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너무너무 반갑고 고맙습니다. 인사를 할 때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무대에 올라 힘찬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두 팔을 크게 뻗어 머리 위에서 흔들었다. 35미터 상공에 있던 그가 지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했던 인사법이었다. 300석 좌석을 가득 메우고도 모자라 계단까지 앉은 400여 명의 시민은 박수로 그를 반겼다.
309일 동안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 위에서 고공농성을 벌였던 김 지도위원이 19일 저녁 7시 서울 성공회대 피츠버그홀에서 '소금꽃 나무가 희망버스에게'라는 주제로 특강을 했다. 농성 이후 가진 첫 공식 행사 자리였다. 성공회대 노동대학이 마련한 특강 강사로 초청됐다.
김 지도위원은 아직 건강이 회복되지 않았지만 주변을 안심시키려는 듯 시종 웃음을 잃지 않았다. 김 지도위원은 "아직도 크레인 위에 있는 듯하다"며 "배에서 내려오면 땅이 흔들리듯이, 나 역시 크레인에서 내려온 뒤, 땅 멀미를 하고 있다"고 자신의 몸 상태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김 지도위원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주변의 관심에 부담을 느낀다며 "이 관심이 쌍용자동차 노동자에게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자신의 심경을 밝히기도 했다.
약 1시간 넘게 진행된 강연을 통해 김 지도위원은 지난 309일간의 고공농성의 소회를 밝혔다. 그러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희망버스', 그리고 앞으로 노동 운동, 아니 시민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아래 그의 강연 내용 전문을 싣는다.
▲ 김진숙 지도위원이 19일, 성공회대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프레시안(허환주) |
여러분이 나를 살려줬다
여러분 너무너무 고맙고 반갑다. 여러분이 우리 조합원을 살려줬고 나를 살려줬다. 사실 올라갈 때 기약이 없이 올라갔다. 그래서 엄청 좋은 카메라를 샀는데, 그걸 눈물을 머금고 다른 사람에게 줬다. 그게 유일한 주변정리였다. 크레인에 올라갈 때, 내려올 기약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거기서 여름은 어떻게 버텼느냐, 겨울은 어떻게 버틸래? 이랬지만 나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309일을 실감한 건 내려와서였다. 세상에. 내려와선 땅 멀미를 했다. 배에서 내려 땅을 밟으면 흔들거리지 않나. 땅이 그랬다. 사람들이 한눈에 확 들어오지 않았다. 누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런 게 엄청 당황스러웠다. 크레인 위니깐 멀리서만 사람을 봤다. 다들 정말 콩알만 했다. 버스도 내 발보다 작았으니 말이다. 다 정지돼 있거나 멀거나 그랬다. 그러다 그런 것이 이따만 하게 커지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309일이 만만한 게 아니었다. 크레인에 오르기 전엔 결혼한 사람이 내려오니 애를 낳았더라. 조합원의 아이가 100일이었는데, 내려오니 말을 배워 '진숙아' 이러더라(웃음). 엄청난 시간이더라. 작년에 샀던 올해 다이어리를 단 하루도 쓴 적이 없었다.
힘들기만 했다면 309일을 버티지 못했을 거다. 사실 309일은 매일매일 기적이었다. 4월 27일, 날라리와 김여진이 크레인에 왔다. 이 친구들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한진중공업 투쟁은 크레인에 올라갈 때 <부산일보>와 <국제신문>에서 보도한 게 전부였다. 하종강 등이 돈을 모아 <한겨레신문>에 광고한 게 전부였다. 그런데 김여진과 날라리가 왔다 가고선 기사가 쓰이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건 1차 희망버스였다. 사측은 희망버스가 6월 11일에 온다고 하니 10일 용역 깡패를 공장 내에 투입했다. (당시엔 조합원들이 공장을 점거하고 농성 중이었다) 공장 내로 들어오는 출입문은 3개였는데, 트위터를 통해 보니 먼저 첫 번째 문이 뚫렸다. 문을 막고 있던 조합원들은 용역에게 두들겨 맞고 사지가 들려나가고 그랬다. 그다음 정문이 뚫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문이 뚫렸다. 다른 문은 내가 있는 크레인 위에서 잘 안 보이는데, 동문은 잘 보였다. 거기서 봤다. 우리 조합원들이 용역에게 맞는 장면을 말이다. 그게 1차 희망버스 오기 전날이었다.
50년 평생 희망버스라는 건 처음이었다. 기자들이 막 물어봤다. 희망버스가 뭐냐고. 근데 내가 그거 알면 여기 있겠나 싶었다.(웃음) 누구도 설명해준 게 없었다. 나도 희망버스가 온다는 걸 트위터를 통해 알았다.
노조 운동을 30년 했다. 하다 보니 처음엔 안 그랬지만 무슨 대회를 연다고 하면 중앙에서는 지침을 내린다. 2000명이 있는 조직은 얼마 와라, 몇 명 있는 조직은 몇 명 와라. 이렇게 한다. 그리곤 간부들만 매번 참여한다. 집회에 오면 위원장이 대회사를 한다. 경과보고도 해야 한다. 그러면 조합원들은 앉아서 담배를 태우고, 김장 잘했나 이런 이야기를 한다. 율동하고 규탄사하면 끝난다. 그럼 왔던 버스 타고 간다. 이게 전부였다.
다 아는 건데 희망버스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유령버스였다. 나도 모르고 적도 모르는 희망버스가 11일에 왔다. 크레인에 오른 지 157일 차였다. 솔직히 난 숫자 129와 60이 두려웠다. 크레인에 오를 때 가장 무서운 숫자는 129였다. 똑같은 상황에서 김주익 지회장이 크레인에 올라 목을 매달은 날짜다. 60은 마지막으로 김주익을 보고 간 사람의 숫자다.
고공농성을 하는 와중에도 조합원의 숫자는 줄어들었다. 내가 버틸 수 있는 마지노선은 60명이었다. 이게 내 머리에는 주문처럼 박혀 있었다. 매일 하면서 두려웠다. 그런 내게 157일 차 희망버스가 오면서 이런 숫자는 넘어갔다.
영도대교를 넘어 촛불을 들고 희망버스가 왔다. 공장은 용역이 점거했기에 공장 정문 앞 도로에서 김진숙을 연호하더라. 영화의 장면 같았다. 나는 사실 그걸로 끝인 줄 알았다. 공장으로 들어오지 못할 줄 알았다. 그런데 공장 내에 있던 조합원들이 사다리를 들고 공장 벽 쪽으로 달리더라. 그때까지도 '점마들'이 뭘 하려는지 몰랐다. 그 사다리를 타고 벽 위로 올라가선 희망버스 참가자들을 사다리에 태워 공장 내로 들여보내더라. 그걸 보면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구나', '우리 조합원이 상당히 머리가 좋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에게도 여러분에게도 잊히지 못하는 장면이다. 그렇게 승객들이 담을 넘어 공장에 들어가 안에 있던 용역들을 몰아냈다.
그렇게 힘들게, 157일 만에 1차 희망버스가 왔다 갔다. 가는 날 다들 울었다며? 난 위에 있어서 잘 몰랐다. 나중에 영상을 보니 다 울고 있더라. 소 같은 조합원들도 눈물을 흘리고 있더라. 사실 조합원 입장에서는 이들이 가면 무슨 일이 있을까 걱정했을거다. 나도 잘 가라고 인사했지만 인간인지라 불안했다.
하지만 그렇게 1차 희망버스가 가면서 나에겐 어렴풋하게 희망이 생겼다.
나를 버티게 해준 트위터
트위터는 내가 농성을 하면서 나를 버티게 해준 존재였다. 처음 트위터를 통해 고구마를 좋아한다고 이야기를 하자 고구마가 크레인에 왔다. 처음 크레인에 온 존재는 사람이 아니라 고구마였다.(웃음)
트위터를 통해 알게 된 많은 사람이 있었다. 특히 기억나는 건 핀란드 지휘자다. 크레인 위에 있으면서 받은 하루 벌금은 100만 원이었다. 이걸 풍자해서 트위터에 하루 100만 원짜리 펜트하우스에 산다고 올렸다. 그러자 핀란드에서 지휘자로 일하는 분이 내가 자기와 생활 수준이 비슷한 줄 알고 '굳모닝' 하며 말을 걸었다.
난 그분이 한국분인 걸 알고 김치를 보내줄까, 뭘 할까 하면서 나 역시 말을 걸었다. 근데 나중에 그분이 나의 상황을 알고 나서는 도대체 이해하지 못했다. 크레인 위에 있는 사람이 김치를 보내준다고 하니 말이다. 급기야 핀란드에서 비행기를 타고 크레인에 왔다. 그리곤 2주 동안 크레인 밑을 빙빙 돌았다. 이후 일본 출장을 갔다가도 크레인을 들렀다. 이런 식이었다. 진짜 깨알 같은 마음이 모였다.
이런 분들뿐만 아니라 새로 연애를 시작하는 분들은 크레인 아래에서 결의를 다져야 우리가 영원할 거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붙여서 왔다.(웃음) 트위터를 통해 엄청난 일들이 벌어졌다. 실제로 투쟁이 끝나니 크레인을 통해 커플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나는 죽을 둥 살 둥으로 올라갔는데 이것들은 연애를 하다니…(웃음). 무수한 일이 일어난 게 크레인이었다.
노사 집행부와 회사가 기만적으로 합의안을 발표한 뒤엔 완전히 고립됐다. 아무도 크레인으로 접근하지 못했다. 6월 27일에는 전기마저 끊겼다. 끌려 나가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게 전기가 끊기는 것이었다. 회사는 크레인 주변의 전기까지도 다 끊었다. 안 그래도 고립된 상황에서 전기가 끊긴다는 건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절망감을 줬다. 무엇보다도 트위터를 하지 못하는 게 답답했다.
크레인에 올라와 처음 트위터를 시작했다. 황이라 동지가 트위터를 하라며 스마트폰을 올려줬다. 난 당연히 설명서가 있을 줄 알았다. 근데 아무리 찾아도 설명서가 없었다. 물어보니 설명서는 없다고 했다. 설명서도 없는 걸 어떻게 하나 싶었다.
트위터 계정 이후 더듬더듬 시작했다. 하다 보니 재미가 있었다. 트위터를 통해 김여진을 만났고 핀란드 지휘자를 만났다. 기자들에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느냐고 물어보면 아침에 일어나 책을 보고 생각도 좀 하고 그런다고 말했다. 하지만 다 뻥이다. 계속 트위터를 했다.(웃음) 회사에서 막아 책을 올려주지 못했다.
그런 내게 전기가 끊겼다는 건 세상과 끊긴 걸 의미했다. 그 상황을 설명하긴 힘들다. 절망적이었다. 나도 나지만 밖에서도 답답해했다. 크레인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니 말이다. 밖에서는 스마트폰 배터리를 엄청나게 사서 촬영 헬기에 띄어 보내는 것도 고민했다고 한다.
여러 자구책 끝에, 대용량 배터리와 태양열 배터리를 식빵 안을 파서 그 안에 넣어 보내기로 했다. 식빵을 판 부분은 식빵 마개로 막고 본드를 붙였다. 용역이 장악한 정문 앞에서는 밖에서 식량이 들어올 때 금속탐지기로 일일이 다 검색했다. 자기들 말로는 밥에 볼트를 섞을까 그런다고 했지만 사실 배터리를 찾으려고 그랬다.
다행히 그 식빵은 용케 들어왔다. 하지만 전화가 도청되기 때문에 크레인 위와 밖에서의 소통이 제대로 안 된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작은 문제가 생겼다. 밖에서 본드 붙인 식빵이라며 먹지 말라고 우회적으로 돌려서 말한 걸 난 못 알아들었다. 그래서 이게 얼마 만에 먹는 빵이냐며 맛있게 먹었다. 본드를 붙인 식빵 마개 부분은 쫄깃쫄깃하길래 잼을 넣은 줄 알았다. 근데 먹다 보니 빵 안에 배터리가 있더라.(웃음)
ⓒ프레시안(허환주) |
내년 총선 때까지 생각했던 고공농성
6월 27일 이후부터는 매일 용역과 싸웠다. 용역은 매일 계단 위로 뛰어 올라왔다. 회사는 크레인은 언제든 끌어갈 수 있게 준비해놓았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페트병에 오줌을 넣어서 올라오는 용역에게 던졌다. 근데 용역이 그걸 무척 싫어했다. 나중에는 물을 비닐봉지에 넣어서 올리도록 했다.
크레인에 올라올 때 볼트를 한 가마니나 올렸는데, 거의 다 썼다. 이런 이야기를 밖에서는 불안해 할까봐 이야기하지 않았다. 크레인을 끌고 간다고 할 때는, 어떻게든 막으려고 크레인 위 붕대에 올라가겠다며 난간에 매달리기도 했다.
장비를 동원해 그물을 치기도 했다. 곽재규가 몸을 던진 도크에까지 그물을 다 쳤다. 역시 난간에 몸을 매달려 그걸 막았다. 그거 말곤 수단이 없었다.
그렇게 싸웠다. 그래서 올해 안으로는 못 내려 올거라 생각했다. 노동대학에서 강연 요청이 들어왔을 때도 어차피 못 내려오니깐 승낙한거다. 그간 크레인 위에 있을 때 여러 군데에서 강연 요청이 들어왔었다. 올해 1월, 전교조에서 7월에 강연을 해달라고 요청했었다. 그 전에는 내려오겠지 싶었던 거다. 하지만 다 연기됐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내년 총선 때까지 생각했었다.
309일 만에 기적을 만들었지만 아직 난 크레인 위에 있는 거 같다. 입원하고 있는 병원에 전기장판이 선물로 들어왔다. 그걸 보고는 '어머 이거 크레인에서 쓰면 좋겠다'며 올릴 생각을 나 스스로 하더라. 누가 호박죽을 가져왔는데, '이걸 어디에 두라고 가져왔지?' 이러더라. 땅 멀미가 해결되면 다 될거라 생각했는데 안 되더라. 내려온 후, 처음으로 어제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문을 닫는데 어느 화살표를 눌러야 할지 고민했다.
병원 안에서는 길을 잃어버려 거의 미아가 됐다. 내가 이런데 30~40년을 징역 사는 장기수들은 어떻겠나. 물건을 사면서도 돈 내는 법을 모르더라. 난 목하고 허리 때문에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다. 크레인이 굉장히 좁아 계속 쪼그리고 있었는데 그것의 부담이 지금 나타나고 있는 듯하다. 긴장이 풀리고 나니깐. 거기다 크레인 위에서 보낸 겨울은 96년만의 추위였다. 크레인 위에서는 감기에 안 걸렸지만 내려와서 감기에 걸렸다. 내려와서 더 힘들다. 다시 올라가고 싶지만 회사에서는 85호 크레인을 없앴다.
회사에서는 내려오니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고 한다. 'CT85'라고 적힌 푯말부터 땠다고 한다. 그걸 무당이 말하는 곳에 묻고 굿을 했다고 한다. 우린 더 용한 무당 불러서 그거 어디 있는지 알려달라고 굿을 하려 한다.(웃음) 더 웃긴 건 사장이 천주교 신자라고 하더라.
회사는 2003년의 129일과 지금의 309일을 합한 날을 가지고 이래저래 계산을 하고선 무당에게 날을 받아 그 날짜에 맞춰 크레인을 해체했다. 내가 내려오자 크레인을 바다로 끌고 갔는데 무당이 거기서 해체하지 말고 원래 있던 자리에서 하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 회사도 엄청 상처를 입은 것이다. 2003년에 실패한 이후 8년을 절차부심해 노동조합을 깨려했지만 실패했으니 말이다.
우리에겐 너무나 행복한 싸움
나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투쟁은 우리에겐 너무나 행복한 싸움이었다. 기적 같은 싸움이었고 우리 모두의 마음이 만든 싸움이었다. 인터뷰에서 '다음 희망버스는 어디로 가고 싶나'라고 물을 때, 내가 운전할 수 있다면 쌍용자동차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IMF 위기 이후 정리해고 싸움은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 한진중공업 문제에 여러분의 마음을 모을 수 있던 건 그런 울분이 있어서라고 생각한다. 쌍용차에 마음이 안 모이는 건 쌍용차 싸움이 패배한 싸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패배의 기억이 있지만 쌍용차는 아직 진행 중이다. 복직 대기자가 있다. 상용차의 경험이 한진중의 승리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쌍용차의 아픔 때문에 다시는 이런 게 반복될 수 없다는 마음이 한진중공업으로 왔다고 생각한다. 나도 절박했다. 그런 마음이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한다.
쌍용자동차 노동자가 옥쇄파업을 할 때, 민주노총이 정문을 뚫고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게 너무 마음이 아프다. 희망버스를 만든 마음이 김진숙에게 모이길 원하지 않는다. 나는 제일 싫어하는 게 정치인과 기자였다. 사실 크레인에 올라가기 전에는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 올라가니 내가 답답했다. 어떻게든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터뷰를 <스포츠조선>과도 했다. 아마 내 인생의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웃음) 나와 타협했다. 아픈 경험이었다.
내려와서 내게 플래시가 터지는 게 부담스럽다. 병원에서 지내는 건 몸의 건강도 건강이지만 우리 조합원들, 날라리, 희망버스 등 그런 하나하나의 마음들이 다른 소중한 곳으로 모였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분야를 떠나서 밝은 세상을 만드는 힘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무엇보다도 송경동과 정진우가 감옥에 있다. 어제 미국에 있는 분이 트위터로 '김진숙 씨가 송경동에게 관심이 없는 거 같다'고 했다. 너무너무 가슴이 아팠다. 그가 구속영장을 받고 연행될 때 잠을 자지 못했다. 차라리 우리가 갇혀 있으면 좋은데, 그게 맞는데 그들이 갇혔다. 어떻게 가슴이 안 아프겠나. 하지만 함부로 말을 꺼내지 못하겠다. 그 두 분이 아직도 계시고, 대한민국은 아직도 이명박이 대통령이다. 여전히 천민자본주의가 지배하고 있다. 그걸 없애기 위해 희망버스가 달려야 한다. 우리를 위해서.
희망버스 참가자 중 가장 감사하는 분은 '나는 집회하는 사람 혐오했다. 근데 희망버스를 타보니 왜 노동자가 싸우는지 알게 됐다' 이렇게 말하는 분이 너무 감사했다. 이건 여러분이 만드는 거라 생각했다. 현장에서 다시 뵙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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