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가지가 논란이 되었습니다. 하나는 현 정부의 감세 규모에 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감세의 귀착 효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날 문재인 후보는 현 정부의 감세 규모가 100조 원에 이른다 했고, 감세 혜택의 90% 이상이 부자와 대기업에 돌아갔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새누리당은 실제 감세 효과는 63.8조 원이며, 감세 혜택 중 절반이 서민, 중산층, 중소기업에 돌아갔다고 반박했습니다.
2. 어느 쪽 말이 맞나요?
⇨ 우선 감세의 귀착 효과에 대해 살펴보면, 양측 모두 틀린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문 후보 주장이 2008년을 기준으로 했다면 맞습니다. 그러나 2008년 이후 몇 차례 세제 개편 과정에서 감세 후퇴가 있었기 때문에, 감세 혜택의 90% 이상이 부자와 대기업에 돌아갔다고 주장하기는 어렵습니다. 새누리당 주장도 옳은 것은 아닙니다. 새누리당은 감세 혜택의 절반이, <한겨레>는 59%가 부자와 대기업에 돌아갔다고 주장했는데 이것도 틀린 겁니다. <한겨레>는 기획재정부 발표자료를 근거로 했는데 기획재정부의 서민, 중산층, 부자 구분 기준은 OECD 기준과 다릅니다. 신뢰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저는 감세 혜택의 70% 이상이 부자와 대기업에 돌아갔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3. 감세 규모는 어떤가요?
⇨ 둘 다 틀린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기획재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08년과 2012년 사이 5년간 감세 규모는 86.2조 원이었습니다. <한겨레>는 지난 12일자 기사에서 2008년과 2011년 사이 4년간 감세규모가 88.7조 원이라 했는데,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감세는 2009년부터 본격화되었기 때문에 2008년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았습니다.
4. 이번에는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를 검증해 보겠습니다. 새누리당은 4.11총선 당시 매년 15조 원의 복지를 추가하겠다고 공약했습니다. 그런데 8월 중순 어느 날 갑자기 박 후보가 매년 27조 원 복지를 공약했습니다. 배경이 뭔가요?
⇨ 7월 19일 발간된 안철수 전 후보의 책, <안철수의 생각>과 당시 진보진영 일각의 '보편적 증세' 예찬론이 박 후보의 대선 공약에 큰 영향을 끼친 것 같습니다. 당시 안철수 전 후보는 자신의 책에서 "의료보험처럼 소득수준에 따라 능력대로 세금을 더 내고"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를 근거로 일부 학자들과 언론인들이 문재인 후보는 부자증세, 안철수 후보는 보편적 증세라고 구분했고, 또 이를 근거로 안 후보가 문 후보보다 더 진보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박 후보 캠프가 이 지점에 착목한 것 같습니다.
5. 박 후보는 부자증세보다 서민증세를 원하고 있었는데, 진보진영 일각에서 그에게 도움이 되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말았다는 건가요?
⇨ 그렇습니다. 진보진영 일각에서 부자증세보다 보편적 증세가 더 진보적이라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박 후보 입장에서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겁니다.
6. 보편적 증세와 27조 복지와는 어떤 관련이 있나요?
⇨ 보편적 증세를 통해, 즉 서민들의 세금인 부가가치세 세율을 현행 10%에서 12%로 올리면 세수가 12조 원 늘어납니다. 박 후보 캠프가 4.11총선 때의 복지 공약 15조 원을 27조 원으로 늘린 배경에는 부가가치세 증세를 포함한 보편적 증세에 대한 기대가 깔려 있었다고 봅니다.
7. 보편적 증세라 하더라도 안 전 후보가 언급한 사회보험료 증세와 부가가치세 증세는 상당히 다르지 않나요?
⇨ 일반적으로 사회보험료를 비례세(계층별 소득 대비 조세액 비율이 유사한 세금)라 하고, 부가가치세를 역진세(저소득층의 소득 대비 조세액 비율이 고소득층보다 더 큰 세금)라 하지만, 실증연구서들을 보면 그 차이가 크지 않습니다. 그래서 최근 박 후보가 사회보험료 증세도 필요하면 하겠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고 있는 겁니다.
8. 박 후보가 사회보험료 증세와 부가가치세 증세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어디에 있나요?
⇨ 이유는 간단합니다. 부자증세를 회피하기 위해서입니다. 12조 원을 전액 부가가치세 증세로 채울 수도 있고, 사회보험료 증세와 부가가치세 증세를 절반씩 배합할 수도 있습니다.
▲ 빗속 유세를 하고 있는 박근혜 후보. ⓒ연합뉴스 |
9. 김종인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도 부가가치세 인상 가능성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지요?
⇨ 김 위원장은 지난 10월 16일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부가가치세 인상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는 이날 방송에서 "부가가치세 세율을 조정하고 조세부담률을 어느 정도 인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10. 김 위원장은 1970년대에 부가가치세 도입에 반대한 인물 아닙니까?
⇨ <프레시안> 2009년 2월 14일자에 따르면 그는 홍익대 전성인 교수와 한 대담에서 1979년 부마사태의 근본 원인이 부가가치세였고, 이 세목 때문에 박정희 정권이 무너졌다고 말했습니다. 또 그는 이날 대담에서 신군부가 자신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재무분과위원으로 영입한 이유가 부가가치세에 비판적이기 때문이었다고 증언했습니다.
11. 김 위원장이 부가가치세 인상론을 펴면서 내세우는 논리는 무엇인가요?
⇨ <프레시안> 2009년 7월 13일자에 따르면 그는 역시 전 교수와 한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은 간접세와 직접세의 역진성이니 분배효과니 하는 것들을 논의할 시기가 아니다. 부가세의 부작용은 일단 세금을 걷은 다음 역진이 안 되도록 정부가 돈을 잘 쓰면 된다." 생각이 많이 바뀐 모양입니다.
12. 김 위원장의 발언은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 그의 발언은 문 후보처럼 부자증세를 해서 보편적 복지로 배분하나, 자신들처럼 보편적 증세를 해서 선별적 복지로 배분하나 그 효과는 비슷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동안 '부자증세+소득차등형 보편복지'를 주장한 겁니다. 이 두 가지를 적절히 결합하지 않으면 김 위원장과 같은 사람들의 자기 합리화 논리를 깨부수기 어렵습니다.
13. 흥미로운 일은 지난 10월 김 위원장이 부가세 인상 가능성을 언급한 다음 날 일어났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보수성이 강한 신문 중의 하나인 <한국경제신문>이 사설을 통해 김 위원장의 부가세 증세론에 화답하고 나온 겁니다.
⇨ 역시 보수는 '돈 냄새'를 잘 맡습니다. 보편적 증세, 서민증세가 자신들에게 얼마나 큰 이익이 되는지 바로 알아차린 겁니다.
14. 부가가치세율 인상이 보수에게 돈이 된다는 증거가 있나요?
⇨ 정부가 서민증세를 하게 되면 부자감세 철회나 부자증세를 안 해도 됩니다.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 보수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입니다. 새누리당의 4.11총선 공약만 들여다보아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부자감세를 철회하거나 부자증세를 최소화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입니다.
15. 12조 원의 부가가치세를 인상하면 각 계층은 어느 정도의 세금을 더 내야 하나요? 저소득층부터 소개해 주세요.
⇨ 12조 원의 부가가치세 인상을 하게 되면, 1분위(소득 하위 10% 계층)가 추가로 부담해야 하는 세 부담은 연간 23만 원이고, 2분위는 37만 원, 3분위는 48만 원입니다.
16. 고소득층 추가 부담은 어떻게 됩니까?
⇨ 8분위는 98만 원이고, 9분위는 111만 원, 10분위는 150만 원입니다.
17. 고소득층이 조세 부담을 많이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가가치세에 역진성이 있다고 말하는 이유가 뭔가요?
⇨ 누진성과 역진성을 판별하는 기준은 '소득 대비 조세부담액 비율'입니다. 부가가치세의 경우 저소득층의 소득 대비 조세부담액 비율이 고소득층보다 더 크기 때문에 역진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18.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은 부자증세를 주요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12조 원을 부자증세로 조달하면 계층별 부담은 어떻게 되나요?
⇨ 참여연대의 부자증세론에 따르면 12조 원 전액을 소득 상위 10% 계층이 부담한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19. 보수진영에서는 부자들만 세금을 많이 내게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 진보와 보수 모두 조세 감면 축소를 공약으로 내걸고 있는데, 조세 감면을 축소하게 되면 서민 세금도 상당히 늘어납니다.
20. 일부 진보진영 학자들이 '보편적 증세'에 찬사를 보내는 이유가 뭡니까?
⇨ 진보진영 일각에는 북유럽의 모든 정책이 다 옳고, 우리에게도 적용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노무현 정부 때도 그런 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공공토지 비축론'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북유럽에서 공공토지를 비축하고 있으니,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두 가지의 큰 재앙을 가져왔습니다. 첫째, LH공사와 SH공사가 토지를 매입한다며 전국을 들쑤시고 다니자 부동산 가격이 폭등했습니다. 둘째, LH공사와 SH공사가 불필요하게 사들인 토지가 지금 이들 공기업 재무 건전성 악화의 주범이 되고 있습니다. 북유럽 정책이라 하더라도 취사선택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21. 북유럽 국가들이 1990년대 이후 부자증세보다 보편적 증세에 관심을 가진 이유가 뭔가요?
⇨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이들 국가들은 인구소국(한국의 1/5~1/10 수준)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보다 조세 경쟁에 민감하다는 점. 둘째, 소득세 부담률이 지나치게 높아 낮출 필요가 있었다는 점. 셋째, 복지 지출이 충분해서 역진세 인상으로 인한 부작용이 극히 작게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22. 만에 하나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 부가가치세를 12조 원 증세하고 여기에 대해 진보진영 일각에서 동조를 해 준다면, 부자증세는 물 건너가겠군요?
⇨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박근혜 후보는 손 안 대고 코를 풀 수 있습니다. 부자감세 철회나 부자증세가 물 건너가고 사회보험료와 부가가치세 증세만 이루어진다면, 서민의 왼쪽 호주머니에서 돈을 빼내 오른쪽 호주머니에 넣고 나서 그걸 복지라고 미화하는 황당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진정한 복지의 척도는 복지의 양이 아닙니다. 소득재분배를 통해 얼마나 빈부격차를 줄였느냐, 이게 바로 진정한 복지의 척도입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