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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내가 빙벽에 갇힌 고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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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사실은 내가 빙벽에 갇힌 고래였습니다"

[사람꽃을 만나다·②] "그들을 도와야하는 건 우리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파카한일유압, 시그네틱스, 삼성전자, 한국3M, 포레시아, 동서공업…. 경기지역에서 짧게는 2년 길게는 10년 넘게 싸우는 노동자들이 있다. 사 측의 부당한 해고에 맞선 싸움이다. 이들은 쌍용자동차, 한진중공업 등 언론에 한 줄이라도 나오는 사업장들의 이야기 속에 애써 무덤덤한 척, 하루하루 힘든 싸움을 이어간다.

지난해 12월, 이들과 함께 경기지역의 사회단체, 촛불시민들이 '희망김장' 1000포기를 담갔다. 그 이야기를 담은 책이 <사람꽃을 만나다>라는 제목으로 최근 발간됐다. 이 책을 통해 경기지역 해고노동자들의 삶과 고민, 가족의 아픔, 그리고 희망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6월 1일 수원 아주대학교에서는 북 콘서트도 열린다.

<프레시안>은 <사람꽃을 만나다> 책 출간과 북 콘서트 준비를 하면서 경기지역 장기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의 삶과 고민, 그리고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네 번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그들을 도와야하는 이유는 그들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언젠가 그들처럼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빙하에 갇혀 위기에 처한 회색 고래 가족을 살리기 위해 나선 사람들의 실화를 담은 영화 <빅미라클>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한다. 2월에 개봉한 이 영화를 보지 못했는데, 즐겨듣는 MBC FM 라디오 <이주연의 영화음악>에서 영화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영.음' 이주연의 영화음악을 이렇게 부른다. 요즘 이영음은 방송작가 김세윤 씨가 파업 중인 이주연 아나운서를 대신해 진행하고 있다. 김세윤 씨는 꼬박꼬박 "파업 중인 이주연 아나운서를 대신해 진행하고 있습니다"라는 오프닝 멘트로 쉽지 않은 길을 걷고 있는 동료를 응원하고 있다.

이영음은 새벽3시 방송인데, 파업으로 인해 새벽2시에 방송된다. 잠이 많아 본방사수를 못하고 낮에 팟캐스트로 듣고 있으면, 모든 사람이 외로울 법한 시간에 이영음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될까 싶다. 위로의 음성 중에는 이런 말도 있다.

"다른 생명, 다른 존재의 고통을 모른 척 하지 말 것. 그들이 겪는 고난이 나와 상관없다고 착각하지 말 것. 우리도 언제든 얼음에 갇힌 고래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들처럼 철저히 외로워질 수 있고 또 어쩌면 그들보다 더 절박한 상황에 내 몰릴 수도 있죠. 살다 보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또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그런 일이 닥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약하기 때문에 그들을 돕는다는 이 영화의 대사에 더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은 죄가 된지 오래다

작은 책 한권이 세상에 나왔다. <사람 꽃을 만나다>. 장기투쟁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삶을 담은 책이다. 동서공업 해고자 황영수씨를 만난, 내 글도 이 책 안에 담겼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는 회색고래구나 싶다. 먹이를 찾아 북극까지 찾아왔으나 거대한 빙벽에 갇혀버린 회색고래들. 두꺼운 빙벽에 뚫린 작은 구멍으로 간신히 숨을 쉬는 회색고래들의 위태로운 모습. 살기 위해 얼음을 깨려고, 몸부림치는 고래들. 고래가 얼음을 깨려고 몸부림친들 비난하는 이들은 없다.

▲ 포레시아 노동자 김용훈 씨는 금속노조원이라는 이유로 공장에서 이름 없이 불린다. "야" 또는 "이 새끼야" ⓒ다산인권센터
그러나 회색고래와 같은 처지인 황영수씨와 노동자들은 얼음보다 차고 두터운 벽을 또 만난다. 회사 앞에서 그와 반갑게 포옹한 동료는 그날 그와 악수했다는 이유로 잔업, 특근에서 제외되었다. 포레시아 노동자 김용훈 씨는 금속노조원이라는 이유로 공장에서 이름 없이 불린다. "야" 또는 "이 새끼야"

해고당한 노조원들을 지키기 위해, 바깥에서 싸우는 형님들을 외면할 수 없어 포기할 수 없는 민주노조. 그러나 그가 당하는 일들은 상상을 초월한다. 조장, 반장들이 작업복 등짝에 스프레이 물감을 뿌려대고 회의실로 끌고 가, 4시간 동안 회유하고 협박하며 조합탈퇴를 강요하고 발로 차고…. 그런데 그보다 더한 대접을 받는 형님도 있다. 정년퇴직을 앞둔 50대 후반의 그는 하루 8시간 벽을 보고 서 있어야 했다. 형님도 한참 나이가 어린 반장, 조장에게 "야, 개새끼야"라고 불린다…. 믿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한다.

한국 3M의 백승철 씨는 노조탈퇴를 거부한 죄로 여름에는 풀을 뽑았고 겨울에는 회사 외벽 페이트 벗기는 일을 했다. 용역업체 직원을 동원한 폭행은 잦았다. 그러나 모질고 잦은 폭력에 한번 저항한 그는 폭력행위로 구속되었고 결국 해고 되었다. 삼성해고자 박종태 씨는 해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1년 넘은 시간 내내 꼬박꼬박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그런데 삼성전자 앞에서 버젓이 신고하고 집회를 했건만 수원 영통구청 공무원들은 그의 집회를 짓밟았다. 삼성의 압력이 심했을 것이다. 공무원들은 합법적으로 신고 된 집회 물품들을 강제로 빼앗았다. 화가 나서 달려간 경찰서에서는 또 다른 해고자가 경찰에게 폭행을 당해야 했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은 죄가 된지 오래다.

우리는 그동안 기적 속에 생존해 있었다

노동자. 그들을 만나는 동안, 아빠를 생각했다. 아마도 우리 집 유일한 수입원이었던 아빠의 노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빠는 퇴근길에 무엇이든 꼭 들고 왔었다. 그것은 귤이기도 했고, 때로는 과자였고 운 좋은 날은 선물이기도 했다. 멀리서도 아빠 발걸음 소리는 내가 제일 먼저 들었다. 달려가 아빠 손부터 먼저 살폈다. 까칠까칠한 수염이 따가웠던 뽀뽀도 싫지 않았다. 풍요롭지 않았으나 따뜻했던 저녁식사. 그렇게 우리의 일상은 아빠의 노동으로 지켜지고 있었다.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사회에서 노동이 불안정할 때, 개인과 가족의 소박한 일상을 지키는 일이 기적과 같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우리는 그동안 기적 속에 생존해 있었던 것이다.

해고된 친구가 있다. 그는 "내가 열심히 일을 안했으니,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했다. 열심히 일하지 않았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물으니, 6시 정시에 꼬박꼬박 퇴근했다고 답한다. "행복하기 위해서 일하는데, 야근하고 주말에 출근하며 모든 것을 바쳐서 일하고 싶지 않았다"는 그의 대답은 지당하게 들렸다. 그런데 그는 해고된 이후 생각이 바뀌었나 보다. 그러한 자신이 이기적이었고 열심히 일하지 않는, 그래서 회사에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자책을 했다. 그에게서 죄책감이 느껴졌다. 그의 말을 듣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성실하게 일하는 것도 모자라 자기 영혼과 생활을 모두 바쳐 회사를 위해 일하는 사람만이 생존할 수 있다면, 이것은 이미 지옥이지 않은가.

철도 노동자들 사이에는 유명한 말이 있다. 정년퇴직한 선배가 잊을 만하면 부고로 소식을 알려온다고 하는. 그들이 잊을만한 시간은 고작 5년여의 시간이라고 한다. 퇴직하고 남은여생을 즐길 법도 한데, 그 때가 되면 지치고 병든 육신은 병상과 장례식장으로 향한다고. 앞서 해고된 친구는 새로운 직장을 잡았다며 다시 똑같은 일을 당하지 않으려고 저녁 9시쯤이나 되어야 퇴근한다고 전했다. 과로로 인해 몸이 아프고 살도 찌고 힘들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고 말했다.

'해고는 살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죽지 않기 위해서 일한다. 또는 해마다 해고되고 해마다 복직하는 죽었다 살았다를 반복하는 좀비같은 비정규직이 되지 않기 위해서도 일한다. 비정규직이 모든 일자리를 메우는 사회에서 일자리에 진입하지 못한 청년들은 영혼을 팔아서라도 취직을 하고 싶다며 스펙을 쌓는다. 결국 정치인들은 보수, 진보 가리지 않고 일자리를 만들어 주겠다고 공약을 일삼는다. 그러나 그렇게 어렵게 들어간 일자리에서 쫓겨난 평범한 사람들 앞에서 사정은 달라진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경제를 살리기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라고 말한다. 독약을 앞에 둔 좌절한 인생들에게 경쟁력 없으면 죽어도 싸다고 부채질한다.

거리로 내 몰린 노동자들은 <반란의 조짐>에서 언급한대로 '하이테크와 기계가 메울 수 없는 여러 구멍이나 때우는 존재로 전락해, 생산자로서의 역할을 빼앗기고, 분위기 메이커 스펙을 쌓아야 직업을 유지하거나 취업할 수 있게 된 노동자들은 절망해 스스로를 대패질하는 목수나 다름없게' 되었다. 쌍용차에서 숫자로 호명되는 22명의 노동자와 그 가족들. 생산을 위한 목수가 아니라,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들을 죽이려는 살인자들을 향한 대패질이 아니라, 자기 생명을 향한 대패질을 하게 된 이유는 그렇다. 다시금 말하지만 지금 빙벽에 갇힌 회색고래는 우리 모두가 되었다.

▲ 동서공업 해고자 황영수 씨. 그는 해고된 뒤 생계를 위해 우유배달을 하며 복직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다산인권센터
사실은 내가 방벽에 갇힌 고래였다

<사람 꽃을 만나다>는 노동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한다. 파카한일유압, 포레시아, 시그네틱스, 3M, 동서공업, 주연테크, 삼성...에서 일하다 쫓겨난 사람들, 노동조합을 지키면서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들... 그들의 이름 박종태, 조장희, 김양순, 윤민례, 송태섭, 황영수, 곽은주, 이병윤, 김용훈, 백승철, 박수미 그리고 주연테크 노동자의 딸 구민영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른다. 작업복 속에 감춰진 투명 인간이 아닌,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지금 비록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지만, 정작 그들이 싸우는 이유는 다른데 있기 때문이다. 공장 바깥을 지키고 있는 쫓겨난 형님들을 지키기 위해서, 여기서 포기하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자존과 권리를 위해서. 2001년 해고되고, 2007년 복직했고 또 다시 2011년 해고된 시그네틱스 노동자. 서른 두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자기 잘못 하나 없이 두 번이나 해고를 당했다.

그쪽으로는 얼굴도 돌리기 싫을 텐데, 그들은 다시 한 번 돌아가기 위해 싸우기로 했다고 말한다. "청춘을 다 바친 이곳을 그냥 떠나기는 너무 억울하니까, 내 인생이 여기 있는데…" 투쟁이나 동지 같은 단어가 어색했던 그들이 투사가 된 이유는 그렇다. 그들은 비단 일자리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여기 내가 존재하므로 싸우는 것이라는 인간존엄의 서사를 들려주고 있다. 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응 파주의 시그네틱스에서 다시 일하는 거야"라고 함박꽃처럼 웃는 그 해사한 웃음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 자리를 빌어 <사람 꽃을 만나다>에서 만난, 그대들에게 감사를 바친다.

사실은 내가 빙벽에 갇힌 고래였어요. 살아남기 위해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나의 노동과 삶과 인생 모두를 바칠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에게. 숨구멍을 툭툭 두들겨 대는 모진 세월에 맞서지 못하고 노예로 살아온 우리들에게. 돌아갈 곳이 있는 그대들은, 사람 꽃으로 이미 피어 우리에게 위로를 줬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대들로 인해, 행복하게 되었습니다. 6월 1일 저녁 7시 아주대에서 그대들을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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