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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이나 2011년이나, 이 지옥같은 노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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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1986년이나 2011년이나, 이 지옥같은 노동은…"

한국비정규노동센터 <2011년 비정규노동 수기 공모전> 당선작

900만 비정규노동자들의 육성을 통해 비정규직 문제의 본질에 한 발 더 다가서는 계기를 만들고자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서는 <2011 비정규노동 수기 공모전>을 진행했다. 응모한 원고는 총 40편이었고, 우리 사회 다양한 직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아픔이 다각도로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중 '1986년이나 2011년이나, 이 지옥 같은 노동은…'은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이 승리했음에도 아직 최종적으로 오지 않은 승리를 위해서라도 "투쟁을 하고 노동을 하고 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경험한 글쓴이의 "현장 취업" 체험기이다.

여기서 글쓴이는 "1986년이나 2011년이나 다를 것 없는" 노동 현장을 고발하는 차원을 넘어 "고용불안은 결국 노예 노동을 견디는 강요과정"이라는 것과 노동 시간이 아직도 컨베이어 벨트로 상징되는 자본의 시간에 "자발적인 외형을 띤 강제"로 종속되어 있음을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간파해 냈다. 비록 미려한 글은 아니지만, 값싼 세련미를 넘어선 통찰력이 돋보인 글로써 심사위원 전원 동의에 의해 당선작으로 선정되었다.

글쓴이는 "자꾸 열악해지는 중소영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우리들의 모습이 여전히 슬프기만 하다"며 "노동이 즐거움이 되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고 당선소감을 밝혔다. 아래 당선작을 싣는다. <편집자>


공장을 다니다가 노조를 만들고 해고를 당한 후 어린이 집 원장을 했다. 공동체 어린이집이었는데 아이들이 커서 유치원이나 초등학교를 진학하면서 쓸모가 작아져 다시 공장에 갔다. 그곳이 바로 기륭전자였다. 3개월 수습만 지나면 정규직이 되던 시절이 지나고 들어가서 공장을 나올 때 까지 영원한 수습 직으로 살아가는 비정규직만이 있는 취업 길이었다.

들어가서 채 3개월도 안되어 나는 토요일 특근하고 퇴근하는 길에 버스 안에서 핸드폰 문자로 해고를 당했다. 그리고 1895일, 나는 거리에서 농성으로 단식으로 눈물만 가득한 세상을 견뎌야 했다.

우리의 투쟁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고용한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승리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승리는 바로 다가온 현실이 아니다. 1년 6개월 뒤에 오는 승리다. 그 기간 우리는 투쟁을 하고 노동을 하고 생활을 해야 했다. 그래서 나선 것 중 하나가 현장 취업이었다. 현장에 취업해서 지난 5-6년간의 현장의 변화를 체득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맛보자는 것이다.

내가 들어 간 곳은 00전자다. 독산동에 있는 50명 쯤 되는 회사다. 00전자는 핸드폰 케이스를 조립하는 회사다. 이른바 가족 회사인데 사장과 그 부인과 사장의 친척 중에 하나로 보이는 이모님이라 불리는 이들이 경영관리를 하고 있다. 이들은 작업장 맨 뒤에서 시험 보는 아이들 감시하는 선생처럼 살피다 컨베이어 벨트를 조절한다.

00전자의 근무시간은 아침 9시에서 출근하여, 저녁 6시에 퇴근한다. 하지만 이렇게 정시에 끝나는 경우란 거의 없다. 근무시간은 부품이 떨어지는 때까지다. 그러니 울퉁불퉁하다. 누구도 오늘의 잔업시간을 예측할 수 없다. 입사해서 퇴근시간이 다 되어 동료에게 물었다. "오늘 잔업 있나요. 몇 시까지 해요?" 했더니 "여기는 그것 아무도 몰라요. 사장님만 알아요"

한 시간 반이 넘게 컨베이어가 쉬지 않는다. 7시30분이 돼서야 빵이 지급된다. "빵 잔업"이다. 결국 잔업은 일이 끝나야 끝나는 식이다. 잔업 할 때 제공하는 식사도 불규칙하다. 대개 2시간 잔업이면 그냥 저녁을 건너뛰고 연속 잔업을 한다. 2시간 이상 3시간 정도의 잔업이면 빵이 제공되고, 3시간 이상이 되어야 밥을 준다. 그래서 이 공장에서 잔업은 "잔업, 빵잔업, 밥잔업"으로 나눠진다. 그렇게 일을 해봤자 150만 원 이상을 받은 이가 없는 공장이다.

00전자는 매주 월요일에 조회를 한다. 빨리 작업하라. 불량 내지마라. 조립과정에서 누락하지 마라 누락 2개면 당장 회사 그만두고 집으로 가라는 말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이런 식의 다그치는 말은 일상적으로 진행된다. 작업 도중에 "집합"을 외친다. 누군가 불량을 내고 누락을 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조회 때처럼 모인다. 그날은 납품 회사에서 불량을 팩스로 전해 온 것이다. 우선 검사하는 이들을 다그치고 누락이나 불량이 나면 다시 수리 조립하는 것이 아니라 출근부 앞에 전시를 하여 여러 사람에게 경종에 되게 한다는 것이다.

작업 중에 불량이 발생하면 쉬는 시간이나 식사시간에 그것을 수리하여 채워야 한다.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불량 분을 관리자가 가져다주며 일을 하라는 것이다. 컨베이어가 돌다 보면 밀리고, 그러면 작업이 지체되어 쌓인다. 그러면 정체된 분량도 쉬는 시간이나 식사시간에 채워야 한다. 그러다 보니 일부 사람들은 컨베이어 속도에 딸리지 않기 위해 알아서 쉬는 시간에 미리 작업을 한다. 이 기가 막힌 현실에 내가 이전에 다녔던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은 어느새 옛날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손이 빨랐다. 그래서 어떤 공장을 가도 작업량이나 속도로 구박을 받은 적이 없다. 오히려 항상 칭찬을 받는 편이었다. 기륭전자 비정규직 때에도 나는 적어도 일이 밀리거나 딸린 적이 없다. 그래서 내가 작업의 첫 라인에 위치하면 사람들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00전자에 들어와서 난생 처음으로 컨베이어 속도를 따라잡기 어려웠다. 대단한 노동속도와 강도에 정말 내가 나이가 먹어 그런가 하는 한탄을 했다. 이런 자발적인 외형을 띈 강제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것에 당황했다.

당황한 채 돌아보니 공장은 옛날의 공장이 아니었다. 00전자의 생산직 노동자의 70%가 이주노동자들이었다. 특히 중국 동포 노동자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처음부터 악화된 노동조건을 정상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도록 훈련된 이들이었다. 그들은 정신없이 일을 하면서도 또 정신없이 떠든다.

그런 모습이 예전의 우리 모습이라서 흥미롭게 지켜봤다. 사장과 관리자들은 떠드는 것을 싫어한다. 일에 집중하지 못하여 물량이 덜 나온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로 "조용히 일해"라고 외친다. 그러면 조용해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수다기운이 일어난다. 그래서 쉬지 않고 "조용히 해"라는 말을 귀에 달고 일을 해야 했다.

어느 날은 유난히 컨베이어벨트가 아주 천천히 돈다. 웬일인가 했더니 납품 업체에서 감독이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규정 속도로 일을 시킨다고 한다. 일의 양이 거의 1/3수준이다. 그런데 감독이 있는 순간에는 쉬지 않고 일을 해서 정기적으로 쉬는 시간인데도 쉬지 못했다. 참으로 더러웠다.

결국 감독이 떠난 후에야 잠시의 휴식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그날만 불규칙적으로 휴식 시간을 가진 것이 아니다. 쉬는 시간 전후에 정해진 일감이 있고 부품이 있다면 그것을 다하고 나서 쉰다. 그러니 30분, 한 시간씩 휴식 없이 일을 한다. 대강 휴대폰 모델을 바꾸기 위해 잠시 짬이 나는 시간을 휴게시간이라 하며 부여한다.

일도 그렇다. 일이 많으면 특근 잔업이지만 가끔 부품이 떨어지면 바로 귀가 조치한다. 일종의 조퇴 조치다. 주 5일제라고는 하지만 토요일 근무는 의무적으로 강제한다. 이런 강도다 보니 국내 노동자들 중 이 회사를 견디는 이들이 드물다. 매일 사람을 뽑고 매일 사람이 그만둔다. 그러다 보니 회사는 웬만하면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는다. 바로 그만 둘 사람들에게 일당이나 2-3일치 일급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고 밖에 이해할 수 없다.

00전자는 파견 노동이 아니다. 기륭은 파견 노동이었다. 그래서 고용불안은 덜했다. 왜냐면 자기가 견디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나 불규칙적이고 강한 노동 강도 때문에 국내 노동자는 거의 견디지 못한다. 고용불안대신 지옥 같은 노동의 고통을 견뎌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중소 영세업체에서는 정규직, 비정규직 따질 것 없이 엄청난 장시간의 노동과 사람이 견딜 수 없는 노동 강도를 강요당하고 있다. 스스로 몇 달을 견딜 수 없으니 1년 2년 고용계약 기간이 뭔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 고용불안은 결국 노예 노동을 견디는 강요과정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상하고 낯선 것이 있었다. 50명 정도니 사장 등은 마치 큰오빠가 막내 동생 혼내듯 정이 가득한 듯이 지적한다. 하지만 그 내용은 아무런 권리 없이 의무만 지는 노동을 수용하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노동 강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거기서 기륭전자에서 만났던 노동자를 다시 만났다. 기륭전자에서 정규직으로 일을 하면서 손 빠르고 일 잘한다고 소문이 났던 친구였다.

하지만 그 친구도 일주일을 못 견디고 그만두었다. 그때 그 친구가 한 말은 "언니 나 여기서 도저히 컨베이어 속도를 맞출 수 없어. 견딜 수 없어요"였다. 나도 일의 강도를 견디지 못해 몸이 아팠다. 견디고 일을 했지만 보기에 도저히 안됐다고 봤는지 사모가 와서 일찍 퇴근해서 병원을 가라 한다.

사람이 견딜 수 없는 공장, 그리고 작업이 죽음에 이르는 현장. 아직도 세상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내가 맨 처음 공장에 간 것은 1986년 라면을 만드는 삼양식품이다. 그때는 주야 맞교대였고 참으로 봉건적이었는데 그때 노동이나 지금 노동이나 도대체 구별할 수 없는 지경이다. 20년을 넘게 나름 좋은 노동을 위해 일을 했는데…. 참 서러웠다.

우리가 나이가 든 걸까? 이놈의 세상이 사람을 기계보다 더 강력하게 여기고 다그치는 것일까?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의 설움에 저항했지만 그사이 우리 시대 공장 현실은 이주노동자들의 설움과 눈물과 고통 속에 더욱더 악화되어 있었다. 일이라는 것이, 그래 경제라는 것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어떻게 돈 때문에 사람을 다 죽이는 것이 됐는지 정말로 억울하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별도 없이 하루하루를 견뎌야 하는 공장, 참으로 깜깜했다. 1986년이나 2011년이나 다를 것 없는 현장, 정말 나로서는 견딜 수 없는 노동 강도, 여기에 이미 적응한 노동자나, 휴식시간이나 식사시간을 희생해야 하는 노동자의 현실을 보면서 오랜 투쟁, 일상적인 연대 투쟁의 피로에 투덜대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장기 투쟁보다 더 고된 노동의 현장을 보며, 그 현장의 고됨에 적응하지 못한(?) 내 모습을 돌아보며 함께 환하게 웃는 세상을 위해 우리는 얼마나 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인지…. 희망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살아 있는 것인지. 하지만 내가 기륭투쟁을 통해 배운 것이 있다. 희망은 포기하지 않는 이들의 몫이라는 것을.

▲ 농성장으로 밀고 들어오던 포클레인을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꽃상여로 꾸몄다.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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