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증상이려니 했는데 길에서 쓰러지기까지 하여 동네 병원을 찾았다. X-ray를 살피던 의사는 대학병원인 서울아산병원으로 바로 가보라고 권했다. 서울아산병원에서 일주일 정도 입원하여 조금 나아져서 퇴원했다. 그러다 며칠뒤 또 나빠졌다. 병원 응급실을 찾았는데 곧바로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4월 18일 7개월짜리 아이를 강제로 출산시켰다. 아이와 산모를 모두 구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처였다. 산모 윤 씨의 증상이 더 나빠지자 병원에서 폐이식을 권했다. 남편은 고민 끝에 전화로 신청했다. 운좋게도 신청한 지 3일 만에 폐기증자가 나타났고 곧바로 수술을 받았다. 5월 7일이었다. 두달여 간 입원한 후 7월 초 퇴원했다.
호흡곤란이 주기적으로 반복되었고 고열이 찾아왔다. 그때마다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11월 10일에는 병원에 입원했다. 보름 뒤에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그 후로 40여일이 지난 1월 8일 일요일 아침,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오늘을 못 넘기실 것 같다.' (…) 그리고 수요일 오후 4시경 윤 씨의 호흡을 이어주던 기계가 '삐이' 소리를 내며 호흡이 끊어졌음을 알렸다." (환경보건시민센터 보고서 "'산모 환자'에서 '산모 사망'으로 바뀐 165번 피해 사례")
"가습기 살균제 사망자 10명? 50건이 넘는다"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폐가 손상되어 지난 11일 숨진 윤모 씨의 이야기다. 윤 씨는 임신 중이던 지난해 3월 초 폐가 딱딱해지는 섬유화 증세가 나타나 호흡 곤란을 호소하다 5월 초 폐를 이식받았다. 이후 면역력이 떨어지면서 11월 폐렴이 발생해 끝내 숨졌다.
윤 씨의 사망으로 질병관리본부가 확인한 가습기 살균제 질환 사망자는 모두 10명이 됐다. 그러나 이 수치는 환경보건시민센터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모임이 확인한 사망자 수와 큰 차이가 난다. 현재 166건의 의심 사례를 접수받은 환경보건시민센터가 확인한 사망사례는 50건이 넘는다.
윤 씨의 경우 작년 12월에 환경보건시민센터에 접수한 165번째 사례였다. 가족들은 폐이식 수술을 받은 후인 7월 초 질병관리본부 조사관이 집으로 찾아와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나' 등을 묻고 가자 특별히 시민단체에 알리지 않고 '대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에서 아무런 지원 대책이 나오지 않자 윤 씨의 아버지가 12월 환경보건시민센터에 전화해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알렸다.
▲ ⓒ환경보건시민센터 |
지난해 8월 31일 보건복지부가 산모 등이 폐가 점점 굳어 딱딱해지는 '폐 섬유화 현상'으로 사망한 원인이 가습기 살균제라고 발표한지 5개월 여가 지났다. 그 사이 가습기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한 환경보건시민센터에는 166건의 사례가 접수됐고 그중 46건은 사망 사례로 나타났다. 그러나 정부는 여전히 피해자들에 대한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8월 원인미상 폐질환의 원인을 가습기 살균제로 추정하면서 '사용 자제 권고' 조치를 내놨고 11월 4일에는 '가습기 사용중단 강력 권고' 조치를 내렸다. 시민단체와 피해자모임은 초기부터 가습기 살균제 강제수거 명령을 내릴 것을 촉구해 왔으나 정부가 이같은 조치를 내린 것은 11월 11일에 이르러서였다. 각 제조업체는 "8월부터 생산을 중단했다"고 해명했지만, 여전히 소매점 등에서는 11월 말까지 가습기 살균제가 유통됐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정부 핑계거리 만들려고 조사하는 거 같다"
질병관리본부는 현재 홈페이지에서 피해사례를 접수받고 있으며 <연합뉴스>에 따르면 폐손상 의심 사례 133건을 접수해 조사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은 "현재 질병관리본부의 태도는 굉장히 소극적"이라며 "피해 접수를 위해 전화해도 '홈페이지 양식에 따라 작성해서 보내달라'고 하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가 접수 받은 사례를 보면 노인 등 여러가지 이유로 인터넷이 불가능하거나 피해자 스스로 정형화된 신고 양식에 따라 말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며 "피해자들이 '우리에게 관심이나 있는 거냐', '우리가 연구대상이냐'라고 울분을 터뜨리는 이유"라고 전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인 안 모씨도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질병관리본부는 '우리는 이만큼 했다'고 핑계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절차를 밟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든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지난해 2월 임신 중이던 부인이 폐 질환으로 사망하면서 뱃속에 있던 둘째 아이도 함께 숨졌고, 첫째 아들도 간질성 폐렴 진단을 받아 투병 중이다. 또 본인도 가슴이 답답한 증상이 있어 병원에서 진단을 받을 예정이다.
안 씨는 "피해자들이 원하는 대책이 무엇인 것 같냐"고 되물었다. 그는 "가습기 살균제는 가족들이 함께 쓰는 것"이라며 "적극적으로 피해 사례를 확인하고 가족들에 대한 의료 검사를 통해 추가적인 피해가 없는지 확인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러나 그런 조치는 전혀 없는 채 각 개인이 알아서 자기 돈 들여가며 해야 하고 정부는 '자료'만 찾고 있는 모양새"라고 비판했다.
현재 정부는 가습기 피해자들을 위한 지원 대책 등은 내놓지 않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11월 국무총리실 산하에 관련 부처들이 모여 논의하는 TF를 꾸리겠다고 밝혔으나 이 자리는 가습기 살균제 뿐 아니라 유해화학제품을 사용한 생활 제품의 알려지지 않은 위험성을 조사한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자리다.
보건복지부 질병정책과 관계자는 지원 대책을 묻자 "보건복지부는 피해 양상과 역학조사 등을 담당하기로 하고 지원 대책 등에 대한 문제는 지식경제부 산하 기술표준원에서 맡기로 했다"고 넘겼다. 기술표준원 생활제품안전과 관계자는 "지식경제부에서 단독으로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며 "총리실 주관 TF에서 협의 중이나 아직 분명한 것은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보험도 안되는 폐 질환 치료에 1억 원…소송 비용은 어떻게 하나"
정부가 피해자들을 위한 지원 대책을 내놓지 않다 보니 피해자들의 제약업체 소송 준비도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최예용 소장은 "정부나 질병관리본부 모두 피해자를 위한 대책에는 관심이 없다"면서 "다만 '피해자들이 개별적으로 기업 상대로 소송해라'는 것이 정부의 태도"라고 비판했다.
지난 1997년부터 생산되어 연간 60만 개가 팔린 가습기 살균제가 다수의 사망자를 내는 사태가 벌어지기까지 정부의 관리 소홀의 책임도 크다. 보건복지부는 지난달 30일에야 가습기 살균제를 의약외품으로 지정했다. 정부는 그간 인체에 직접 흡입하는 가습기 살균제를 공산품으로 지정해 업체가 기술표준원에 등록만 하면 생산할 수 있도록 해왔다.
최 소장은 "이번 사태에 정부의 책임도 분명하지만, 생활용품으로 인해 국민 다수에게 특히 영유아와 젊은 산모에게 사망이나 심각한 질환 등의 문제가 생겼다면 설령 정부의 책임이 없어도 정부가 관심을 갖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니냐"며 "그러나 정부는 여전히 '개별적으로 소송하라'는 태도만 취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피해자들은 제조업체와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추진중이지만 이 역시 녹록치 않다. 피해자들이 제조업체와 법정 소송을 하기 위해서는 몇 년 전에 사용한 가습기 살균제의 카드 명세서나 영수증 등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것도 쉽지 않다. 또 쓰고난 살균제 통을 갖고 있는 경우도 적다.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폐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써온 가족들로서는 소송 비용도 부담이다. 지난 11일 사망한 윤 씨의 경우 지난 4월 입원한 뒤로 병원비가 4000만 원 넘게 나왔고 폐 이식 수술을 하면서 1억 원을 훌쩍 넘는 경비가 발생했다. 살균제로 인한 폐질환은 현재 희귀, 난치성 질환으로 등록돼 있지 않아 건강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
녹색소비자연대 녹색시민권리센터 등은 지난해 11월 가습기 살균제 피해에 대한 집단분쟁조정 절차에 돌입했다. 최예용 소장은 "현재 필요한 것은 '법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사회적인 해결책"이라며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는 누구나 입을 수 있는 것이었고, 누구에게나 위험한 상황이었던만큼 정부가 중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나서서 가해 기업으로 하여금 보상을 하도록 하고, 기금을 조성하도록 해서 사망 사례부터 가습기 살균제를 오래 써온 사람에 이르기까지 피해 사례를 폭넓게 조사하고 예방 조치도 취하는 것이 피해 특성상 맞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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