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31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새누리당의 마지막 의원총회에 참석해 남긴 말이다. 그러나 벌써부터 국회 존중 약속은 '공염불'이 되고 있다. 박 당선인의 첫 내각 후보자인 김용준 전 국무총리 지명자가 전방위적 검증을 견디지 못하고 낙마한 이후, 박 당선인의 '국회 흔들기'가 위험수위를 넘었다.
핵심은 그가 '신상 털기'라고 비판한 인사청문회다. "국회를 존중하겠다"고 수 차례 공언했지만, 취임 전부터 국회 고유의 권한이자 행정부 견제 장치인 인사청문회를 흔들고 있는 셈이다. '약속의 박근혜'가 무색하진 대목이다.
▲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청문회 흔들기'가 도를 넘고 있다. 김용준 전 국무총리 후보자가 낙마하자, 연일 국회 고유 권한인 인사청문회를 '신상 털기'라고 비판하며 제도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뉴시스 |
'검증 실패' 반성은 고사하고…朴, 새누리당에 '지시 하달'
박 당선인은 30~31일 연이어 현행 인사청문회 제도에 대한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그는 새누리당 일부 의원들과 가진 오찬에서 현행 청문회 방식을 '신상 털기', '죄인 심문 식'이라고 비판하면서 "시시콜콜한 것까지 파헤치는 것은 가혹하다", "40년 전 일도 요즘 분위기로 재단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자체적인 '대안'까지 내놓았다. 박 당선인은 "인사청문이 시스템화 돼서 신상에 대한 문제는 비공개 과정에서 검증하고, 국회에서 공개적으로 검증할 때는 정책 능력이나 업무 능력만 검증하면 되겠다"며 '이원화' 필요성을 거론했다.
박 당선인의 한 마디에 새누리당은 곧장 '청문회 뜯어 고치기'에 착수한 모양새다. 새누리당은 당장 이날 인사청문회 제도 개선을 위한 태스크포스(TF)를 이한구 원내대표 밑에 설치키로 했다. 앞서 이 원내대표도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청문회를 "인격 살인", "도살장"이라고 표현하는 등 강한 불만을 제기한 바 있다. 여기에 김용준 전 지명자까지 각종 의혹으로 청문회를 시작하기도 전에 자진 사퇴하자, 청문회 제도 자체를 손대기로 나선 것이다.
'개선 방향'에도 박 당선인의 뜻이 그대로 묻어났다. 새누리당 내에선 도덕성 검증은 비공개로 하고, 능력 검증만 공개로 하자는 주장이 나온다. 사실상 청문회 때마다 '단골 레퍼토리'로 등장했던 병역과 부동산, 세금 납부 관련 사안을 '신상' 문제로 보고, 국민에게 공개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조순형 "박근혜 청문회 비판은 외신 보도 감"
비판도 만만치 않다. 정치권의 '미스터 쓴소리'로 불리는 조순형 전 자유선진당 의원은 1일 "인사를 실패했으면 사과하고 반성할 생각은 안 하고 '언론 검증이 가혹했다', '인사청문회 제도가 잘못됐다'고 하는데 (본말이) 전도된 주장"이라며 "(박 당선인의 청문회 비판은) 외신 보도감"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민주통합당 역시 박 당선인의 '청문회 흔들기'를 "박근혜 당선인과 새누리당의 인사청문회 무력화 시도"라고 규정하고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원혜영 의원은 이날 "열리지도 않은 국회 인사청문회를 가지고 문제가 있다며 손질해야겠다고 하는 것은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반박했다.
이런 비판은 야당 뿐만 아니라 새누리당 내에서도 나온다. 한 초선 의원은 "과도한 인신 공격은 문제가 되지만, 인사청문회는 대통령의 고위공직자 임명에 대한 국회의 기본적인 견제 장치 아니냐"고 꼬집었다.
친이계 김용태 의원 역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선수가 룰을 바꿀 수 없다'는 박 당선인의 과거 발언을 인용, "인사청문회 도입을 주장해 관철하고 수많은 후보자를 낙마시킨 당이 어떤 당이냐"고 반문했다.
야당일 땐 "철저한 검증", 당선되니 "가혹해"…그때그때 다른 박근혜의 '원칙'
현행 인사청문회 제도는 김대중 정부 시절이던 지난 2000년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의 요구로 도입됐다. 의회의 행정부 견제 원칙에 입각, 미국 의회가 대통령의 임명권에 동의 권한을 가진 사례를 모방한 것이다.
청문회법은 지난해까지 총 7차례 개정을 거쳐 그 대상자가 늘어나고 검증의 그물망도 촘촘해졌다. 이 과정에서 버티지 못하고 낙마한 후보도 많았다.
박 당선인도 '검증의 칼'을 겨눈 것엔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 대표를 지내면서 노무현 정부 고위 공직자들을 줄줄이 낙마시켰다. 이기준 교육부총리, 이헌재 경제부총리, 최영도 국가인권위원장, 강동석 건설교통부 장관 등은 당시 박 당선인을 필두로한 한나라당의 파상공세로 인해 물러났다. 새누리당 내에서 "우리가 야당일 때 못지 않게 했었다"(새누리당 조해진 의원)는 비판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야당일 땐 국민의 알 권리를 강조하며 "예외없는 철저한 검증"을 수 차례 주문했던 박근혜 당선인이 상황이 달라지자 그런 '원칙'까지 폐기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국회의 대통령 견제 장치인 인사청문회를 두고 대통령 당선인이 '이렇다 저렇다' 불만을 제기하는 것에 대한 적절성 논란도 일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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