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쾰른의 택시 운전사가 부르는 고향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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쾰른의 택시 운전사가 부르는 고향의 노래

[민교협의 정치시평]<3>남과 북에서 거부당한 김용무 씨 이야기

쾰른 택시운전사의 사랑이야기

파리에만 택시운전사가 있었던 줄 알았다
인식에 대한 빛나던 욕망
고국을 향한 뜨겁던 사랑
동지를 향한 끈적대는 연민
쾰른의 라인강변을 따라
택시 운전대를 잡으면서도 식을 줄 몰랐다

(중략)

유럽의 산위에서 내려다본
한국은 냉전의 섬
미륵 선생이 탔던 철로에 녹슨 지 오래고
먼 옛날 선조가 우마에 의지하여 다니던
실크로드에는 실크의 전설 속에서 먼지만 날려
한반도는 먼지와 안개 속에서 길을 잃어

21세기 국경 없는 세기가 열릴 때
노구가 된 몸으로 다시 희망을 보았다
6.15는 동토의 한반도를 녹일 들불,
토막 난 한반도를 붙여놓을 접착제가 되리라 기대했다
6.15통신을 통해 통일의 복음을 뿌리는
전도사가 되리라는 선서를 통일의 재단에 올렸다

어느 날 날아온 신분증
"당신은 남과 북 어디에도 자리가 없소"
2005년 대한민국의 빗장 걸기
2005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빗장 닫기
피눈물을 삼키며
그는 독일 시민권을 얻어야 했다

그에게 남과 북은
분단의 상징일 뿐
그의 조국은 통일 조국
그의 피 속에는 분단도 냉전도 없다
그의 사람을 향한 사랑에는 미움도 원망도 없다
오직 그는 평화와 통일된 세상의 시민이고 사람일 뿐이다 (지은이 김귀옥, 2009. 6. 21)


남북으로 흐르는 쾰른 라인강변의 택시운전사

쾰른(Köln)은 중류 라인강변의 대도시이다. 역사적으로도 유명하지만, 현재 교통의 요지로서 라인란트의 경제·문화의 중심지로 꼽히고 있다.

그곳에 가면 보기 힘든 풍경 하나가 있다. 30년째 택시를 몰고 있는 75세의 재독 한국인 노인이다. 독일에서는 65세가 되면 대부분 퇴직을 하여 노인층 노동력은 '0'에 가깝다. 물론 한국에서는 노인 노동력이 적지 않다. 길거리마다 종이상자를 수집하는 할머니들, 시장에서 일하는 할머니들을 쉽게 만날 수 있는데, 이는 노인에 대한 복지제도가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인복지가 이상적인 사회인 독일에서 75세의 노인이 택시를 몰고 있는 풍경은 낯설다 못해 경이롭지 않겠는가.

쾰른의 택시 운전사는 바로 재독 한국인인 김용무 씨다. 나는 2009년 6·15유럽공동위원회가 개최한 학술행사에 강연자로 초청받은 자리에서 그와 잠시 인사를 하게 되었다. 그는 초라한 행색이지만 신비스런 철학자로서의 용모를 갖춘 지성인이었다. 서울대학교 문리대학에서 철학을 수학하고,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수로 강의하면서 독일 쾰른대학교로 유학을 했다. 그를 따라 한국에서 간호사였던 그의 배우자 김문자 씨도 이민을 하여 독일에서 간호사로서 일하면서 남편의 수학을 내조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는 시간이 없어서 별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나는 귀국 후 자료나 지인들을 통해 김용무 씨에 대해 여러 가지 사연들을 접할 수 있었다.

김용무 씨는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던 수많은 사건들을 보면서 공부만 하는 자신의 처지를 자책했다. 특히 1980년 5·18광주민주화항쟁이 발발하면서 느꼈던 한국 상황에 대한 절망감은 그만의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당시 독일에 유학을 온 학생들이나, 재독동포들과 함께 한국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발 벗고 나섰다. 그가 유학생들과 재독동포들의 일을 제 가족 일처럼 돌보게 되면서 간호사인 배우자에게 가계 부담을 맡기는 통에 집안은 항상 가난했다. 그런 까닭에 늦게 본 두 아들들은 그야말로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대부분의 재독동포의 경우에도 1세대들은 정착하느라고 정신이 없다. 그들은 자식 교육을 잘 시켜 주류 사회에 들어가게 하거나 최소한 독일 주재 한국 대기업에 직원으로 들어가는 게 꿈이다. 실제로 그러한 사례도 많다. 그러나 김용무 씨는 조국 통일만이 꿈이었다. 그는 자식들에게도 그러한 얘기를 줄곧 해주었으나, 2세대인 자식들에게는 강요로 들릴 뿐이었다. 자식들은 재독동포사회의 차가운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아버지를 원망하며 긴 세월 방황했다.

김용무 씨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뭔가 일하지 않을 수 없어서 생활의 방편으로 잡은 운전대를 75세가 된 지금도 놓지 못하고 있다. 2009년 췌장암으로 갑자기 아내와 사별하게 된 후 지금까지 그 운전대는 고독의 벗이 되었다.

한반도 분단과 주변인으로서의 해외동포

해외살이 45년.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젊음을 바친 김용무 씨는 이제 남과 북 어디에서도 입국이 허용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국적의 그림자를 잃어버린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

흔히 해외에서 만나게 되는 재외 동포들은 이런 얘기들을 하곤 한다. 한국 안에서는 남한 중심의 분단적 사고를 하지만, 해외에 나가면 한반도 문제가 전체적으로 보인다. 아무리 싫어도 남과 북은 하나의 민족으로 운명적으로 얽혀 있음을 알게 된다고 한다.

1960년대 이후 해외로 이주한 해외동포 1세대 가운데 이북 출신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한 통계는 모른다. 일반적으로 1960년대 이래로 1980년대까지 재미동포 1세대 중 1/3이 이북 출신이고, 1/3은 호남 출신이고, 1/3은 비호남지역 출신이라고 한다. 또한 재일동포의 일제 강점기 출신지역의 97%는 경상도를 포함한 삼남지역이다. 60만 명 가운데 1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1959년부터 1984년까지 북송되었다. 그러다 보니, 재일동포나 재미동포의 대다수가 남북으로 인연을 맺고 있다. 이러한 사정은 구체적인 차이는 있을 지라도 큰 틀에서는 재독동포 역시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한반도 분단은 개인들의 가족사에도 다 얽혀 있다. 그러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과 북의 운명적인 사건에 연루되는 사람들이 적잖다. 그런 사건들 가운데 하나가 가족간첩단사건이다. 또한 최근에 얘기되고 있는 '통영의 딸' 신숙자 씨 사건 역시 독일 유학생이었던 오길남 박사가 방북, 체류, 탈북하면서 생긴 비극적인 가족사의 하나이다.

또한 1980년대 한국의 민주화 이전까지 해외로 이주했던 사람들 속에서는 한국 정부의 반민주적 독재정권을 비판했던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 중 일부는 기회가 닿아 방북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마도 1970년대까지 남한에 비해 북한의 앞선 경제 발전과 복지 상황에 대한 동경심이 작동했었는지도 모른다.

나로서는 김용무 씨 사건의 진상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독일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는 박종대 씨의 증언에 따르면 김용무 씨는 1994년의 박홍 전 서강대 총장의 소위 '주사파 척결' 발언 사건의 피해자라고 한다(「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의 '이 사건을 말한다' 중). 박홍 전 총장의 주사파 척결이라는 매카시 선풍이 1년여 몰아치는 가운데 안기부 공작원으로 양심고백을 한 독일유학생 한 모씨 부부에 의해 김용무 씨는 간첩으로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심지어 송두율 교수 사건에도 김용무 씨는 얽혀 있다고 했다.

2004년과 2005년 국내외 통일운동단체들이 해외 망명객으로 분류된 10여 명을 국내로 초청할 때에도 김용무 씨는 입국거절을 당했다. 2005년 평양에서 개최된 6·15 통일행사에 방문하려고 했으나 베이징 북한대사관에서 비자 발급을 거절당했다. 남과 북, 분단된 조국 어디에서도 그는 입국이 허용되지 않았다.

최근 들어 가족간첩단사건이나 재일한국인 유학생 간첩단 사건의 조작 혐의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법은 유죄에서 무죄를 재심 선고하면 되지만, 냉전 수 십 년간 그들은 자신들이 입은 상상을 불허하는 피해와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세월 속에 개인은 폐인이 되고 가족은 해체되는 위기를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잔혹한 냉전의 시대는 무수한 피해자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

김용무 씨를 생각하면 '고향의 봄'을 부르며 안경 너머로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의 꿈은 그가 살아 생전에 고향을 방문하는 것이다. 만일 살아서 고향땅을 밟지 못한다면, 한 줌 뼈가 되어 고향 선산에 배우자의 유골과 함께 묻히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자식들과 손잡고 함께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의 친척들과 자유롭게 만나는 것이다. 자식들에게 뿌리 뽑힌 존재가 아님을 느끼게 해주고 싶은 것이리라.

냉전의 시대, 냉전은 체제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개인 모두에게도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냉전으로 그리운 가족들이 갈라지고, 고향은 꿈속에만 있었다. 과거 미국에서 매카시 선풍이 할리우드를 포함한 미국 전역을 휩쓸 당시 공산주의자로 몰린 찰리 채플린은 1952년 제2의 고국인 미국에서 강제로 추방당했다. 1972년에서야 미국은 그에게 만 20년 만에 미국으로 돌아와 아카데미 특별상을 수상하도록 허용했다. 75세의 김용무 씨에게 고국은 없는 것인가?

곧 추석이다. 추석 보름달은 동서남북을 차별 없이 넉넉하게 비출 것이다. 보름달은 길 떠난 사람이 집을 찾아들어 가족들과 상봉하여 시름을 나눌 수 있도록 길을 밝혀 줄 것이다. 아마 올해의 그 달도 독일 쾰른의 아름다운 라인강에도 비추게 되겠지. 그 보름달이 쾰른의 택시운전사가 고향땅을 밟고, 그리워하는 고국의 가족들을 상봉할 수 있도록 길을 밝힐 수는 없을까.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에서 기획한 '민교협의 정치시평'이 매주 금요일 <프레시안>에 연재됩니다. 민교협은 1000여 명의 교수 회원들로 구성된 교수단체로, 칼럼은 매주 민교협 회원들이 돌아가며 연재합니다. 이 칼럼은 민교협 홈페이지에도 동시에 게재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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