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5년 제14회 전태일문학상 생활글 부문 당선작이다. 전태일문학상은 기존의 문학상과는 달리 '일하는 사람들의 문학'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1991년 전태일기념사업회가 만든 상이다. 그동안 전태일문학상은 시, 소설, 생활글 등 세 부문에 걸쳐 시상해 오면서 전문 문학인이 아닌 일하는 사람들도 평범한 일상의 삶을 주제로 글을 쓸 수 있다는 인식을 널리 확산시키는 역할을 해 왔다.
역대 수상자로는 현역 국회의원인 노회찬 의원을 비롯해 안건모, 맹문재, 이한주 등 다수의 시인, 소설가, 수필가들이 있다. 올해 수상식은 11월 6일 오후 4시 서울 중구 구민회관에서 열릴 예정이다.
이 글의 필자인 석연옥(37) 씨는 경북 달성에서 태어나 만화를 그리려고 서울로 올라와 같은 일을 하는 남편을 만나 두 아들을 둔 전업주부다. 남편은 현재 일용직 건설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편집자>
자정이 다 돼가고 있었다. 더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소주 한 병을 말없이 비운 남편은 드디어 결심이 섰는지 아이를 어서 재우라고 했다. 그러지 않아도 난 아까부터 아이를 재워보려고 계속 젖을 물리고 등을 토닥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아이의 까만 눈망울은 더욱더 초롱초롱해졌다. 할 수 없이 그냥 두고 가기로 했다. 한창 뒤집기와 배밀이를 하는 아이가 방바닥에 얼굴을 찧지 않도록 방 안 가득 이불과 요를 펴주었다. 아이는 마냥 신이 나서 양팔을 휘저었다.
나가기 전에 한 번 더 아이와 눈을 맞추었을 때, 아이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이의 천진한 모습을 보니 괜히 눈물이 나려고 해 얼른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 조금 있으면 아이는 울음을 터뜨릴 것이다. 엄마가 옆에 있으면 잘 놀다가도 눈앞에 안 보이면 금세 울음을 터뜨리는 애다. 아이가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울 걸 생각하니 칼끝이 스친 듯 마음이 아파 왔다.
하지만 남편도 나도 아무 내색 않고 묵묵히 새벽 한 시가 넘은 밤길을 걸었다. 5월의 향기로운 밤이라 다행이었다. 매서운 바람 몰아치는 겨울밤이었다면 아마 엄두도 못 냈을 거다.
집에서 2백 미터 정도 떨어진 어느 집 대문 앞에 나와 있는 장롱 두 짝을 발견한 건 그날 오후의 일이었다.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동네를 한 바퀴 도는 길이었다. 노란 동사무소 딱지가 붙은 장롱은 긁히고 흠은 나 있었지만 아직 멀쩡했다. 눈이 번쩍 뜨인 나는 당장 집으로 달려가 남편한테 일찍 오라고 전화했다. 그래놓고도 남편을 기다리는 저녁 내내 그 장롱이 달아날까봐 마음을 졸였다.
저녁상을 물리기가 바쁘게 나는 남편을 재촉했다. 남편은 내켜하지 않았다. 그래도 신혼인데 장롱만은 남의 걸 쓰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보란 듯이 새 장롱을 사줄 수도 없는 자신의 입장이 착잡했을 것이다. 말없이 소주만 마시고 있는 남편의 모습에서 그 심정들을 읽을 수 있었다.
난 다시 한 번 씩씩하게 남편을 설득했다. 뭐 어떤가, 훔치는 것도 아닌데 창피할 것 없다, 나중에 좋은 걸로 사면 되지 않느냐, 다소 과장과 흥분이 뒤섞인 그 말은 사실 나 자신한테 열심히 떠드는 말인지도 몰랐다. 그리하여 힘겹게 결정을 내린 우리 두 사람, 드디어 임무를 수행하러 집을 나선 것이었다.
어둠 속에서 장롱은 얌전하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장롱을 집까지 옮기는 게 문제였다. 장정 둘이면 족한 일인데, 아무래도 나는 별 도움이 못 되었다. 남편이 앞에서 들고 나는 뒤에서 받치는데, 손목이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았다. 신음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렇게 한 짝은 겨우겨우 집까지 갖고 왔지만, 두 번째는 영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남편이 등에 지고 나는 뒤에서 균형만 잡았다. 하지만 남편 역시 힘에 부치기는 마찬가지였다. 걸어서 5분도 안 되는 그 거리를 도중에 세 번이나 쉬고서야 집까지 왔다.
그렇게 장롱 두 짝을 일단 집 앞에 갖다 두고 한숨을 돌리니, 안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얼른 뛰어 들어가 아이를 안았다. 남편은 장롱이 들어올 수 있는지를 가늠해 보더니 얼추 될 것 같아 한 짝을 들였는데, 아슬아슬하게 문턱에 걸렸다. 현관문까지 아예 떼어냈지만, 장롱은 현관 입구에 딱 걸려 꼼짝할 생각을 안 했다.
아이는 다시 울어대는데 남편은 집 안에, 난 바깥에 선 채 장롱을 사이에 두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벌써 새벽 세 시였다. 할 수 없이 난 살금살금 주인집 대문으로 들어가 안방 창문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어쩐다? 아이를 달래 업은 나와 남편은 서로 마주보며 망연히 서 있었다. 도로 갖다 놓는 것도 이제는 안 될 말이었다. 최대한 말을 아끼며 고민하던 우리는 일단 날이 새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현관에 장롱이 낀 그 상태에서 우리는 두세 시간 억지로 눈을 붙였다.
남편은 같은 화실에서 일하는 후배한테 도움을 청했다. 고맙게도 그는 아침 일찍 달려와 주었다. 장롱은 현관과 쪽대문을 다시 빠져 나가 담을 돌아서 주인집 대문과 안방 창문을 통해서야 마침내 집 안으로 들어왔다. 남자 둘이서 하니 일이 척척 진행되었다.
겁 없이 시작한 신혼, 살아보니 무엇보다 장롱이 가장 필요했다. 혼자 살 때는 몰랐는데, 이불과 우리 두 사람의 옷, 거기다 아이까지 생기고 보니 미니 옷장과 서랍장만으론 절대적으로 수납공간이 부족했다. 하루 종일 정리만 해도 항상 방은 어수선했다.
남편이 하는 일은 돈과는 거리가 멀었다. 단돈 천 원도 함부로 쓸 수 없는 생활이었다. 웬만한 물건들은 자취할 때 쓰던 걸 그대로 쓰거나, 재활용센터에서 장만하거나, 때로는 남이 버린 걸 주워다 쓰기도 했다.
근데 장롱만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그날 뜻밖의 횡재를 한 것이었다. 나와 인연이 닿아 어렵게 집으로 들어온 그 장롱을 나는 닦고 또 닦았다. 그 안에 옷이며 이불이며 눈에 거슬리던 것들을 몽땅 집어넣고 나니 그제야 방이 반듯해졌다. 나는 흐뭇한 마음으로 장롱을 어루만졌다.
내 마음이 그렇게 흐뭇했던 것은 드디어 소원하던 장롱을 가졌다는 뿌듯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장롱으로 인해 숨어 있던 우리 두 사람의 장점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 장롱을 가져오기로 결정하기까지 온갖 마음의 갈등을 겪어야 했고, 또 막상 실행하는 과정에서도 난처한 일이 많았다. 누구라도 화가 많이 났을 상황이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평소에는 별 사소한 이유 갖고도 잘 싸우던 우리가 그날은 단 한 순간도 서로에게 짜증을 내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이 일로 해서 서로 상처를 받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까지 느낄 수 있었다.
누구 탓을 한들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오직 우리 두 사람만이 헤쳐 나가야 할 일이기에, 서로 묵묵히 최선을 다했던 거다. 그날의 소중한 경험은 비록 돈이 없어도 우리 두 사람이 마음만 하나로 뭉치면 앞으로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과 희망을 심어주었다.
시간이 흘러 그때의 젖먹이가 벌써 일곱 살이 되었다. 지하방을 벗어나 2층집으로 이사도 하고, 반짝반짝 윤이 나는 새 장롱도 장만했다. 이제 그날 밤의 일은 추억으로만 남았지만, 남들 다 자는 새벽에 어린 것 홀로 두고 묵묵히 장롱을 날랐던 그때의 삶에 대한 각오는 아직도 우리들 가슴에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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