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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과 양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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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과 양귀비

[해림 한정선의 천일우화(千一寓話)]<4> 들풀은 깍지 끼고 산다

승자독식의 신자유주의 시대. 무한경쟁과 이기주의라는 담론 속에 갇힌 우리들에게 세상은 배신과 암투가 판치는 비열한 느와르 영화일 뿐이다. 이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우화(寓話)가 처세를 위한 단순한 교훈쯤으로 받아들이는 근거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와 조지 오웰에게 우화는 고도의 정치적 언술이자 풍자였으며, 대중을 설득하는 탁월한 수단이었다. 또 어떤 철학자와 사상가들에게는 다양한 가치를 논하는 비유적 수단이자 지혜의 보고(寶庫)였다.

<프레시안>에서는 <해림 한정선의 천일우화(千一寓話)]>를 통해 우화의 사회성과 정치성을 복원하고자 한다. 부당하고 부패한 권력, 교활한 위정자, 맹목적인 대중들. 이 삼각동맹에 따끔한 풍자침을 한방 놓고자 한다. 또 갈등의 밭에 상생의 지혜라는 씨를 뿌리고, 아름답게 살고 있고 그렇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바람과 감동을 민들레 꽃씨처럼 퍼뜨리고자 한다. 한정선
작가는 "얼음처럼 차갑고 냉정한 우화, 화톳불처럼 따뜻한 우화, 그리하여 '따뜻한 얼음'이라는 형용모순 같은 우화를 다양한 동식물이 등장하는 그림과 곁들어 연재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한정선 작가는 화가로서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대한민국 전통미술대전 특선을 수상했으며 중국 심양 예술박람회에서 동상을 받았다. <천일우화>는 열흘에 한 번씩 발행될 예정이다. <편집자>

봄에 굳은 땅을 비집고 나온 풀들이 서로의 얼굴을 살폈다. 강아지풀, 바랭이, 쇠비름, 개망초, 씀바귀, 쑥부쟁이, 등 풀들은 혹독했던 겨울 추위에 대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가지각색의 풀들이 뿌리와 줄기가 얽혀도 자리다툼하는 일 없이 곁가지를 치며 들판으로 번져나갔다. 기어코, 풀들은 자신들의 꽃을 총총 피워냈다.

오만 풀꽃들이 어우러진 들판의 한쪽에, 등 돌려 핀 양귀비꽃이 있었다.
'내가 어쩌다 잡풀들 곁에 태어난 거지. 잡풀한테 치이겠어.'
양귀비꽃은 뒤죽박죽 무더기 지어 웃고 있는 풀꽃들을 수다쟁이 잡꽃들이라고 깔보았다.
"헝클어지니까 가까이 오지 말아요."
바랭이가 다가가자, 양귀비꽃은 자기 땅으로 발 뻗지 말라고 쌀쌀하게 말했다.

땅에 마른 먼지가 풀썩였다.
가뭄을 직감한 풀들이 이웃 풀들과 어깨동무해 사이를 촘촘하게 좁혔다. 키가 높게 웃자란 풀들은 저절로 키 작은 풀들의 그늘이 되어주었고, 땅으로 낮게 기면서 얼크러진 키 작은 마디풀들의 잎사귀는 키 큰 풀들의 뿌리를 메마르지 않게 해주었다.
들풀들이 힘을 보태 모진 고비를 넘겼을 때, 양귀비꽃은 잎이 갈색으로 오그라들어 홀로 신음하고 있었다.

고대하던 장대비가 쏟아졌다.
들풀들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온 몸의 묵은 먼지를 씻어냈다.
빗물이 풀 무더기의 흥청한 줄기를 타고 양귀비꽃으로 주르르 흘렀다.
"땟물 흘리지 말아요."
양귀비꽃이 어깨를 털었다.
"무거우면 저절로 기울어요."
다시 언짢아진 들풀들은 고개를 돌렸다.

장대비가 폭풍까지 불러 와 들판을 휘저어댔다.
풀들은 줄기와 잎사귀들을 깍지 끼고 한데 뭉쳐 흔들렸다.
폭풍이 비껴간 후, 들풀들은 밤새도록 부대꼈을 서로에게 고마워했다.

밤사이, 양귀비꽃은 혼자 안간힘을 쓰다 목이 꺾여 있었다.

ⓒ한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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