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서울에서 부동산중개소를 운영하는 김씨는 5~6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A씨에게 부탁을 받았다. 자기가 가진 아파트를 은행 융자만 인수하는 조건으로 처분해 달라는 거였다. 자영업에 종사하는 A씨는 부동산에 대해 어느 정도 투자경험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은행 융자만 인수하는 조건으로 처분을 부탁하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만나서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상황이 심각했다. 5년 전, 서울 인근 낡은 집에 투자했던 A씨는 이 집 가격이 오르자 이를 담보로 대출을 받아 집을 더 사들였다. 사들인 집을 담보로 또다시 집을 사들이는 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기가 소유하는 집이 일곱 채까지 됐다.
이후 은행 이자를 내며 집값이 오르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1년 정도 지나자 가격이 본전 정도로 떨어졌다. '그래도 조만간 오르겠지' 생각하며 기다렸다. 2년이 지나자 15% 정도 하락했다. 본전 생각이 나서 팔지 못했다. 3년이 지나자 약 50% 정도 하락했다.
'아차' 싶어 그제야 은행 융자만 인수하는 조건으로 부동산에 집을 내놨지만 팔리지 않았다. 말 그대로 깡통집(정크본드)이 된 거다. 그 사이 자신이 살고 있던 아파트는 은행 이자를 내느라 팔고 없다. A씨는 지금 전세에 살고 있다.
# 하우스 푸어 B과장
매달 약 400만 원의 월급을 받는 중소기업 B과장은 2년마다 이사를 해야 하는 '전세' 신세를 면하고자 무리해서 경기도 파주에 아파트를 구입했다. 전용면적 84.92제곱미터인 시가 2억8000만 원 아파트를 대출 자금 1억 원을 끼고 샀다.
이 때문에 매월 200만 원(원금 5000만 원, 연리 6%기준으로 60개월 원리금균등분할 상환시 매달 97만 원가량 납입) 정도의 고정 지출이 발생했다. 지출 부담이 생각보다 컸다. 아이들 보육비도 만만치 않게 들었기 때문이다. 회사에 다니는 게 마치 대출 원금상황과 이자를 내기 위한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할 때가 되레 행복할 때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아파트 가격은 2억5000만 원대로 주저앉았다. 이후 아파트 가격은 계속 내려갔다. 게다가 회사 사정으로 임금까지 3분의 2로 삭감돼 원금은 고사하고 이자 갚기도 어려운 상황이 됐다. 부동산에 아파트를 내놨지만 사려는 사람은 전무했다. 결국, 지난달 시행된 경매에 그의 집은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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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 깔린 폭탄들…투기꾼도 '하우스 푸어'도 공황 상태
부동산 거품의 붕괴로 부동산 투기꾼은 물론, 그들을 따라 한몫 잡아보려 집을 산 '하우스 푸어'들도 공황상태에 빠졌다. 대출금도 갚지 못해 자신의 집을 경매에 내놓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부의 상징이었던 부동산이 이젠 '쪽박'의 신화가 된 셈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상황이 계속될 경우, 2008년 금융위기를 불러온 미국 상황처럼 한국도 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고 입을 모은다.
곳곳에 폭탄은 존재한다. 가장 큰 폭탄은 유로존 재정위기다. 이것이 한국 경제에 영향을 미칠 경우, 문제는 심각해진다.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 완벽한 폭풍) 효과가 발생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퍼펙트 스톰은 작은 폭풍이더라도 또 다른 폭풍을 만나면 그 영향력이 폭발적으로 커지는 현상을 가리키는 자연과학 용어다. 경제용어로서는 2011년 6월,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가 '2013년 미국, 중국, 유럽, 일본 등 경제 대국들의 악재가 한꺼번에 터져 세계 경제 위기가 찾아올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유명해졌다.
유럽 재정위기 확산, 미국 더블딥(경기회복 뒤 다시 침체), 중국 경착륙이라는 삼각파도가 하나로 뭉쳐 세계 금융시장을 강타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루비니 교수는 2008년 금융위기를 정확히 예측해 '닥터 둠'이란 별명을 얻었다.
그의 경고가 2012년 6월 한국에서 새삼 다시 회자되고 있다. 실제로 그가 말한 '퍼펙트 스톰'이 올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4년 만에 300조나 오른 가계 부채
무엇보다 부동산담보대출로 늘어난 가계 부채 때문이다. 2011년 12월 기준으로 가계 부채는 994조 원을 기록했다. 자영업 대출 102조 원까지 포함하면 사실상 가계 부채는 1000조 원이 넘는다. 2007년 665조여 원보다 40% 오른 수치다. 이 중 주택 담보대출은 379조 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택담보 대출이 가계 부채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주택담보 대출이 이렇게 높은 가계 부채율을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부동산 불패 신화' 때문이다. 집이란 사놓으면 언젠가는 오른다는 믿음이 투기꾼과 실제 집이 있어야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빚을 내서 집을 사게끔 했다. 은행도 기본적으로 담보(집)가 있다는 점에서 안심하고 대출을 해줬다.
그것이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다. 빚 규모는 소득이 늘어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2011년 한국은행의 '가계금융조사' 자료를 보면 자기 집을 보유한 가구의 평균 가처분소득(저축과 소비를 할 수 있는 소득)은 전년 3373만 원보다 9.3% 늘어난 3688만 원이었다. 같은 기간 빚 규모도 6363만 원으로 전년 5629만 원보다 12.9% 증가했다. 집을 소유한 가계의 빚이 가처분 소득보다 1.4배나 빠르게 불어난 셈이다.
가처분소득에서 부채가 차지하는 비율은 2010년 166.9%에서 2011년 172.3%로 확대됐고 자택 보유 가구의 월 지급 이자와 월 상환액은 48만 원에서 60만 원으로 25% 급등했다.
2008년 이후, 계속 내려가는 아파트 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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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중이 가장 높은 중형(전용면적 85제곱미터) 아파트 가격과 버블 세븐 중심지인 강남 지역은 가격이 급락하고 있으며 1기 신도시 지역인 분당, 일산, 평촌, 산본 등과 용인, 인천 송도와 영정도, 김포 등은 2006년 1월 수준으로 가격이 내려간 것으로 조사됐다.
2006년 이후 물가상승과 환율 상승 등 원화 화폐가치 하락 등을 고려하면, 사실상 수도권 지역 아파트 실질 가격은 2005년 이전으로 떨어진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장 급한 건, 경제 불황으로 대출 이자를 갚지 못하는 '하우스 푸어'들이다. 아파트 가격이 오르면 추가 대출이라도 받을 수 있으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지난 4월 말 기준 주택담보대출 연체율은 3월보다 0.03% 올라간 0.79%를 나타냈다. 이것은 5년 개월 만에 최고치다. 대출 이자와 원금이 연체돼 일정 기간을 넘으면 주 채권자인 은행이나 제2금융권이 집을 경매에 내놓는다.
8일 법원 경매정보업체 부동산태인에 따르면 지난 5월 수도권에서 경매에 나온 아파트는 모두 2842건으로 월간 기준으로 연중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2202건)보다 29% 늘어난 수준이다.1월 2406건이던 아파트 경매 건수는 2월 2455건, 3월 2750건 등 지속해서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 이 영향으로 지난달 단독주택 등을 포함한 전체 경매물건 수도 올 들어 처음으로 1만 건을 넘어섰다.
가계 부채가 해외발 경제 위기와 부딪치면?
경매 전문가들은 2006~2007년 부동산 가격 급등기에 3~5년 거치 주택담보대출로 집을 산 하우스 푸어들이 원금 상환 시기가 돌아오면서 채무 상환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고 분석한다. 은행권의 주택담보대출 경쟁으로 '이자만 갚는 대출'인 일시 상환형 대출을 무분별하게 판매한 결과다. 일시 상환형 대출은 일정 기간 이자만 갚다가 한꺼번에 원금을 상환하는 대출이다.
가계부채를 감당못하고 적금과 보험을 해약하는 가구도 급증하고 있다. 금융권에 따르면 우리은행 적금 중도해지 계좌는 2010년 12월 2만999개에서 2011년 10월 4만7000여 개로 65% 급증했다. 신한은행과 국민은행의 적금해지 건수는 각각 25%, 20%가량씩 증가했다. 보험료를 내지 못해 보험계약이 효력을 잃거나 계약을 해지한 건수는 업계 전체적으로 2011년 7월 기준 44만7000건, 8월 51만8000건, 9월 43만8000건에 달했다.
1000조 원에 달하는 가계부채를 안고 있는 한국 경제에서 유로존 재정위기 같은 해외발 타격이 가해지면 국내 경제는 심각한 위기가 온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작은 폭풍이 가계부채인지, 큰 폭풍이 가계부채인지 구분하긴 어렵지만, 이 폭풍이 해외발 경제 위기와 맞부닥치면 퍼펙트 스톰이 된다는 건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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