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씨의 하루는 아침 일찍 일어나 손주들을 씻기고 아침을 먹이고 각각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데려다 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집에 돌아와 집안일을 하고 장을 봐서 아이들이 먹을 간식과 저녁을 준비한다. 본인의 점심은 대충 때우기 일쑤다. 오후 3시쯤 아이들을 각각 데려온다. 오후에는 함께 동화책도 봐주고 놀이터에도 데리고 나간다. 그렇지만 6살이 된 큰 손자는 말썽꾸러기, 벌써부터 힘을 감당하기 어렵다. 밤에는 몸이 피곤해 금방이라도 잠이 들 것 같지만 매번 깨어 아이들 상태를 확인한다.
이 씨는 "큰 딸이 '회사 다니랴 아기 보랴' 힘에 부칠게 뻔해서 내가 먼저 봐주겠다고 자청했다"면서 "처음에 딸이 어린이집에 맡기거나 보모를 들이는 것도 고민했는데 핏덩이가 무슨 죄라고 생판 모르는 남한테 맡기겠나. 어린이집에 데려다 놓는 것도 과연 잘 봐줄까 싶고 내가 맡았다. 요즘은 다들 친정 어머니가 애들을 봐준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말하면서도 연신 무릎과 손목을 주물렀다. 그는 "손주가 이쁜 것이랑 몸이 힘든 건 별개"라며 "어린 것이 힘이 좋아서 버둥대거나 뛰어다니면 잡기가 힘들고 안아 올리는 것도 힘에 부친다. 요즘은 자식들 몰래 정형외과에 가서 물리치료라도 받을까 생각 중"이라고 했다.
그는 "그래서 요즘 하는 말로 '애 잘 키워봐야 애 볼 일만 늘어난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자식 잘 키워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취직시켜도 결국 본인에게 돌아오는 것은 바쁜 자식 부부를 대신해 손주 봐줄 일밖에 없다는 말이다.
"워킹맘의 복직 여부는 '친정과의 거리'에 달렸다"?
맞벌이 부부가 늘면서 이들의 자녀를 노인이 맡아주는 이른바 '황혼 육아'는 이제 '다반사'가 됐다. 보건복지부가 5년마다 조사, 발표하는 아동보육실태 조사 보고서(2009년)을 보면 우리나라 0~3세 영·유아의 70%, 미취학 아동의 35%는 최소 낮 동안 조부모나 외조부모가 돌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맞춰 전국의 각 자치구에서는 손주를 돌봐야 하는 조부모에게 새로운 육아 상식, 영유아 교육 방법, 율동, 노래 등을 가르치는 '예비 할머니, 할아버지 육아교실'을 자주 연다. 이러한 강좌에는 육아를 담당해야 하는 조부모들의 호응도 높은 편이다.
▲ 서울 서초구 보건소에서 열린 '서초구 예비할머니-할아버지 교실, 육아방법 및 신생아 응급처치교육'에서 참가자들이 아기가 이물질 등을 삼켜 숨을 못 쉬는 상황의 응급처치 방법을 실습하고 있다.ⓒ뉴시스 |
맞벌이 부부의 시각에서 보자면 조부모가 아이를 맡아주는 장점은 수없이 많다. 무엇보다 가족이기 때문에 믿고 맡길 수 있다는 '신뢰성'이 가장 큰 장점. 또 육아 경험이 풍부해 온갖 상황에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고 한 명이 아이를 꾸준히 지켜볼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본인들에게도 어린이집이나 보모에게 맡긴 경우보다 출퇴근 시간도 비교적 자유롭다. 100만 원 가량이 드는 보모를 들이는 것과 비교하면 경제적으로도 이득이다.
대기업에 다니는 김봄이(가명, 31세) 씨는 임신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친정 가까운 곳으로 아예 이사를 했다. 출산 이후 산후 조리 등에서 엄마 도움을 받고 싶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직장에 복귀한 뒤에 아이를 맡기기 위해서다. 먼저 아이를 낳은 선배 중엔 친정과 같은 아파트의 위아래층에 살다가 아예 집을 합쳐버린 경우도 있다.
그는 "사실 주변을 보면 아이를 낳고 직장에 복귀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있는 곳이 있느냐, 다시 말해 친정이나 시댁이 가까운데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다"며 "나는 친정 엄마와 가까운데 살고 있고 또 봐주시겠다고 하시니 다행인 케이스"라고 말했다.
실제로 시댁과 친정이 모두 부산에 있고 본인은 천안에 사는 최유나(가명, 36) 씨는 걱정이 태산같다. 임신 7개월째인 최 씨는 아직도 '아이를 어디다 맡겨야 하나'를 두고 고민이 깊다. 보모를 들이는 것은 비용도 만만치 않지만, 아무래도 미덥지가 않다. 어린이집에 맡기기도 아기를 방치하는 것 같아 싫다. 지방에 계신 양가 중 한 곳에 맡기자니 아이를 멀리 떨어뜨려 놓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걱정이다.
최 씨는 "솔직히 사정만 되면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를 직접 키우고 싶다"면서 "그런데 빠듯한 사정에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앞으로 육아비용이며, 교육비며 돈을 댈 수 없을 것 같고, 맞벌이를 하자니 아이를 키울 수 없다. 그야말로 딜레마"라고 씁쓸하게 말했다. 그는 "우리 부부가 나이가 있다보니 부모님들도 연세가 적잖다"면서 "친정에서 '아이를 맡아주겠다'고 하긴 하시는데 과연 건강이 버텨내실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최 씨처럼 자녀 부부와 부모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 원정 육아도 많다. 아이를 지방의 친정, 시댁에 맡기고 주말마다 아이를 보러 다니는 경우와 아예 아이를 봐주기 위해 친정 어머니나 시어머니가 지방에서 올라와 함께 지내시는 경우도 있다. 이때 조부모는 '황혼 주말부부'가 된다.
'육아 스트레스'에 몸도 마음도 아픈 할머니, 할아버지
김 씨처럼 육아 등의 이유로 친정 주변에 모여사는 현상을 두고 일부 언론에서는 '신(新)모계사회'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여성들이 남성 못지 않게 벌면서 발언권이 세어지고 육아도 아무리도 편한 친정에 맡기게 되면서 가족의 중심이 '시댁'에서 '친정'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
그러나 '신 모계사회'는 '양성평등'에 따른 변화라기 보다는 빠듯한 경제 상황과 부족한 보육 복지 때문에 나타난 결과라는 점에서 바람직한 변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숙진 젠더사회연구소장은 "'신모계사회'라는 지칭은 가족 구성이나 운영이 보이고 있는 현상을 지칭하는 것이고 과연 이러한 변화가 가치나 지향의 측면에서 바람직하느냐는 별개의 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손주를 키워주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부모도 적지 않다. 김봄이 씨는 "동기 중에 당연히 친정 어머니가 아이를 봐줄 것이라고 생각하다가 육아휴직을 4개월 남겨놓고 어머니가 '몸도 힘들고, 나도 이제 자유로운 시간을 갖고 싶다. 아이를 봐주지 않겠다'고 선언하신 경우가 있다"면서 "그때부터 아이 봐줄 보모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그는 "그 친구처럼 엄마가 딱 자르시면 서운하기도 했겠지만 아이 맡기기로 하는 나도 복잡다단한 심정인 건 사실"이라며 "평생 자식들 키우는데 매달려 있으시다 이제 좀 자유로워지셔서 친구분들이랑 여행도 다니시고 교회 봉사활동도 다니시는데 다시 아이를 맡기게 되니까… 괜히 친구들 사이에서 '소외됐다'고 느끼지 않으실까 싶다"고 말했다.
실제로 조부모가 아이를 키워줄 때 생기는 가장 큰 문제는 아무래도 건강이다. '손주병(炳)'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아이를 돌보는 활동이 무릎이나 손목에 부담을 주어 나이를 먹으면서 생기는 퇴행성 관절염이나 척추 질환을 악화시킬 수 있다. 수면 장애와 만성 피로, 식욕 저하, 소화 부진 등을 호소하는 경우도 많다. 또 육아 스트레스가 심혈관계에 악영향을 미쳐 심장병 발병율을 높인다는 연구도 있다.
지금은 직접 아이를 키우고 있는 전지혜(가명. 39세) 씨는 "아이를 맡아주신 엄마 건강이 크게 나빠진 게 제일 걱정거리였다"며 "어느날 어지럽다며 계속 토하시고 하셨는데 병원에 가보니 보니 육아 피로로 달팽이관이 떨어져서 그렇다고 하더라. 정말 가슴이 아팠다"고 말했다.
▲ 손자에게 짜장면을 먹여주는 할머니. (이 사진은 기사 본문과 관련이 없습니다.) ⓒ뉴시스 |
"육아 방식을 두고 심심치 않은 갈등…남편은 육아에 소외되기도"
또 육아 부담 때문에 가족 간의 갈등이 깊어지기도 한다. 각 포털사이트의 육아 커뮤니티 등을 보면 아이를 맡아 준 친정엄마, 시어머니와의 육아 방식 차이로 갈등을 겪고 있다는 글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아이 키우는 방식를 두고 '세대 차이'가 예민하게 표출되는 것.
한 누리꾼은 "원래 엄마와는 친구처럼 지냈는데 한 2년 간 아이를 맡기면서 많이 싸워서 지금은 서로 쌓인게 많아져서 좀 멀어졌다"면서 "아기 옷을 삶을 것이냐, 파우더를 발라줘야 하느냐, 먹을거리 문제, 기저귀를 채우는 시간 등 사사건건 부딪히게 된다"고 했다. 그는 "주변에 친정에서 산후조리를 하거나 아이 맡기겠다는 사람 있으면 말리고 싶다"고 말했다.
전지혜 씨는 "친정 어머니에게 아이를 맡길 때 문제 중 하나는 남편과 아이의 관계라고 생각한다"면서 "친정 어머니가 양육을 전담하게 되면 남편은 자연스럽게 양육에서 소외되어 방관자가 되기 쉽다"고 말했다. 그는 "남편은 어머니의 양육 방식에 불만이 생기면 주로 나에게 이야기하게 되는데 그럼 남편과 어머니 사이에 끼인 처지가 되기 일쑤"라고 말했다.
또 경제적인 부담을 두고도 갈등을 빚는 경우가 많다. 보통 아이를 맡기면서 양육비 조로 용돈을 드리는 경우가 많은데 액수는 각 집안의 형편이나 맡기는 아이 수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전 씨는 "한달에 100만 원 가량 드렸는데 적은 수준은 아니었지만 양육의 힘듦이라는 게 돈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다"라며 "아무래도 지치시는거 같아서 집안일을 도울 가사 도우미도 일주일에 한번씩 부르고 하다보니 부담이 만만치 않았다"고 말했다.
"'확대 가족을 통한 돌봄의 가족화' 복지국가와는 정반대"
이숙진 젠더사회연구소장은 이러한 현상을 '확대 가족을 통한 돌봄의 가족화'라고 규정했다. 돌봄 노동이 탈 가족화, 사회화 되어야 하는 복지국가와는 정반대의 경향이라는 지적이다.
이숙진 소장은 "복지라는 관점에서 보면 보육 서비스는 갈수록 탈 가족화, 사회화되어야 하고 국가의 정책이 이를 지원해야 한다"며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반대로 가고 있다. 복지국가로 가는 방향에서는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문제의 경우 그 나라의 보육 서비스 제도 전반을 봐야 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공보육 시설이 출퇴근 시간이나 근접성. 신뢰도 등에서 시민들의 수요를 충분히 커버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돌봄을 하나의 일로 본다면 이제는 배우자를 넘어 어르신들까지 비공식 노동을 하는 가족종사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문제는 정부여당이 내놓는 '보육료·양육수당 확대' 등의 정책으로는 해소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보다 본질적인 대책이 필요하기도 하다. 한나라당은 지난 6일 현재 차상위계층까지만 지원하는 양육수당과 소득하위 70%까지 지원하는 보육료 지원대상을 확대하는 방안을 정부측에 제안했다.
이 소장은 "양육 수당은 보육 문제를 사회화 하기 보다는 가족 내에서 해결하게 하고, 여성에게는 소득 대체효과로 '나가서 일하는 것보다 집안에서 아이를 키워라'라는 것으로 나타난다"며 "보통 복지국가의 유형 중에서 남유럽과 같이 보수화된 사회에서 현금을 지급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여성의 시각에서 본다면 국가에서 '집에서 아이를 돌보고 모성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한 보상을 주는 것과 일하러 나가는데 출산과 양육이 장애가 되지 않도록 공공 보육서비스를 제공 받는 것은 크게 다르다"며 "어떠한 복지 지출을 하느냐가 중요한 문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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