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 총선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야당이 주장하는 정권교체를 이루는 선거가 될 것인가? 아니면 2004년 미국의 대선 때처럼 가난한 서민들이 부자들의 정당 후보에 투표하는 자해행위 선거가 될 것인가? 어떤 선거든 선거 결과는 예측이 쉽지 않다. 더구나 가난한 다수가 소수 부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 후보에 투표한다면 그것은 예측의 범위를 넘는 불행한 이변을 초래한다.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바로 이런 이변이 일어났다. 이런 불행은 미국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에도 일어날 수 있으며 이것은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다. 그래서 대선 후 <캔사스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이변이 일어났는지 그 수수께끼의 답을 찾는 책이 나와 그해 베스트셀러가 됐다. 여기서 캔사스는 미국의 한 주(州)를 지칭한다기보다는 미국을 상징하는 지명일 뿐이다. 저자 토마스 프랭크가 캔사스 출신이었기에 어려서 자라며 보았던 진보 급진주의의 고장 캔사스가 어떻게 보수의 지지 보루로 변했는지 비교하기가 다른 지역보다 쉬워 택한 것이다.
▲토마스 프랭크의 <캔사스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
저자는 토마스 프랭크는 미국의 <네이션(The Nation)>, <하퍼스 매거진(Harper's Magazine)>, <월스트리트저널(Wall Street Journal)>, 프랑스의 <르몽드 디플로마틱(Le Monde diplomatique)>에 기고하고 있는 진보 언론인이며 시장 만능주의를 비판한 <하늘아래 하나의 시장(One Market under God)>, 보수 정권의 무능과 부패를 분석한 <난파선의 선원들"(The Wrecking Crew)> 같은 베스트셀러를 낸 작가이다. <캔사스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는 지난 8년 간 미국과 유럽에서 큰 선거가 있을 때마다 올바른 선거를 치르는데 정치인과 언론이 어떤 자세를 취해야할지 유권자는 어떻게 정당과 정치인을 평가해야 하는지 새롭게 각성하게 하는 참고서의 역할을 해오고 있다.
2004년 미국 대선의 이변, '캔사스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웨스트 버지니아주는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주의 하나로 꼽힌다. 1930년대 어려운 시절에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실시한 뉴딜 정책의 덕으로 기아를 면했다는 지역이다. 그래서 이 주(州)는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를 지지해 오던 곳이다. 2004년 대선에서도 그렇게 될 것으로 모두 예상했었다. 그러나 투표 결과는 부자들의 정당인 공화당 후보로 재선을 노리는 조지 부시 (대통령)가 56%의 득표로 웨스트 버지니아를 석권했다. 또 하나의 가난한 지역으로 알려진 캔사스에서도 같은 이변이 일어났다. 역사적으로 진보 운동의 온상으로 알려진 지역인데 여기서도 민주당 후보가 공화당의 부시에게 패했다.
전통을 깨는 이변이었다. 민주당은 노동자, 가난한 서민, 약자, 강자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의 정당이다. 그런데 민주당 지지층 서민들이 공화당 후보에게 투표한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 정당에 투표하는 것은 손해를 자초하는 자해행위다. 그러면 왜 수백만의 가난한 미국인들이 부자 정당 후보에게 투표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캔사스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보수는 어떻게 미국인의 가슴을 정복한 것인가?"
<켄사스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에서 프랭크는 미국 공화당이 오래 동안 백악관과 의회를 지배하기 위해 구사한 선거 전략을 분석한다. 헤리티 지재단을 거쳐 머독의 뉴스 코퍼레이션이 발행하는 주간 <위클리스탠다드(Weekly Standard)> 기자로 활동해서 보수의 내막을 속속들이 잘 아는 데이비드 브록(David Brock)가 <공화당 소음기계(Republcian Noise Machine)>란 책에서 폭로한 것과 비슷한 분석이다. 한국 보수 정당(새누리당)의 선거 전략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캔사스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에서 프랭크는 공화당이 민주당을 이기기 위해 구사한 주요한 선거 전략의 하나로 "가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슬로건을 지적한다. 공화당은 60년대 이후 보수 교회의 가치에 편승한다. 그래서 기독교 신자를 공화당 유권자로 편입시키는데 성공한다. 이 과정에 보수언론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공화당은 낙태 동성애 허용, 학교 내 기도 반대와 같은 이슈에 관해서 이에 반대하는 보수 교회와 행동을 같이 한다. 같은 가치를 내걸고 함께 행동하다 보면 보수 기독교 신자들은 선거에서 자연스럽게 공화당에 투표하게 된다. 한국의 나꼼수보다 더 거친 언어폭력을 불사하는 폭스 방송의 토크쇼 진행자들은 보수의 가치를 '전파'하는 전도사들이다. 기독교 보수 세력을 끌어들인 것은 보수의 큰 소득이다.
문제는 가난한 서민계층이다. 이들에게는 공화당의 정책이 그들의 이익에 배치된다. 공화당은 부자들의 정당이기 때문이다. 서민계층은 공화당에게는 선거 때까지만 필요한 장기의 '졸'일 뿐이다. 이들은 선거가 끝나면 공화당이 운전하는 큰 버스 뒷자리에 앉아서 버스가 가는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프랭크는 공화당이 가치를 내걸고 서민과 노동자를 속였다고 비판한다. 그렇지 않으면 노동자들이 자기 이익에 반하는 정당에 투표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보수의 가치 가운데서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보수 우익 이념이다. 이념은 정책의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여기에 가난한 서민을 위한 잣대는 없다. 서민층이 이런 사실을 알게 될 때는 이미 때가 늦은 다음이다.
투표하고 후회하는 '자해선거', 이제 그만!
한국의 보수정당도 크게 다를 게 없다. 특히 이념 문제에서 그렇다. 부자들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은 자본주의에 반하는 것이고 시장원리에 배치된다고 공격받는다. 한나라당이 복지를 내걸고 당명까지 새누리당으로 바꿨지만 재벌 체제를 개혁하려는 정책은 규탄 대상이다. 기득권의 이익을 희생한 복지정책은 '종북좌파'들의 발상으로 지탄받는다. 기득권의 나팔수 노릇을 하는 보수언론이 이념의 수호자로 등장한다. 보수의 허물은 가리고 서민들의 눈을 속이는 보수의 '성형수술의'로 변신한다.
보수정당은 기득권 보호가 존재이유이기 때문에 생래적으로 서민층의 이익을 대변할 수 없다. 한나라가 새누리로 이름을 바꿔도 생각까지 바꿀 수는 없다. 한 때 달아난 민심을 되돌리기 위해서 복지정책의 기치를 펼쳤지만 민주당의 자충수로 선거전망이 좀 유리해지자 복지의 기치를 내렸다.
선거전이 막판으로 치달으면서 보수의 본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야당을 '종북세력'으로 모는 '색깔 공세'가 날로 극성을 부리고 있다. 싸움의 형세가 불리해진다고 생각할수록 색깔 공세는 짙어진다. 깨질 것 같던 민주당과 통합진보당의 연합이 다시 봉합돼 야당 단일전선이 구축되자 새누리당의 색깔공세가 도를 넘고 있다. 여기에 조중동의 색깔론은 이들이 언론인지 새누리의 선전도구인지 의아하게 한다. 반세기 전 미국의 매카시즘을 능가한다는 느낌이다.
이제 유권자들이 정신을 바짝 차릴 때다. 정당의 색깔이나 이념이 아니라 어떤 당의 정책이 그들의 생활에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될 것인지, 새로 들어설 국회를 서민을 대표하는 국회로 만들 것인지 아니면 부자들을 위한 국회로 만들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유권자들의 몫이다. 보수 기득권의 보호자로 변신한 조중동과 정권의 선전도구로 전락한 텔레비전 방송의 뉴스도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이제 이들이 보도하는 뉴스가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따지고 거짓 뉴스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항의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투표를 잘못해서 자해(自害)선거 결과를 초래하는 일이 없도록, '캔사스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하고 후회를 하는 일이 없도록 경계를 늦추지 않고 투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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