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없는세상을 위한 희망버스를 기획했다는 이유로 기소된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불구속), 정진우 진보신당 비정규노동실장, 송경동 시인. 이들 세 사람에 대한 2차 공판이 2월 7일 오후 2시 부산지방법원에서 열릴 예정이다. 이들 세 사람 말고도 희망버스 승객 4명이 불구속 기소되어 공판이 진행되고 있다.
1년을 뜨겁게 달군 희망버스. 희망버스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송경동 시인과 정진우 실장은 현재 감옥에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희망버스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공판을 앞둔 가운데 지난해 함께 희망버스를 탔던 작가와 시인, 활동가들이 희망버스를 이야기하는 글을 보내왔다. 이들은 "이번 재판은 희망버스가 재판받는 것과 다름없다"고 했다. <편집자>
법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가령 누가 있어 도로 한가운데에서 우는 아이를 구한다 해도 도로교통법 위반만을 탓하는 것이 현실의 법이다. 아이를 구하기 위해 불가피하고,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는 현행법에 저촉된다 해도 해야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현행의 법은 알아듣지 못한다.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 '유권무죄, 무권유죄'인 세상이 특이한 현상이 아니고 지배적인 현실이다.
내 오랜 벗 송경동 시인이 갇혔다. 든든하기가 바위 같은 정진우가 갇혔다. 현행법은 이들이 아이를 구하기 위해 '감히' 도로로 뛰어든 죄를 범했다고 한다. 스스로 외롭고 아팠기에 세상의 아픔과 차별을 눈감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갇힘을 '안은 작은 감옥이요 밖은 큰 감옥일 뿐'이라는 수사로 덮을 수 없다. 이 말을 되뇌기에는 민주라는 이름의 지난 20년이 슬프고, 인권을 말해 온 우리 피땀이 허탈하기 때문이다.
송경동 시인이 비정규직 노동을 만난 것은 지역에서 함께 살아 온 기륭여성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이다. 매향리, 대추리로 이어지는 그의 불의에 대한 항거가 같은 지역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100일에 가까운 단식의 아픔을 외면할 재간이 있을 리 없다. 그의 본능과 같은 약자들의 고통과 저항에 대한 '함께함'은, 이기와 탐욕, 비겁과 비굴로 닫힌 시대를 깨고 희망의 길을 내는 노력이다. 그 노력이 길이 되었다. 그 길은 구로공단의 기륭에서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로 길어지고 넓어졌고, 그 길 위로 희망버스가 달렸다.
희망버스!
2011년 한 해 동안 우리 가슴은 두근거렸다. 절망 끝에서 울부짖는 눈물이 있었다.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절절한 저항 앞에서 '이기심으로 인내하라'는 현실의 장막을 참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올라탄 희망버스, 우리는 끝내 절망의 눈물을 기쁨의 눈물로 돌리는 기적을 만들었다. 강자가 독식하는 세상에서, 이기와 탐욕만이 무기인 세상에서, 선의와 연민으로 벽을 넘고 깨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났다. 그 아름다움은 내 안에 있었고, 우리 사이에 있었고, 전국 어디에나 있었다. 동토 밑에도 봄을 기다리는 새싹이 천지임을 확인했다.
이 희망을 만들기 위해 어린아이가 경찰이 만든 흉한 담을 넘어야 했다. 80 노인이 최루 물대포를 맞아야 했다. 선의를 품었다는 이유 하나로 노숙으로 날밤을 세워야 하는 가족이 있었다. 현장에서 숨죽인 이들이 불끈 쥔 쇠사다리가 있었고, 사람들 마음속을 흐르는 가는 물줄기를 모으고 모아 선의와 연민의 큰 강을 만든 이들이 있었다. 그랬다. 희망은, 여기 살아가고 지금 살아가는 모든 이의 것이었다. 우리는 우리 사회가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임을, 더더욱 그 사람이 주인 되는 사회로 가는 힘이 충분함을 확인했다. 그런데 이것이 죄란다. 그 대표 범인이 정진우, 송경동, 박래군….
송경동!
그 친구의 마음속에 든 외로움, 고독함, 답답함, 그리고 울부짖음이 다 우리에게는 가장 숨 막힌 순간의 숨통 틔우기였다. 송경동은 항상 절박하다. 숨이 반 발짝 빠르고, 요구가 반 발짝 앞서고, 생각과 행동이 또 그렇다. 그의 전망과 계획은 살아 있고, 새로움으로 자꾸 커간다. 그 가쁜 숨소리는 일반 사람에게는 급박하지만, 우리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겐 절절한 현실이다. 희망으로 가는 길에서 송경동이 거는 전화는 많은 이들에게 가슴 뜨끔한 부담이다. 거절할 수 없는 대의가 있기에 부담이고, 행동하라는 용기를 짜내기에 부담이다.
하지만 그의 '집요하다'는 '열정'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고립되어 아파 울고 있는 희망, 꺼져가는 잿빛 같은 희망만을, 발 동동 구르며 쳐다만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진실로 갇혀 있는 송경동의 죄는, 돈과 이기와 탐욕만이 주인인 우리 사회에서 선의와 연민과 용기를 냈다는 것, 이것이 시인의 죄다.
다시 말하지만 법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하다하다 안되면 법을 찾게 된다. 법이 혼란을 해결하는 어떤 기준이 되거나 법을 통해 진실을 판단하고 싶은 것이다. 여전히 우리 사회의 희망과 낙관이 그나마 인정되기를 바랄 뿐이다. 상식으로 말해보자. 생명을 구하기 위해 희생을 하는 이를 우리는 의인(義人)이라 한다.
송경동과 정진우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해 발꿈치가 으스러지고 가족과 강제로 이별하다 구속되었다. 천만 노동자를 살리기 위해 그들은 흔쾌히 자기를 헌신했다. 한 사람도 아니고 수많은 이들을 살리는 이 시대 의인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들을 의인이 아니라 범인이라 호칭하고 재판한다. 진실과 정의가 완전하게 거꾸로 선 세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송경동과 정진우는 그들의 삶으로 우리 사회에 선의와 연민과 창의적 용기를 호소했다. 이들을 가둠은 선의와 연민과 창의적 용기를 가둔 것이다. 이들의 구속은 민주와 인권과 사람의 존엄함이라는 이름 앞에 우리 사회를 능욕한다. 하지만 우리는 희망버스를 통해 절망에서 희망을 캤다. (그런데 이 글을 쓰는 지금, 김진숙 소금꽃이 세상의 희망꽃으로 피었다는 죄로 1년 6월이 구형되었다는 뉴스가 뜬다. 정리해고ㆍ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한 '희망 뚜벅이'를 일방 감금하는 경찰, 희망을 범죄로 단죄하는 검찰…. 우린 아직도 야만스런 세상을 살고 있다. 욕지기가 치민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포기할 수 없다. 절망의 법정에도 새로운 희망은 있다고 믿는다. 소금꽃도 희망버스도 또 다시 사법부라는 갈림길에 섰다. 그래서 요구한다. 재판부는 양심과 정의에 찬 사법부가 있음을 입증하라. 송경동과 정진우를 석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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