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 내용과 지인들의 말을 모아보면, 고인은 지난 4월부터 실시된 타임오프제(Time-off, 근로시간면제제도) 때문에 고민하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알려졌다. 타임오프제. 그게 대체 뭐길래, 이런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게 된 걸까.
ⓒ연합뉴스 |
누구를 위한 타임오프제인가
2010년 7월 1일부터 실시된 타임오프제는 회사 업무가 아닌 노조와 관련된 일만 담당하는 노조전임자에게 회사 측이 임금 지급을 금지하는 대신 노사 공통의 이해가 걸린 활동에 종사한 시간을 근무시간으로 인정, 이에 대한 임금을 지급하는 제도다. 이전까지는 노조전임자의 업무와 정원은 노사간 단체협약을 통해 결정했었다.
여기에 따르면, 회사 측이 임금을 지급하는 시간은 조합원 수에 따라 구분된다. 조합원 49명 이하 사업장은 전임자 0.5명에 해당하는 1000시간, 99명 이하는 1명에 해당하는 2000시간이 주어졌다. 노동자 한 명이 주 40시간 일한다고 하면 1년에 약 2000시간 정도를 일하게 되기 때문이다.
즉 조합원 수가 50~99명인 사업장에서 전임자를 둘 경우 1명만이 유급으로 노조활동을 할 수 있고 나머지 간부들의 경우, 근무시간에 조합 활동을 하면 그 시간만큼 월급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나마 1명의 노조전임자들은 근무시간으로 인정되는 △근로자 고충처리 △산업안전보건에 관한 활동 △단체교섭 준비 및 체결에 관한 활동만을 해야 한다. 이것 이외의 활동을 할 경우, 그 시간만큼 월급에서 제한다.
이로 인해 대기업 노조는 상당한 피해를 입고 있다. 전임자 수가 줄어 노조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금전적으로도 상당한 타격을 받고 있다.
일례로 기아자동차노조의 경우 지난해 8월 기존 전임자 204명의 노조전임자 수가 유급 21명, 무급 70명으로 줄었다. 노조는 무급전임자 노조원 70명의 급여를 해결하기 위해 자구책으로 노조원 1인당 조합비를 월평균 1만4200원 인상해야만 했다.
쌍용차도 기존 유급 전임자 39명을 7명으로 줄이고 타임오프 한도 외 전임자의 임금은 노조 수익사업으로 충당하고 있다. 현대중공업 노사 역시 지난해 기존 55명의 노조전임자를 30명(유급 전임자 15명, 노조 임금 지급 15명)으로 줄였다.
고인이 속한 현대자동차 노조의 경우 올해 4월부터 단협이 해제돼 타임오프 적용 사업장이 됐다. 현대자동차 측은 법정 노조 전임자인 24명만을 인정키로 하고 노조에게 법정 전임자를 지정하라고 노조에 통보했지만, 조합원 4만5000명에 전임자 233명이 있는 현대자동차지부는 이를 수용하기 쉽지 않았다.
10분의1 수준으로 전임자가 줄어들게 될 경우, 사실상 노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대차 노사는 기존 단협안 만료를 앞둔 지난 3월 두 차례 특별협의를 가졌지만 "타임오프 도입은 노조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것이어서 인정할 수 없다"고 노조 측에서 반발해 결렬됐다. 노조에서는 24명의 명단을 사측에 제출하지 않았고 사측은 전임자 233명 모두에게 무급 휴직 발령을 냈다.
"타임오프제 실시로 조직 내 소통에 큰 문제 생길 것"
전임자 문제도 문제지만 비상근 노조원도 문제다. 자살한 박 모 씨의 경우, 아산공장에서 노동안전보건위원으로 노조에서 비상근으로 일을 해왔다.
노동안전위원은 현장 활동을 하며 부상하거나 지병을 호소하는 조합원을 만나 상담하고 이를 조합에 보고, 산재 처리가 가능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자리로, 지난 4월 1일 타임오프제 도입 이전에는 박씨의 활동이 모두 유급처리 됐었다.
문길주 금속노조 노동안전보건국장은 "비상근 노조원이었던 고인은 일을 하다가도 노동자가 상담을 요구할 경우, 사측에 이야기를 하고 잠시 자리를 비우는 식으로 노조 활동을 했다"며 "하지만 4월, 단체협약이 해지되고 타임오프제가 적용된 이후부터는 고인이 근무시간에 노동자를 상담하는 등의 활동을 하는 걸 회사에서는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실제 유서에서도 밝혔다시피 고인은 노동안전위원으로 활동하며 조합원들을 면담하는데 할애한 시간을 회사 측이 타임오프제 시행을 이유로 무급처리 하거나 무단이탈이라고 지적하는 데 대해 힘들어 했다.
김철희 노무사는 "타임오프제의 기본 취지는 노동조합의 자립성이 없어진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제도"라며 "하지만 속내는 우리나라 노조활동의 근간인 노조전임자의 총량을 절반 이하로 줄이겠다는 의도"라고 주장했다.
김 노무사는 "이번에 돌아가신 고인의 경우, 회사에서 해야 할 인사 업무를 대신 하던 노조원이었다"며 "그간 노사협의를 통해 이런 분들이 다방면에서 활동을 해 왔는데 타임오프제는 이런 부분을 무 자르듯 잘라버렸다"고 밝혔다.
김 노무사는 "문제는 타임오프제가 적용되면서 고인과 같은 일을 하던 노조원들이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발생되는 일들"이라며 "개별 노동자와 사용자들 사이의 소통이 사라져, 조직 내부의 소통에도 심각한 문제가 생길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민주노총은 10일 성명서를 내고 "정부가 노조활동 통제의 유력한 수단인 타임오프란 제도를 만들어주고, 사용자들은 이를 배경으로 마구잡이로 노조의 현장 활동을 가로막아 왔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라며 "고인이 해왔던 노동조합의 노동안전(산업안전)활동은 법상으로도 타임오프로 제한될 대상이 아니며, 노사협의로 별도 보장받을 수 있는 업무로서, 명확히 현대차의 단협을 통해 그 활동이 보장된 일"이라고 주장했다.
민주노총은 "그럼에도 사용자들은 타임오프제도가 시행되자 노조활동의 영역을 가리지 않고 압박하고 탄압해왔다"며 "따라서 이번 죽음의 책임은 명백히 정부와 회사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