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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규장각 문제, 한건주의 때문에 15년간 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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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규장각 문제, 한건주의 때문에 15년간 난항"

[기자의 눈] 공수표 된 '9월 외규장각 도서 국내전시'

유럽과 미국을 순방중인 노무현 대통령은 11일 핀란드 헬싱키에서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중에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시라크 대통령에게 "프랑스가 갖고 있는 외규장각 도서 반환 문제가 두 나라 실무자들 사이의 협의를 통해 점차 진전되고 있다"며 "이 문제가 합리적이고 현명하게 해결될 수 있도록 좀 더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달라"고 말했다.

이에 시라크 대통령은 "이 문제가 쉽게 해결되기는 어렵겠지만, 두 나라가 모두 만족할 수 있는 합리적인 방안을 찾아보자"고 답했다. 외교적 수사로 점철된 발언에서 온도차가 묻어났다.

'일본-독도', '중국-백두산', 그리고 '프랑스-외규장각도서'

불과 3개월 전인 지난 6월 8일 한명숙 국무총리도 유럽 순방 중에 도미니크 드 빌팽 프랑스 총리를 만나 외규장각 도서를 언급하며 "협의 채널을 조속히 가동시켜 바람직한 방향으로 해결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촉구했다.

당시 국무조정실은 "또한 1866년 병인양요 때 빼앗긴 외규장각 문서를 오는 9월 서울로 가져와 전시회를 열기로 합의했다"며 "이는 빼놓을 수 없는 성과"라고 자랑하기까지 했다.

노 대통령의 발언이나 한 총리의 발언과 합의는 국내 언론을 통해 신속히 전파됐고 독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일본-독도', '중국-백두산'과 '프랑스-외규장각 도서'의 쌍은 그 내용이 무엇이건 간에 민족적 감성을 자극하는 아이콘이 된 지 오래다.

이런 까닭에 지난 1991년 이태진, 백충현 두 서울대 교수가 외규장각 도서반환을 요청하는 문건을 외교부에 제출하고 이듬해 7월 우리 정부가 프랑스에 이를 공식 요청해 이 문제가 처음으로 수면위로 떠오른 이후 양국 고위관계자가 접촉할 때면 외규장각 도서에 관한 언급이 빠지지 않았다.

하지만 양국은 15년 간 말 그대로 여전히 '협의 중'일 따름이다. 그 이면에는 현 정부까지 포함해 역대 정부의 '한건주의'가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양국 총리의 합의가 무색하게 9월도 중순으로 접어든 현재 외규장각 도서 전시는 물 건너간 상황이고 당국자들은 갈팡질팡하고 있다.
▲ 1866년 프랑스는 345권의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해갔다. 그리고 그 중 단 2권만이 1993년 TGV 도입의 대가로 국내에 돌아왔다.ⓒ연합뉴스

"그런 합의가 있었냐?"

먼저 주무부서인 외교부 구주국의 담당자는 "(도서전시는) 별로 진척이 없는 것으로 안다"며 "우리는 총리실의 지시를 받기 때문에 그 쪽으로 물어보라"고 공을 떠넘겼다.

국무조정실의 담당자는 "이 업무를 맡은 지 한 달밖에 안 돼서 잘 모른다"며 "그런 합의가 있었냐?"고 되물었다. 이 담당자는 "언론보도 등을 보니 그런 발표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며 "곧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 한국에 들어와 이 문제를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9월 전시는 힘든 게 아니냐?"는 물음에 "아시다시피 문화재 전시라는 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고 답한 이 관계자는 "왜 국무조정실에서 지난 6월에 '9월중 전시합의' 발표를 했냐?"는 질문에는 "뭔가 실무적으로 문제가 있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이 든다. 실무 협상을 담당하는 외교부 구주국이 자세하게 알 것"이라고 말했다.

"도서 전시 무산은 결론적으로 다행"

지난 1991년 외규장각 도서 반환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한 백충현 서울대 법대 명예교수는 "속사정이야 모르겠지만 외규장각 도서 전시가 안 된 것은 결론적으로 다행이다"고 말했다. 또한 백 교수는 지난 15년간 우리 정부의 대응에 개탄을 금치 못했다.

백 교수는 "지난 6월 한 총리가 도서전시에 합의를 봤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당장 외교부에 연락했다"며 "도서 '전시'라는 것은 프랑스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이고 이는 우리 정부가 프랑스 정부에게 휘둘린 것"이라고 지적했다.

백 교수는 "만약 외규장각 도서가 국내로 들어오면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내서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지 못하게 할 생각까지 했다"며 "이는 국제법적으로 문제가 없으며 프랑스 법원 역시 전시 목적으로 들어온 세잔느의 그림에 대한 국외유출 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인 전례가 있다"고 설명했다.

백 교수는 "1993년 미테랑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 TGV 판매에 몸이 달아서 영국이 이집트에 오벨리스크를 돌려준 전례를 따라 사실상 반환인 '영구임대'를 언급했는데 흐지부지 됐다"며 "그 이후 양국 정권이 바뀌면서 장기임대니 교환전시니 갖가지 수들이 나왔다"고 개탄했다.

백 교수는 "1997년에는 교환전시를 한다고 프랑스에 보낼 우리 문화재 리스트를 작성한다느니 하며 법석을 떨었는데 이 역시 프랑스에 우리 정부가 놀아난 것"이라며 "이런 수단들은 모두 결국 프랑스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이며 최근 한 총리의 전시 합의도 마찬가지"라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한건주의가 문제다"

이 문제에 대한 정부 자문역을 15년간 도맡아 온 백 교수는 "대통령이 바뀌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혼선을 빚고 똑 같은 것을 새로 질문한다"며 "무슨 위원회다 하는 데를 가보면 종교계, 언론계, 시민단체 등 그야 말로 각계 전문가들이 모여 있어 실제로 머리를 맞댈 수 있는 국제법이나 문화재 전문가는 몇 안 되는 상황"이라고 혀를 찼다.

백 교수는 "그간 정부는 자기 임기 안에 뭘 해보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일을 계속 그르쳐 왔고 별 진전도 없었다"며 "철저히 실리적이고 국제법적으로 접근하며 프랑스를 국제적으로 압박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백 교수는 "언론도 때만 되면 호들갑을 떠는 것은 마찬가지"라며 "같은 언론사에서도 사람만 바꿔가며 똑 같은 것을 묻곤 한다"고 일침을 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문제 있는 도서 전시 합의를 해놓고 '의미 있는 성과'라고 자랑했다가 "그런 적이 있었냐"고 되묻고 있는 우리 정부는 곧 프랑스 문화장관이 내한하면 또 "외규장각 문제에 대한 의미 있는 합의를 했다", "실질적 진척이 있었다"는 판에 박힌 설명을 내놓을 것이 뻔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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