 삼겠다는 것이다. 김지선 후보 역시 "저 김지선에게 투표하시고 노회찬의 명예회복을 해 달라"고 호소했다.
▲ 진보정의당 김지선 후보는 '노회찬 무죄에 한 표를!'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유권자들을 만났다. ⓒ연합뉴스 |
지지율은 아직 10% 안팎으로 안철수·허준영 후보에 크게 못 미치지만, 지난 8년간 노원에서 지역 운동을 해온 김 후보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처음 선거에 나왔을 때 많은 분들이 '저 여자가 누군가? 노회찬 부인이구나'라고만 했지 김지선이 없었지만, 최근엔 노회찬이 아니라 김지선 당신 때문에 찍겠다는 분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했다.
캠프 관계자는 "이미 이 지역 풀뿌리 단체 회원 500여 명이 김 후보를 공개 지지할 정도로 주민들과 김 후보의 연이 깊다"며 "40여 년간 여성운동, 노동운동 등 서민을 위해 일해온 후보의 이력이 알려지면서 지지율도 점점 올라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통합진보당 정태흥 후보도 당 지도부와 함께 본격적인 선거 운동에 돌입했다. 현재까지 지지율은 네 명의 후보 중 가장 낮지만, 이 지역 현안이기도 한 뉴타운의 전면 백지화를 내걸고 밑바닥 민심을 훑고 있다.
이날 오전 당고개역에서 이정희 대표, 김재연 의원과 함께 출정식을 가진 정 후보는 '박근혜 불통 정권과 맞서 싸울 유일한 후보'라는 점을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우고 있다.
▲ 통합진보당 정태흥 후보는 이날 오전 당고개역에서 이정희 대표(왼쪽)와 함께 출정식을 가졌다. ⓒ뉴시스 |
4·24 보선 D-13, 마지막에 누가 웃을까
선거가 13일 앞으로 다가왔지만, 지역 민심은 누구도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이번 재보선의 최대 접전지로 부상한 노원병에선 대체적으로 안철수 후보와 허준영 후보의 대결이 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민심은 세대와 지역에 따라 조금씩 엇갈렸다. 노원역 문화의 거리에서 만난 주부 이모(34) 씨는 "안철수 후보를 뽑겠다"며 "기존 정치권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고, 안 후보가 국회로 가면 우리 정치도 뭔가 달라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정권 초기인 만큼 여당 후보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상계1동 주민 최모(61) 씨는 "북한과 전쟁 위기도 높아지고 있는데 그래도 대통령과 여당에 힘을 실어줘야 하지 않겠나"라며 "새누리당 후보를 뽑겠다"고 했다. 상계중앙시장에서 만난 박모(48) 씨 역시 "안철수 후보의 인상이 좋긴한데, 그래도 지역 예산을 많이 가져올 수 있는 여당 후보를 뽑을 것"이라고 했다.
김지선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주민도 꽤 있었다. 마들역 인근에서 만난 주부 강모(39) 씨는 "안철수 후보나 허준영 후보나 모두 지역 일꾼을 하겠다고 하는데, 실제로 오랫 동안 지역에서 주민을 위해 일해온 사람은 김지선 후보"라며 "노회찬 의원이 안타까워서라도 김 후보를 밀어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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