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63도, 대한민국은 사막이다. 그걸 누가 모르나. 다 안다. 말라죽지 않기 위해 쉼 없이 우물을 파거나, 하나의 우물로는 모자라 남이 파놓은 열 곳, 백 곳의 우물까지 빼앗고자 발버둥 치는 곳, 대한민국은 그런 곳이다. 사막이니까.
네 식구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아내는 홍대 어름에 두리반이라는 식당을 차렸다. 네 식구 해갈에는 좀 모자라는 우물이어서 나는 출판사 편집일이라는 우물을 하나 더 파야 했다. 사막에 내동댕이쳐진 인생이 다 그런 거지."
2009년 12월 24일, 그런 두리반에 5톤 트럭과 철거용역 30여 명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모든 집기를 트럭에 실은 뒤 마지막으로 아내를 들어내어 길바닥에 패대기쳤다. 단 한 차례의 협상도 없었지만, 건설사로선 단 한 차례의 협상조차 필요 없었던 모양이다. 두리반은 그토록 힘이 없었으니까. 그것은 모욕이었다. 그들은 모욕을 던져주면서 모욕을 견디라고 했다. 그것은 죽음이었다. 그들은 죽음을 던져주면서 죽음을 견디라고 했다.
"나 없는 걸로 쳐. 회사 잘 다니면서 애들 뒷바라지 잘해. 난 죽었어."
아내는 다음날 새벽, 둘러쳐진 철판을 뜯고 두리반으로 들어갔다. 용산 남일당이 떠올라서 극구 말렸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니 철거민이 된 것을 끝내 숨기고 싶어 말렸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달리 살아갈 길이 있다면 오직 그 길로 가자고 아내를 잡아끌고 싶었다. 그러나 길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건설사는 두리반을 생명의 둥지로 보지 않았기에 최소한의 연명거리조차 남겨주지 않았던 것이다. 건설사는 건물주만 생명체로 보았을 뿐, 두리반 같은 세입자는 건물덩어리의 부속품 정도로만 여겼기에 메마른 사막으로 패대기쳤던 것이다. 도쿄에 있는 롯폰기힐스(3만3000평) 복합시설이 무려 17년 동안이나 기존의 생명들과 대화와 타협을 통해 개발된 곳임을 이 땅의 건설자본은 정녕 몰랐던 것이다. 이 땅의 재개발은 오직 야만과 폭력이 난무하는 현장일 뿐이었다.
▲ 농성 1년을 맞아 2010년 12월 24일, 두리반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프레시안(허환주) |
야차의 힘을 능가할 상징의 힘
농성장으로 변한 두리반은 살벌하게 추웠다. 영하 10도 아래로 떨어진 실내에 두어 장의 스티로폼을 깔고 오리털 침낭을 펼친 게 다였다. 하지만 살을 파고드는 추위는 정작 별게 아니었다. 어디로 가는지, 얼마나 가야 하는지, 어떤 모멸과 고통이 따르게 될지 그따위 것에 신경 쓸 여력도 없었다.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칼바람 불어와 바깥 철판이라도 흔들리면 용역깡패들의 출현인가 싶어 살이 떨렸다. 새벽 두 시거나 세 시,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그것들을 생각하면 책 한 줄 읽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건 암흑이었다. 불을 붙여야 했다. 농성장 두리반을 여하튼 밝히고 지켜야 했다. 제일 처음 시작한 것이 동료작가들을 부르는 일이었다. 두리반 사태를 설명해주고 언론사에 기고를 부탁했다. 그들은 그렇게 했다. 나 역시 글쓰기를 시작했다. 덕분에 하나둘씩 두리반 문을 두드려주었다. 지역 주민들이 찾아왔고, 진보정당 당원들이 찾아왔다. 촛불을 켜는 그리스도인들이 찾아왔고, 상상도 못했던 다큐영상집단 푸른영상과 홍대 앞 인디밴드들도 찾아왔다.
「하늘지붕음악회」, 「화요다큐상영회」, 촛불을 켜는 그리스도인들의 예배, 「칼국수음악회」, 「사막의 우물 두리반음악회」가 매주 고정적으로 열렸다. 그때마다 이십여 명에서 많게는 백여 명씩 함께했다. 두리반 농성은 점차 문화운동 형태로 자리잡아갔다.
그러나 농성을 시작한 지 7개월이 지나던 2010년 7월 21일, 건설사는 비열하게도 전기를 끊었다. 실내온도가 36도를 넘나드는 때였다. 아침에 만든 찌개는 한나절이면 상했다. 이삼십 개의 촛불을 밝혀놓은 실내는 열기만 더할 뿐 오 촉 전구의 밝기만도 못했다. 어둠을 타고 쥐가 기어들어왔고, 아침마다 끈끈이에 붙은 쥐를 치워댔다.
줄줄 흐르는 땀, 밤에는 거의 매시간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잠을 설쳤다. 그건 견딜 수 없는 모욕이었다. 그때부터 두리반은 건설사와 대화의 꿈을 완전히 접었다. 야차의 힘을 능가할 상징의 힘을 키워내는 것, 그것만이 권력과 투기자본과 조직폭력배를 등에 업고 설쳐대는 건설사를 굴복시키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다.
전기를 끊어?
간달프가 필요했다. 지혜와 용기를 겸한 간달프가 필요했다. 아내는 두리반의 첫 번째 간달프였다. 그는 전기 끊긴 지 닷새째 되던 7월 26일 마포구청 도시계획과를 찾았다. 두리반 일대를 지구단위계획지역으로 발표해서 오늘의 두리반 사태를 일으켰으니, 단전문제라도 해결하라고 항의농성을 시작했다.
아내는 일주일 동안 단 한 차례도 마포구청을 떠나지 않았다. 구청장이 나서서 경유발전기를 구해준 뒤에야 농성을 풀고 두리반으로 돌아왔다. 두리반 식구들은 환호했다. 하지만 아주 잠시였다. 경유값을 마련해야 했고, 경유값을 아끼기 위해 공연이나 행사 외의 시간엔 발전기를 돌리지 않아야 했다. 그러니 여전히 푹푹 쪘고, 여전히 어두웠고, 여전히 상한 음식을 버리는 일이 잦았다.
어떻게든 전기를 끌어 쓰자는 의견이 분분했다. 정말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2주에 한 번씩 열리는 두리반상회에선 전기 없이 그냥 가자고 했다. 우직하게 나아감으로써 한국전력의 직무유기와 마포구청의 무책임한 행정에 일침을 놓아야 한다는 거였다. 반칙을 능사로 삼는 건설사에겐 원칙고수의 위대한 힘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맞는 결론이었지만 감내하기도 힘든 결론이었다.
여하튼 두리반은 그렇게 했다. 건설사처럼 놀 수야 없는 일이니까. 용산에서 건설사는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도정법) 47조에 따라 영업보상과 시설투자비에 대한 보상을 한다면서 시설투자비를 반으로 후려 지급하려했다. 두리반의 경우엔 그 알량한 도정법 적용을 피함으로써 이사비용만 던져주고자 했다.
금호건설은 상도동에서 '주택재개발사업'을 '지역주택조합'으로 바꿈으로써 세입자들을 알몸으로 내쫓았다. 대우건설은 명동에서 아직 사업자 인가를 내지 않는 방법으로 마치 개인이 건물을 매입한 것처럼 조작하여 상인들을 발가벗겼다. 도정법이란 게 이미 건설자본을 위한 법이지만, 그것들은 그것조차 지키지 않거나 그것조차 비껴가고자 했다. 가장 적확한 표현을 찾자면 건설사들은 빨대를 세입자의 등에 꽂고 피를 빠는 흡혈귀였다.
▲ 마포구청에서 조인식을 마친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연대단체 회원들. ⓒ두리반 |
원칙에서 나오는 힘
고단했으나 두리반은 원칙을 고수했다. 그것은 두리반이 여하한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자극제였다. 실제로 1년6개월의 농성기간 동안 나는 두리반을 단 하루도 비운 적이 없었다. 함께하는 이들이 많으니 사나흘 두리반을 비운들 어떠랴 싶은 생각 따위는 꿈에도 하지 않았다. 흡혈자본과 맞서 싸우려면 오직 칼을 벼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건설사가 비선으로 협상을 시도해왔을 때는 오픈되지 않으면 필요 없다고 내쳤다. 얼마면 되느냐고 물었을 때는 생계터전을 빼앗긴 자는 삶의 터전을 말할 뿐이라고 답했다. 모든 걸 위임받았다고 하면서 철거업체가 협상테이블에 앉겠다고 했을 때는 두리반을 폭력적으로 들어낸 건설사가 직접 나와야 한다고 거부했다. 합의서 문구에서 '보상'이란 단어는 시혜적 의미가 담겨 있으니 '배상'이란 단어로 고쳐야 한다고 했다. 구청직원과 마포경찰서 직원이 참관인으로 나오겠다고 했다가 번복했을 땐 설령 합의조인식이 깨질지라도 그네들이 나와야만 협상할 수 있다고 조인식을 거부했다.
그 지난한 과정을 거쳐서야 두리반 사태는 타결되었다. 농성을 시작한 지는 531일만이고 전기 끊긴 지는 324일만이다. 처음 들려나갈 때를 제외한다면 처참한 폭력사태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전적으로 문화예술운동의 힘이라 하겠다. 합의사항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생계터전인 두리반을 홍대 인근에 다시 열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이라는 사막에서 당장 우물을 파고 다시 물을 길 수 있도록 한다는 합의였다. 두리반은 1년6개월의 농성으로 몹시 지친 상태여서 아마 9월 초는 되어야 문을 열 수 있지 않을까싶다. 그날은 사막의 우물 두리반을 되찾은 날이니 함께해온 이들과 기쁨에 겨워 칼국수를 나눌 것이다.
건설자본에게 두리반은 전복적이지만 역사에게 두리반은 기록이고 이 땅의 철거민들에게 두리반은 위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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