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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든 아이의 키, 옆으로 재고 싶지 않다면…

[토론회]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삶의 질 향상 방안' 포럼

영화 <와일드카드>(2003년 개봉, 감독 김유진)에서 눈길을 끈 장면이 있다. 형사인 아빠가 아이의 키를 옆으로 재는 모습이다. 장시간 격무에 시달리다 집에 들어온 아빠는 그런 아빠를 기다리다 잠든 아이의 키를 옆으로 잴 수밖에 없다. 얼마나 컸는지 확인하기 위해, 깊이 잠든 아이를 깨워 일으켜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영화에선 유쾌하게 표현됐지만 사실 서글픈 이야기다. 문제는 이 서글픈 장면이 현실에는 없고 영화에만 있을 뿐이라고, 혹은 현실에 존재하더라도 형사에게만 해당하는 일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 노동자의 1년 평균 노동시간은 2100시간이 넘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444시간(약 2.6개월, 2010년 기준)을 더 일한다. 현실이 이런데,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이런 장시간 노동 체제를 바꾸고자 하는 이들이 29일 오후 한국노총 대회의실(서울 여의도)에 모였다. 이날 대회의실에서는 국제사무직노조 한국협의회(UNI-KLC)가 주최한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삶의 질 향상 방안' 포럼이 열렸다.

"노동시간 단축에 기여 못하는 노조들, 반성해야"

배규식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과 손미아 강원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수가 포럼의 발제를 맡았다.

배 연구위원은 "한국의 장시간 노동 비중이 다른 나라보다 매우 높다"며 외국과 비교했다. 한국 노동자 중에서 주 40시간 이상 일하는 사람은 82퍼센트에 이른다(2009년 기준). 일본(64.1퍼센트), 독일(51.9퍼센트), 프랑스(34.5퍼센트)보다 훨씬 높다.

한국의 장시간 노동 체제의 특징 중 하나는 시간제 노동의 비중이 매우 낮다는 점이다. 배 연구위원은 "전일제 노동 중심의 고정화된 고용 모델에서 다양한 형태의 정규직 시간제 노동이 병존하고 전일제에서 시간제로 전환 및 역전환이 가능한 고용 모델로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배 연구위원은 "특별한 때에만 해야 할" 연장·휴일노동 같은 초과노동이 일상화돼 있다는 데 주목했다. "완성차 업계의 주당 근로시간은 휴일 특근을 포함해 평균 55시간 이상이며 주말 중 하루는 특근을 하는 것이 거의 관행처럼 돼 있다." 완성차 업계의 주당 노동시간은 전체 산업 평균(41.3시간)보다 14시간 정도 길다. 배 연구위원은 완성차 업체들이 "연장근로시간 규정을 위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배 연구위원은 "노조가 있고 임금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은 (자동차, 조선, 은행업 등의) 산업에서 (……) 대기업 노사가 연차휴가보다는 연차수당 지급을 선호하며 담합했고, 노조들도 주 40시간제 시행을 맞아 노동시간 단축의 대의(를 따르기)보다 조합원들의 실리주의적 요구에 굴종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배 연구위원은 "장기근속자가 많은 조선, 자동차, 은행산업의 정규직 노동자들은 주 40시간제가 도입된 후에도 거의 1개월분 이상의 통상임금을 연월차수당으로 받고 있다"며 "이런 걸 보면 법으로 (정해) 연월차수당을 안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고 말했다. "그래야 노동시간이 줄어들 수 있고", 그만큼 노동시간 단축이 중요한 문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배 연구위원은 노조의 태도 변화를 촉구했다. "노조가 노동시간 단축에 거의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 노조들, 반성해야 한다. 노조가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연구자로서 보기에 한심하다."

이에 더해 배 연구위원은 월 최대연장근로시간제(월 50시간) 도입 등 장시간 노동을 줄일 법적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29일 오후 한국노총 대회의실에서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삶의 질 향상'을 주제로 포럼이 열렸다. ⓒ프레시안(김덕련)

"생체 주기 파괴 포함한 교대제는 발암물질"

손 교수는 장시간 노동, 야간 노동, 교대제 근무가 인체에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짚었다.

먼저 손 교수는 주야 맞교대 근무를 하면서 야간 노동을 한 자동차 노동자들의 생체주기 변화에 관한 연구 결과를 소개했다. 겉으로는 건강하고 멀쩡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야간 노동을 지속한 결과 내부 생체 시계가 교란되면서 생체 주기가 파괴되는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손 교수는 이런 현상이 "각종 장기, 심혈관계, 내분비계, 소화기계, 재생산에 관련된 기관 등을 손상시키며 특히 암을 유발한다"고 우려했다.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국제암기구는 (……) '24시간 생체 주기의 파괴를 포함한 교대제는 인체에 암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는 발암물질이다'라고 발표했다."

손 교수는 이 대목에서 "여성 교대 근무 노동자들은 미숙아나 저체중아를 출산할 위험이 높"고 "월경 주기 불순, 임신 불능, 유방암 증가"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야간 노동이 특히 여성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장시간 노동이 우울증 위험을 높인다는 연구 결과도 소개했다. "1주일에 60시간 이상 노동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우울증에 빠질 위험이 2-4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손 교수는 연구 결과를 소개하며 '임금 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근로시간 특례업종에서 제외해달라"

발제에 이어 각 부문 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 실태를 발표하는 자리가 이어졌다.

유주선 전국금융산업노조 정책본부장은 은행원들이 1년 평균 2572시간이라는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하루 평균 2.51시간의 초과노동을 하지만, 보상은 평균 0.85시간에 대해서만 받고 있다고 했다(보상율 34퍼센트). 이처럼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신청 한도 제한'으로 조사됐다.

유 본부장은 지난 15년간 일반 은행의 점포가 962개 늘어났지만, 정규직은 2만8657명 감소하고 비정규직이 1만6555명 증가했다고 밝혔다. 정규직 인력이 점포당 약 40퍼센트 정도 줄어들었다는 설명이다. 이에 비해 "10년간 국내 은행들은 총자산이 115퍼센트, 자기자본이 250퍼센트, 당기순이익이 213퍼센트 늘어나는 등 크게 성장했다"고 지적했다.

유 본부장은 정규직을 늘리고, 연장노동과 휴일노동을 법정 한도 이상으로 허용하는 '근로시간 특례업종'에서 금융업을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영명 보건의료노조 정책실장은 올해 실태조사를 한 결과 병원 노동자들이 하루 평균 3시간 정도 초과노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또한 조사 결과, 병원 노동자들이 법정 연차휴가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 핵심 이유는 "인력 부족"인 것으로 조사됐다. 나 실장은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24시간 가동돼야 하는 병원 사업장에서 교대 근무제는 불가피하다"면서도 "교대 근무자를 보호하기 위해 노동시간을 줄여야 하지만 한국의 실정은 그와 정반대"라고 우려했다.

나 실장은 "보건의료 산업의 연장근로는 (24시간 가동돼야 한다는) 업무 특성 때문에 발생하기보다는 인력 충원을 제대로 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측면이 크다"고 밝혔다. "인력을 확충하고 열악한 교대 근무제를 개선한다면, 현재 보건의료 산업에 정착돼 있는 3교대 근무제로 주 40시간을 준수하면서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 실장은 "보건의료 산업을 근로시간 특례업종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은행권과 보건의료 부문뿐만 아니라 사무금융, 유통업, 우편 업무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 실태도 공표됐다.

포럼 참석자들은 장시간 노동 체제를 바꿔야만 노동자들이 인간적인 삶을 꿈꿀 수 있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노동시간 단축은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더 미룰 수 없는 과제라는 것이다. <와일드카드>에 비유하면, 아이의 키를 옆으로 재는 일조차 못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손학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이날 행사장을 찾아 축사를 했다. 손 상임고문은 "노동자에게 저녁이 있는 삶, 휴일이 있는 삶, 휴가가 있는 삶을 보장해야 한다"며 "노동시간 단축은 미완의 한국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문제가 직결된다"고 말했다. 손 상임고문은 축사를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행사장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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