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작년 여름쯤 대학을 가지 않을 거란 이유로, 다니던 인문계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체제에 순응하는 조용조용한 사람으로 18년을 살아왔는데, 얼떨결에 "체제에서 벗어나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일주일 후에 나는 이미 자퇴계를 냈다. 그 이유는 지난 1년 동안 대충 '우연'이라고 생각을 해왔는데, 입시거부를 준비하면서 그때의 선택은 어쩔 수 없는 '필연'이었구나 싶다. 명확한 이유가 여러 개 있긴 있었다.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고3 수험생'이 된다는 것은 조금씩 다가오는 공포였다. 1학년에서 2학년이 된다는 것은 고3이 이제 1년밖에 안 남았다는 이야기고, 이 사실에 나와 내 친구들은 온몸을 떨면서 두려워했다. "꺄악! 내년에 벌싸 고3이야?" 누구나 다 겪는데, 뭘 두려워하냐며 면박을 주던 교사의 말을 위안으로 삼았다.
'그래, 누구나 다 겪는 일인데, 두려울 게 뭐 있어?!' 위안되는 말들을 찾으려고 나와 내 친구들은 인터넷에 떠돌던 여러 가지 명언 비스무리 한 것들을 책상에 옮겨 적었던 것 같다. "no pain, no gain(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 우리의 고통을 미래의 기약 없는 '얻는 것(gain)'으로 위안해보려고 했던 것 같다. 우리의 고통을 보상받아보려고, 어떻게든 인정받아보려고 아등바등했던 것 같다.
그렇게 해도, 두려운 건 두렵다. 텔레비전에서는 "대학을 나와도 취직이 되지 않는다. 고학력 고실업 시대다"라고 떠들어 대는 동시에, '개천에서 용이 난' 거의 불가능한 성공신화를 얘기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어서 신화의 주인공이 되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우리들은 무기력하게 계속 두려움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때쯤 생각했던 것 같다.
"대학을 가야만 할까, 고통 없이 얻어 가면 안 될까?"
이렇게 시작된 생각들이 좀 더 구체적으로 "내가 등록금 4000만 원을 뽑아낼 수 있을까?"로 이어졌다. 누군가 작심은 순간이라고 했다. 적당한 기업에 취직해서 4000만 원을 토해낼 자신이 없는 나는 "대학을 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퇴를 하게 되었다.
대학가신 여러분들이 더 용기 있는 선택을 하신 겁니다
사실 나에겐 대학 거부가 필연일 수밖에 없는 게, 4년제 대학을 기준으로 보면, 경기도 외곽도시에 사는 우리 집이 내가 대학을 나오기 위해서 토해내야 하는 돈이 넉넉잡아 5000만 원, 내 동생까지 하면 1억 원, 우리 집을 탈탈 털고 털어야 나오는 돈이다(!).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학자금 대출도 일정 성적 이상이 되는 학생들만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하루하루 '수능'에 대한 두려움으로 살아가던 고등학생 시절을 '명문대'에서 '대기업'으로 목표만 바꾼 채 똑같이 되풀이 하면서 충실히 성적을 낼 자신이 없는 나는 학자금 대출을 이용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당연히 대학을 갈 수가 없다.
갈 수가 없고, 갈 이유가 없어서 '가지 않겠다!'라고 선택을 한 건 나에게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용기있다', '대단하다'라는 반응들이 나오면 나는 쑥스럽고 민망한 정도를 떠나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내가 그렇게 어려운 일을 한 건가?'
사실 큰 용기를 내서 한 일이 아니라, 나에겐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대입거부였는데 그런 반응들이 나오니까 되레 신기하다. 몇 천만 원이 넘는 등록금을 내며 대학을 가는 것이, 잠자는 시간 빼고 대입수능을 준비하는 것이 버거워서, 무서워서 도망친 건데 말도 안 되게 엄청난 포부를 가지고 비장한 선택을 한 젊은이로 비춰질 때마다 불편한 마음이 든다. 뭐 내가 가지고 있던 기득권을 포기한 것도 아니고, 원래부터 없던 기득권인데 말이다.
그리고 사실 자퇴 이후 청소년 운동을 하게 되고 소위 '운동판'이라는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다지 학벌중심사회라는 걸 느껴본 적이 별로 없다. 그런데 이번 대학거부를 둘러싼 반응들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뭔가 정의할 수 없는 이상함을 느낀다. 말하자면 이런 거다. 아, 진짜 대학 거부하는 게 그렇게 힘든 거였구나, 의외로 다들 대학 가는구나, 대학 가는 게 일반적이었던 거구나….
"대학가지 않는 여러분들, 정말 용기 있는 사람들입니다!"라는 반응들을 곱씹으면서, 정말 대학을 가지 않는 사람들이 소수였음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내 입장'에선 대학을 가는 것이 더 대단하고 용기 있는 선택인데 말이다.
충격과 공포의 '고3 수험생' 간접경험
고2 때 자퇴를 하게 되었으니, 나에게 '고3 수험생'은 직접 겪어본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지만 학교를 다니고 있는 친구들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간접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친구들의 학교에서의 일상을 듣고 있자니, 또 하나의 대학거부 이유가 생겼다.
"걔가 공부하는거 보고 무슨 서울대라도 가는 줄 알았는데, 고작 거기밖에 못 갔대? 그렇게나 공부해놓고?"
대학교 면접 보고 시간이 나서 만난 친구와 대화중에 깜짝 놀랐다. 저런 식의 조롱이 학교 안에서는 일상적으로 쓰인다는 것. 그러니까, 내가 놀란 건, 그이들 사이에선 '대학'이 하나의 비아냥의 수단으로 쓰인다는 거다. 자기가 갈 수 있는 대학에 따라서 계급이 나뉘고, 그 하위 계급엔 마음껏 저런 식의 조롱과 비아냥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진짜 소름이 돋았다. "왜 대학 가지고 비아냥거려?" 친구에게 물어보니, 친구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얘기해주었다. "대학 가지고 비아냥거리는 게 가장 효과가 좋으니까. 가장 상처받잖아."
'고3 수험생'이 너무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건, 우리 엄마도 알고, 아빠도 알고, 선생님도 아신다. 다들 아시고, 이미 우리가 오랜 기간 동안 간접/직접 경험 해오지 않았던가? 신기하다. 몇 십 년 전에도, 지금도 '고3 수험생'의 생활은 똑같고, 그 똑같은 이야기가 계속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런데, 이미 너무 많이 경험해 와서 그런가, 너도 나도 다들 좀 무뎌진 것 같다. 당연해진 것 같다. 그래서 조금 무섭다. 다들 대학입시로 상처받는 이 사람들의 존재를 아는데, 조용히 수능 다음날 뉴스에 나오는 어떤 수험생의 자살소식을 무덤덤하게 바라보면서 저녁밥을 먹는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수능이 이미 끝난 이후이고, 지금도 고3 마지막 자락에 수능으로 끙끙대는 친구와 문자를 하고 있다. 가족들이 기대했던 만큼 점수가 나오지 않아서, 가족들이 실망한다고 괴로워하는 친구에게 어떤 위로를 해줘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대학거부 원고를 쓰는 건 우연일까?
진짜 이런 글이 되긴 싫었는데, 나의 당연한 대학거부에 마지막으로 어떤 이유를 붙여보자면, 진짜로 진심으로 그녀들과 함께 행복하고 싶다. 고3인 친구들을 볼 시간이 없어서 겨우 면접 보고 남는 시간에 짬 내어 만나는 것도 너무 싫고, 모의고사 점수 나오는 날에 친구가 좌절하는 것도 너무 싫고, 그녀들이 수능 전날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는 것도 싫다.
고작 수능 따위가, 입시 따위가, 대학 따위가, 그녀와 나를 들었다 놓았다 불행하게 만드는 게 너무 어이없고 화가 난다. 생각해보면 나는 자퇴하고 대학거부까지 했는데, 여전히 고3 친구들 사이에서 '입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니! 나는 이제 좀 자유롭고 싶다. 뻔한 마무리가 되겠지만, 어쩔 수 없다. 진심으로 정말 난 좀 자유롭고 행복해지고 싶단 말이다!
번외?
수능이 끝나고, 나의 학교 친구들은 거의 다 대학을 갈 예정이다. 아아, 싱숭생숭 하다. 이제 곧 뭔가 '여대생'스러워지겠구나. 그런 그녀들이 상상이 가지 않는다. "내가 모르는 대학용어들을 사용하면 소외감이 들지 않을까"부터, 그녀들을 보고 "아, 나도 대학 갈 걸" 하고 후회는 하지 않을까 이것저것 싱숭생숭한 마음이다.
어찌 되었건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대학을 가지 않았고, 대학생이 아닌 20대가 될 예정이다. 벌써부터 미용실 유리문에 붙어있는 '수험표 지참 할인'에 소심해진다. 아무쪼록, 대학 간 그녀들이나 대학가지 않은 나나 모두가 잘 살았으면 하는 소망을 얘기하며 아름다운 마무리가… 되어버리려다가 이쯤에서 "대학 따위 입시 따위 학벌 따위 다 망해버려라 메롱~".
(이 글은 "대학가신 여러분들이 더 용기 있습니다"이라는 제목으로 주간인권신문 <인권오름>에도 실렸습니다. <인권오름> 기사들은 정보공유라이선스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정보공유라이선스에 대해 알려면, http://www.freeuse.or.kr 을 찾아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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