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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만에 다시 열린 '박통(朴統)' 시대, 박근혜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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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만에 다시 열린 '박통(朴統)' 시대, 박근혜의 사람들

'충성'과 '신뢰'의 용인술, 불통의 장막 될 수도

33년 만에 다시 도래한 '박통(朴統)'의 시대, '박근혜의 사람들'이 주목받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오랜 기간 그의 정치 여정과 함께한 이들이 있었다. 리더에 대한 높은 충성심과 신뢰가 박 당선자 주변 인사들을 관통하는 공통적 특징이다. '측근 정치', '인(人)의 장막'이란 비판도 높았지만, 박 당선자 역시 누군가에게 한 번 신뢰를 주면 쉽게 접지 않는 편이다.

설움을 겪던 당내 비주류에서 당권 장악, 그리고 5년간 절치부심하고 기다려온 집권의 고지까지. 박근혜 당선자는 주변 인력 풀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랜 시간 '킹 메이커'로 활동했던 이들이 차기 정부에서 중요 역할을 맡을 가능성이 크다. 측근들 사이의 '쟁투의 역사' 역시 차기 정권 출범 이후 역학관계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 지난 4.11 총선 당시 박근혜 후보와 새누리당 관계자들. '박근혜의 사람들'은 '이명박의 사람들'과 다른 길을 갈 수 있을까? ⓒ프레시안(최형락)

당내 비주류에서 당권, 대권까지…내부 권력 투쟁도

지난 1월 박근혜 당선자가 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화려한 귀환'을 하면서, 새누리당 내에선 "친박이라고 다 같은 친박이 아니다"라는 말이 나돌았다. 이를 증명이나 하듯 웃지 못할 '유행어'까지 돌았다. 원박부터 신박, 복박, 중박에서 월박까지.

예컨대 지난 17대 대선부터 줄곧 박 당선자 곁에 있었던 최경환 의원, 서병수 사무총장, 유정복 최고위원, 이정현 공보단장 등은 '원조 친박', 즉 원박으로 분류된다. 복박은 친이계 쪽으로 눈을 돌렸다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다시 박 당선자 쪽에 선 김무성 총괄선대본부장 등을 지칭한다. 이밖에도 중립 성향으로 평가됐으나 1월 이후 친박색이 짙어진 황우여 대표, 이주영 특보단장 등은 '중박', 당초 친이계였다가 친박계로 넘어온 이들을 '월박'이라고 부르는 식이다.

2007년 대선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패하면서 '공천 학살' 등 설움을 겪은 친박계라지만, 박 당선자가 등판한 지난 1월 이후 승승장구하며 새누리당 창당과 총선, 대선 과정 전면에 나선 셈이다. "더 이상 친이, 친박은 없다. 100% 친박당이다"라는 말은 이런 분위기를 상징했다.

문제는 이렇듯 박 당선자와의 거리를 놓고 당내 권력지도가 짜이다 보니, 무리한 충성 경쟁과 일부 핵심 인사들의 '전횡' 논란도 끊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난 총선 직후 터진 공천 헌금 사건과 잇달아 터진 측근 비리로 '환관 권력', '인(人)의 장막'이라는 비판도 늘 박 당선자를 따라다녔다. "박근혜의 가장 큰 적은 친박"이라는 자조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충성'과 '신뢰'의 용인술

차기 권력을 놓고 벌이는 측근들의 쟁투는 일정 부분 박 당선자의 용인술의 결과라는 분석도 있다. 2인자를 용납하지 않고, 사람을 쉽게 믿지 않는다. 때문에 선거 캠프 역시 박근혜 당선자를 정점으로 하는 방사형 피라미드 구조로 구성됐다.

그러나 2인자를 두지 않다보니 측근들 사이의 '인정 투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과 이한구 원내대표가 한때 '혈투'에 가까운 싸움을 벌였고, 이른바 '원조 친박'들 사이에서도 계파에 따라 수시로 기 싸움이 이어졌다.

박 당선자의 이런 스타일이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용인술을 빼닮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정인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고 경합을 시켜 이기는 쪽을 곁에 두는 방식이란 얘기다. 박 전 대통령 역시 유신 전에는 김형욱-이후락의 경쟁 구도, 유신 이후엔 차지철-김재규의 경쟁 구도로 측근들의 권력 투쟁을 유도했고, '패자'의 과오는 당사자의 능력없음, 과오로 정리됐다.

이밖에도 '배신'과 '충성'은 박근혜 당선자의 인사 스타일을 관통하는 주요 키워드다. 배신에 대한 생리적인 거부 반응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피습 이후 유신 때 호의호식했던 측근들이 돌아서는 것을 목격한 뒤 몸에 뱄다.

이 때문에 사람을 곁에 두는 첫째 기준은 '충성'이 되고, 한 번 신뢰를 주면 잘 철회하지 않는다. 1998년 정치권 입문 후 단 한 번도 보좌진을 교체하지 않은 점, 이번 대선 캠프 구성원 대부분이 2007년에도 호흡을 맞췄다는 점은 이런 특징을 보여준다.

문제는 박 당선자 본인이 '직언파' 대신 '충성파'를 더 신뢰하다보니, 그에게 직언하는 인물 대신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충직한 '심복'들만 주변에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당내 일각에선 선거 기간 내내 "이명박 정부 때보다 인력풀이 더 좁다"는 평이 공공연하게 나왔다.

이런 인사 스타일과 박 당선자 특유의 보안주의, 비밀주의가 결합하면서 생긴 고질적인 '불통' 논란은 향후 박 당선자가 극복해야할 과제다. 정윤회 전 비서실장을 비롯해 '4대 천황'이라고 불렸던 최측근 보좌진 그룹 등 비선 개입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급기야 지난 10월에는 최고위원 격인 전직 비상대책위원들이 4~6급 보좌진들의 퇴진을 공개 주장하는 민망한 상황까지 발생했다.

이런 폐쇄적 의사소통 구조와 철저한 보안주의가 리더로서의 카리스마는 높였지만, 그 누구도 박근혜 당선자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는 분위기가 캠프는 물론 당 전체를 잠식했다는 평도 나온다.

변화는 그때뿐? '박근혜의 사람들', 친이계와 다른 길 걸을까

측근 그룹들 사이의 흥망성쇠 역시 '박근혜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주요 포인트다. 대표적인 것이 '변화'를 상징했던 외부 영입 비상대책위원들과 친박계 핵심들 사이의 경합이다.

박 당선자가 삼고초려 끝에 영입한 김종인 위원장을 비롯해 이상돈 정치발전특별위원, 이준석 전 비대위원 등은 사실상 새누리당의 변화를 상징해 왔다. 이들을 주축으로 총선 당시 '보수색 빼기'가 이뤄졌고, 급기야 당 색깔도 빨간색으로 바뀌었으며, 당헌·당규에 경제민주화 같은 '급진적인' 정책이 삽입됐다. 결과는 총선 승리라는 '반전 드라마'였다.

그러나 새누리당 '창당 공신'이었던 이들의 입지는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차츰 변화한다. 김 위원장은 경제민주화 추진 방식 등을 두고 이한구·강석훈·안종범 의원 등 당내 시장주의자들과 끊임없이 대립했지만, 박 당선자는 결국 측근들의 손을 들어줬다. 김종인 위원장이 제출한 경제민주화 공약은 사실상 '누더기'가 되어 최종 발표됐고, 총선 승리를 이끌었던 영입 인사들이 대선을 앞두고 '용도폐기'됐다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이 시점에서 박 당선자 역시 중도층에 집중했던 기존의 전략에서 선회해 보수층 결집에 나선다. '100% 국민대통합'을 강조했지만 선거 과정에서 심심치 않게 색깔론이 튀어 나왔다. 이 과정에서 김종인 위원장은 한때 박 당선자와의 '심적 결별'을 선언하기도 했다.

다만 박근혜 자신이 선거 과정에서 "경제민주화는 반드시 책임지고 실천하겠다"고 수차례 공언한데다 김 위원장을 비롯한 비대위 그룹이 총선과 대선 승리의 한 축을 담당한 만큼, 이들의 목소리가 다시 힘을 얻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향후 인수위원회를 시작으로 '박근혜 정부' 구성에 얼마나 포용의 리더십을 보여줄지도 주목된다. 과거 '공천 학살'과 '코드 인사'의 피해자였던 친박계가 그들의 '정적'이었던 친이계와 얼마나 다른 길을 걸을지는 더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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