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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은 10월 9일을 어떻게 보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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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은 10월 9일을 어떻게 보냈나

[기자의 눈] '선의'가 변명거리가 될 수는 없다

위기는, 그 위기가 크면 클수록 그것을 맞은 집단의 구성원은 물론 지도자의 철학과 역량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법이다.
  
  지난 9일 노무현 대통령은 북핵 실험 첩보를 보고 받은 오전 10시 30분 경부터 부시 미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마친 오후 9시 20분까지 약 11시간 남짓 동안 NSC 회의 주재, 한일정상회담, 기자회견에다가 중간 중간의 긴급보고 등까지 포함해 숨 가쁜 일정을 소화해냈다.
  
  하지만 이날 노 대통령과 청와대는 최근 대통령 본인이 수차례 강조했던 "비판은 받아들이겠지만 선의를 의심하지 말라"는 발언대로 선의 자체를 의심하기는 힘든, 안쓰러운 모습이었지만 지난 3년 8개월 여 집권 기간 동안 나타났던 외교안보 분야의 밑천과 문제점을 집약해서 노출시킨 계기였다.
  
  물론 북핵 실험이라는, 어찌 보면 불가항력적인 사태는 일정 부분 혼란과 지금까지의 대북정책에 대한 재점검을 강제하는 것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중치 못한 언행, 냉온탕을 오가는 정책의 급격한 변환, 중심을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재연됐다는 말이다.
  
  신중치 못한 과거 발언들이 결국 발목을 잡다
  
  이날 진행된 각종 회의, 회담, 기자회견을 통해 나타난 노 대통령의 많은 발언들은 일관하는 메시지는 '북핵 불용'-'포용정책의 파탄'-'미·일과의 동맹 강화'로 요약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과 고위급 인사들의 신중치 못한 발언이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 장면이 이 날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특히 과거 발언들에는 '립 서비스' 성격도 적지 않았음을 감안하더라도 북핵 문제에 대한 과거 노 대통령의 발언은 그대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북핵문제에 대해 가장 널리 알려진 노 대통령의 어록은 지난 2004년 11월 미국 LA에서 행한 "북핵이 자위적 수단이라는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는 발언이다.
  
  노 대통령은 지난달 핀란드를 방문한 자리에서도 "북한 핵 실험에 대해 근거 없이 이야기하는 것은 여러 사람을 불안하게 할 뿐더러 남북관계도 해롭게 만들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과도한 불안감을 불식시키기 위한 발언이었다고 이해한다손 치더라도, 각종 정보와 첩보를 최종적으로 보고받는 대통령의 이같은 발언에는 무게감이 실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9일 기자회견에서 노 대통령은 "북핵 실험은 위험한 불장난"이라며 "궁극적으로 포기할 일은 아니지만 이 마당에 포용정책에 효용성이 더 있다고 주장하기도 어렵지 않겠는가"라고 대북정책의 전면적 기조 변화를 강력히 시사했다.
  
  특히 "이제 지난날처럼 모든 것을 인내하고 양보하고 북한의 모든 것을 수용하는 식으로 해나갈 수는 없는 것 아닌가"라고 말할 때는 목소리를 높이며 격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 대목에서는 북핵 실험에 실질적인 액션을 취할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마저 묻어났다.
  
  북핵 실험 이전의 발언들이 신중했더라면 이날 노 대통령이 느낀 당황함의 정도는 훨씬 덜했을 것이다.
  
  논평가적 마인드, 이중적 뉘앙스
  
  북한이 핵실험이라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기 때문에 북핵의 성격이 '자위적 수단'에서 '위험한 불장난'으로 바뀌었다고 치자. 따라서 북핵에 대한 노 대통령의 과거 발언과 핵실험 이후 발언은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고 이해하자.
  
  그렇더라도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논평가적 마인드, 이중적 뉘앙스는 뜻밖에도 고스란히 유지됐다. 오히려 우려스러운 것은 이 대목이다.
  
  만일 노 대통령이 '북핵 불용'을 그 모든 것에 우선하는 독트린으로 애초부터 상정하고 있었다면 지난 2004년 LA에서 "자위적 수단이라는 말도 일리가 있다"는 식의, 한 걸음 떨어져 보는듯한 발언은 하지 않았어야 했다.
  
  또한 본질적 수준의 상황변화로 정책기조의 근본적 전환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면 "포용정책이란 것이 북핵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유효하지 않았다는 평가가 거세게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 "궁극적으로 포기할 일은 아니지만 포용정책에 효용성이 더 있다고 주장하기도 어렵지 않겠는가"라는 식의 애매한 어투도 삼가는 것이 온당했다.
  
  이날 노 대통령은 동시에 "대한민국 정부는 현 상황을 관리할 능력이 있다"며 "정부를 믿고 생업에 종사하라"고 국민들의 안보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애썼지만 그런 말에 힘이 실리기는 어려웠다. 이런 까닭에 국내 정치지도자, 사회지도층의 의견 수렴을 강조한 노 대통령의 당연한 발언까지도 책임을 회피하는 듯한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다른 사안에 있어서는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역사', '확신'을 그토록 강조하며 자신의 정당성을 확신에 차서 주장하던 대통령이지 않았던가? 왜 북한과 북핵 문제에서는 그런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인지 의아할 뿐이다.
  
  우왕좌왕하다 정책의 급격한 대전환으로
  
  이날 노출된 노 대통령의 문제는 그런 스타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청와대 핵심관계자가 9일 "(북핵실험은) 탄핵보다 훨씬 센 충격이다"고 털어놓았지만 사실 지난 3일 북한의 예고 성명 이후 많은 전문가들은 "결국 시기가 문제지 북한이 곧 핵실험을 할 것은 분명하다"고 입을 모았었다.
  
  하지만 국정원장은 북핵 실험이 벌어지는 순간 국회에 출석해서 "징후가 없다"고 장담하며 망신을 자초했고 그 이후 대통령은 그다지 확신이 없는 모습으로 국민들의 안보 민감증을 우려했다.
  
  게다가 지난 3일 북한 외무성 성명 발표 직후 핵심 당국자는 "이제야 말로 (6자회담 재개를 위한) 공동의 포괄적 접근방안의 필요성이 더 커졌다"고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9일 대통령은 "내용이 현저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며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포괄적 접근방안을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내용상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그대로 정책의 대전환으로 직결됐다. 9일 하루 청와대에서 나온 발언은 80년 대의 그것을 연상케 했다.
  
  "확고한 한미동맹의 기반 하에 국군은 어떠한 도발에도 만반의 대처를" "북한은 오판하지 말라" "국민들은 정부를 믿고 생업에 충실히 종사하시고" 이런 발언들은 한일정상회담, 부시 미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 고스란히 반영됐고 9일을 기점으로 한미일 삼각동맹은 완전히 부활하는 듯한 모습마저 보였다. 심지어 우리 정부는 그토록 반대하던 유엔헌장 7장을 원용한 안보리 제재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까지 내비쳤다.
  
  '동북아 균형자론'을 자신 있게 설파하던 모습은 기대하기 힘들다손 치더라도 신중함을 찾기 힘든, 전형적으로 냉온탕을 오가는 모습이었다.
  
  1994년 1차 북핵위기의 쓰라린 기억
  
  이 장면에서는 대통령 취임 직후 광복절 경축사에서 "그 어떤 동맹도 민족보다 우선할 수 없다"고 말하며 비전향 장기수를 조건 없이 북송시키는 모습을 보이다가 보수언론의 공세에 서서히 정책 기조를 변화시키더니 급기야 "핵을 가진 사람과 악수할 수 없다"로 돌아선 김영삼 정부의 모습이 떠올랐다.
  
  우리는 김영삼 정부의 냉온탕식 외교가 어떻게 귀결되었는지 기억하고 있다. 클린턴 정부와 김일성 당시 북한 주석이 대화를 하는 동안 우리 정부는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통미봉남'이라는 북한 기조를 우리 스스로 실현시켜주는 와중에 상황이 악화되자 "전쟁만은 안 된다"고 호소하다 최악의 상황은 피했지만 결국 경수로 부담만 뒤집어쓰고 말았다. 물론 우리 측의 호소 때문에 미국이 무력사용을 피한 것도 아니다.
  
  이런 전사(前史)를 잊지 않았더라면 노 대통령은, 설사 그것이 쉽지 않았다 하더라도, 9일의 언행에서 좀 더 신중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혹은 립 서비스로라도 "미국도 북한과의 대화의 끈을 놓아선 안 된다"고 한마디쯤 보탰어야 하지 않았을까?
  
  한국 주도권 원칙 버리고 미국 우산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가
  
  막상 일이 터지니 한나라당이나 보수 언론은 여전히 정부를 비난하고 있지만 아무도 감히 '무력 제재'나 '전면적 대화단절'을 주장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있는 민주노동당 또한 북한과 미국을 싸잡아 비판하면서도 우리 정부를 향해서는 "정책기조가 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이해한다"고 말했다.
  
  거꾸로 말하면 국가비상시국은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는 말이다. 청와대가 중심을 잡고 신중한 대처를 해나갔으면 야당이나 일부 언론의 정략적 비난은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결과를 가져 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미일 삼각동맹의 섣부른 재구축은 지난 정권부터 심혈을 기울여 구축하려 해 온 '남북관계에서의 한국의 주도권'을 일거에 날려버리고 미국의 외교 안보 우산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지난해 6자회담에서부터 최근의 공동의 포괄적 접근 방안에 이르기까지 노 대통령 본인의 말대로 우리 정부는 동북아 정세가 대북 강경 일변도로 흐르는 것을 막아 왔고, 당사자로서 지렛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애써 왔다. 혹자는 이라크 파병, 전략적 유연성 수용 등은 모두 이를 위해 치러야 할 값비싼 댓가라고 주장했었다.
  
  물론 우리 정부가 지금 독자적으로 대안을 내놓기도 어렵고 우리 정부를 가장 궁지로 몰아넣은 것은 결국 북한이다. 대통령이나 외교안보라인이 느끼는 배신감과 열패감을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하지만 1994년으로 되돌아 갈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모든 경우에 있어서 선의가 변명 수단이 될 수는 없다. 특히 대통령에게 있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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