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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버스, 최루액보다 더 아팠던 것은…

[모 피디의 그게 모!] 김진숙 씨에게 공감과 경의를

<프레시안>에 '모 피디의 그게 모!'를 연재하는 모 피디가 지난 9일 부산 영도구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를 찾은 2차 희망버스에 참여했다며 후기를 보내왔다. <편집자>

스승의 날, 하루종일 색종이를 자르고 다듬어 카네이션을 만든 학생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 그 카네이션을 달아드리지 못하게 막아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저 달아드리기만 하면 되는데, 달지도 못한다면 전해드리기라도 하면 되는데, 이제 애써 만든 이 꽃은 어떡해야 하나요. 그 꽃을 만든 마음은 또 어떡하나요. 하물며 왜 꽃을 만들었냐며 꽃을 짓밟고 따귀를 때리면, 맞은 뺨에서 이는 불보다 더 차갑게 얼어붙는 이 마음은 어떡할까요.

2차 희망버스가 겪은 일이 그러했습니다. 최루액은 불에 덴 듯 따가웠지만 갈 곳 잃은 망연함이 더 아팠습니다. 더 화가 났습니다.

희망버스는 다른 집회와 성격이 좀 다릅니다. 먼저 목표지가 뚜렷합니다.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 계시는 김진숙 씨를 볼 수 있는 곳까지 가야합니다.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자기 돈 내고 주말을 반납하며 버스를 타고 여기까지 온 이유는, 김진숙 씨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응원의 마음을 전해주고 싶어서입니다. 그럼으로써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어서입니다. 성지 순례와 면회의 중간쯤이랄까요? 성지에 닿지 못하고 오는 순례는 성지 순례가 아니오, 볼 사람을 보지 못하고 오는 면회는 면회가 아니지요. 그래서인가요. 경찰은 이 목표가 완벽하게 좌절되도록 최선을 다해서 시민들을 때리고 최루액과 페인트 물대포를 쏘고 간식거리를 압수하고 아무나 연행하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 최루액은 불에 덴 듯 따가웠지만 갈 곳 잃은 망연함이 더 아팠습니다. 더 화가 났습니다.ⓒ모피디

그런데, 희망버스에 오른 사람들에겐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전국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입니다. 버스는 우리를 부산역에 내려주고 어디선가 대기하고 있겠지요. 경찰이 때리고 연행해도, 물대포를 뿌리고 눈에 최루액을 분사해도, 그래서 아프고 겁이 나도,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잠시 몸을 대기할 곳도 없습니다. 그냥 밤새 그 거리에 서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얄밉도록 쏟아지는 비까지 고스란히 맞으면서요. 원래는 밤새 도란도란 응원하고 격려하며 서로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을 보듬다가 비를 피해 크레인 주변에서 쪽잠을 자고 해가 뜨면 같이 아침을 먹고 올라올 생각들이었으니까요. 그런 이들을 향해 군사 작전을 방불케하는 경찰의 폭력진압이라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 버스에는 조직된 싸움 능력이 없었습니다. 자칫 화가 날 정도였어요. 전국에서 그냥 마음이 움직여 모인 사람 만 여명입니다. 사람 수만 생각한다면 그 어떤 진압에도 강력히 대응할 숫자지요. 그런데 이들은 깃발을 들고 모인 학생들이나 노동단체들, 사회운동가들도 있었지만, 아이 손을 잡고 온 가족 참가자, 친구들과 같이 오거나 그냥 혼자 온 개인 참가자들이 무척 많았어요. 이 행사를 기획한 사람들도 타고 내려올 버스를 마련하고 스피커 달린 방송차와 최소한의 진행을 준비하는 데만도 온 힘을 다 썼을 겁니다. 경찰이 밀고 나오면 사수대를 조직해서 뚫는다거나 사람들을 다치지 않게 보호한다거나 하는 조직력 자체가 아예 없는, 혹은 그런 조직적 움직임을 생각해본 적도 없는, 폭력에 대한 대비를 일부러라도 하지 않은 그런 모임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만, 여기가 어디였지요? 청와대 앞인가요? 2008년 5월과 6월, 시민들이 효자로에 모여 청와대로 평화행진을 할 때 경찰은 살수차로 시민들을 쓸어버렸지요. 그래도 이 시민들은 이해심도 넓습니다. '청와대 가는 길이니까' 그랬겠거니. 그래도 청와대 가는 길은 시민들이 행진하는 걸 경찰이 막아서야지 어쩌겠누. 그때만 해도 시민들은 전경들을 가여워했습니다. 윗선의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왔지만, 겁먹은 얼굴로 '버티기만 해'라는 명령을 복명복창하던 전경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럼 여기가 어딘가요? 미국 대사관이나 미군 기지 앞인가요? 한미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까 두려워 공권력이 나서 시민들을 제압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국회? 대법원? 시민들의 평화행진조차 막아서야 할만큼의 신성성이 좁쌀만큼이라도 부여되는 곳인가요?

이곳은 한진중공업입니다. 노동자들이 동료를 위해 목숨을 끊어가며 만들어낸 노사합의안을 무시하고 또 다시 정리해고를 감행한 곳. 낮은 임금과 과잉 노동으로 경영흑자를 유지하고 있는 곳. 성공의 과실을 극소수 경영진이 독점하고 그 공을 같이 이룬 동료의 생활터전을 빼앗은 곳. 똑같은 행위를 필리핀에서까지 하고 있는 곳. 그리고 그것이 부당하다고 목숨을 걸고 이야기하고 있는 또 다른 여성노동자가 홀로 지상 35m 크레인 조종실에서 190여일을, 반년이 넘는 시간을 버티고 있는 곳.

▲ 여기가 어디인가요? 왜 경찰이, 공권력이 이들을 비호하기 위해 시민들을 때려잡아야 할까요? ⓒ모피디

왜 경찰이, 공권력이 이들을 비호하기 위해 시민들을 때려잡아야 할까요? 왜 경찰은 대포알 같은 렌즈가 달린 최신형 DSLR로, 거센 비를 맞으며 흠뻑 젖은 운동화로 김진숙 씨에게 손을 흔들고 인사하겠다고 온 시민들의 얼굴을 찍어야 하나요? 왜 경찰은 '노약자와 국회의원은 피하라'라는 잘 들리지도 않았던 경고방송 이후에 최루액을 섞은 물대포를 휠체어를 탄 장애인에게까지 분사해야 할까요? 왜 군사작전하듯 곤봉과 방패를 들고 뛰쳐나와 피부가 타들어가는 고통을 호소하는 시민들의 팔다리를 잡고 끌고 들어가, 머릿수로 성과 측정하듯 연행해야 하나요? 한진중공업이 시민들의 평화 행진마저도 공권력으로 불허해야 하는 성스러운 곳이었나요? 그 공권력에는 최루액에 눈물흘리는 시민들의 세금도 들어가 있지 않나요?

공권력이 어떠해야 했을까요? 경찰은 한진중공업 사측이 고용한 폭력배들과 평화행진을 하는 시민들 사이에 폭력 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둘을 격리하고, 시민들 틀어막는 차벽이 아니라 길을 내는 '길 벽'을 쌓았어야 했습니다. 경찰은 폭력배로부터 시민을 지켜야 하니까요. 그랬다면 시민들은 웃음과 노래로 행진을 해 크레인 밑으로 가, 그 위에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김진숙 씨에게 손을 흔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말 밤 근무의 피로에 지친 전경의 방패와 투구에 꽃을 꽂아주고, 고생한다 격려하며, 간식거리를 주머니에 슬쩍 넣어주었을 것입니다.

같은 질문이 계속 되면 답이 궁금해지지 않게 될 때가 있습니다. 왜 경찰은 시민을 때려잡는가? 늘 그러하니 질문이 민망해지지요. 하지만 경찰이 폭력진압으로 막아선 이곳은 사기업입니다. 이 차이를 기억합니다. 공권력은 '김진숙'이라는 사람에게 격려를 전해주며 스스로를 위로하려는 사람들의 모임 자체를 불허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김진숙. 그런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2003년 정은임의 영화음악에서 추모 했던 고(故) 김주익 씨는 그녀를 포함한 동료들을 위해 목숨을 버렸습니다. 고(故) 곽재규 씨는 그런 김주익 씨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또 목숨을 버렸습니다. 그 15년 전에는 고 박창수 씨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동료를 위한 리더의 희생이 아니더라도, 그곳에는 산재에도 들지 못한 수많은 과로사, 사고사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목숨이 동료의 목숨으로 덕지덕지 연명되고 있다는, 이제는 자신이 동료를 위해 목숨을 걸아야 한다는 그 애달프고 숭고한 공감의 마음. 그 마음이 김진숙 씨입니다. 그 마음의 근처에라도 우리는 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 공감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고, 그 공감이 성스럽다는 것을 알기에, 경의를 표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 이제는 자신이 동료를 위해 목숨을 걸아야 한다는 그 애달프고 숭고한 공감의 마음. 그 마음이 김진숙 씨입니다. 그 마음의 근처에라도 우리는 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모피디

공감을 하면, 우리는 좀 더 행복해집니다. 물론 사람이기에 이기적 욕심을 포기할 순 없지요. 하지만 공감의 행복을 느끼면 그 이기적 행복은 좀 머쓱해지기 마련입니다. 그 줄타기를 하며 살아가는 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몫이지요. 돈은, 자본은 사람이 아닙니다. 돈과 자본은 그 자체의 증식을 목표로하는 하나의 체계일 뿐이지요. 그 체계를 통해 사람 사는 세상이 좀 편리하게 굴러갈 수 있도록 돕는 거지요. 그런데 종종 이 체계는 사람 자체를 잡아먹습니다. 그럴 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이 마음 없는 체계가 최소한 사람은 잡아먹지 못하도록, 경계선을 쳐주는 일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보일 수 있는 가장 간절하고 숭고한 공감의 마음이 스스로를 유폐시킨 곳으로 희망버스를 타고 갔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기는 커녕 최루액 따귀를 맞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왜 따귀까지 날렸는지, 때린 사람도 잘 모를 것입니다. 동물적인 조건반사라고 이해해 볼까요? '우리 편'이 아니라는 직감에 대한 조건반사.

여기 이기적 독점이 행복이라고 믿어 타인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일군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목숨을 걸고 항의하는 사람에게 공감을 표하며, 스스로 사람답게 되어간다는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희망버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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