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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남부를 왜가 200년간 지배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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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남부를 왜가 200년간 지배했을까?

[韓日 교과서 전쟁, 해법은?]<7> 고대의 역사왜곡

지난 3월 말 일본의 중학교 교과서 검정 결과가 발표됐다. 검정에 통과한 교과서들은 전반적으로 역사 서술이 개악되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평가다.

그렇다면 일본 중학교 역사 교과서의 서술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먼저 2009년 검정을 통과해 현재 사용되고 있는 '후소샤'와 '지유샤'판 역사 교과서의 서술 내용 중 주요한 문제점들을 시기별로 하나씩 살펴보고, 한일 · 한중일 간의 연구자, 교사, 시민의 교류를 통해 발간된 공동역사교재에서는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지 7회에 걸쳐 비교해 보고자 한다.

이후에는 올해 검정에 통과한 중학교 역사 · 공민교과서 서술 내용의 문제점을 시기에 따라 살펴보기로 하겠다. <필자>

후소샤와 지유샤 교과서는 어떻게 다를까?

후소샤와 지유샤 교과서 본문의 임나일본부설과 관련한 내용은 차이점이 거의 없다. 다만, 지유샤 교과서의 경우, 광개토왕비의 비문에 야마토 조정의 군대와 싸운 것에 대한 설명문을 추가하여 임나일본부설을 더욱 부각시킴으로써 내용이 개악됐다.

교과서 서술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후소샤 교과서는 물론 후소샤 교과서의 판박이인 지유샤 교과서에서는 이미 한일 역사학계에서 사실이 아닌 것으로 결론이 난 임나일본부설을 마치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학생들에게 잘못된 역사적 사실을 가르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주변국의 역사를 자의적이고 편의적으로 해석하는 자국 중심주의적인 역사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큰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렇다면 임나일본부설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 후소샤판 역사교과서. ⓒ프레시안

임나란 낙동강 서쪽의 가야 땅을 말한다. 임나일본부설에 의하면, 임나일본부는 야마토 정권이 4세기말 가야를 군사적으로 정벌한 후 한반도 남부를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으로, 4세기 중엽부터 562년 가야가 신라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200여 년간이나 한반도 남부를 장악하여 지배했다는 것이다. 야마토 정권은 야마토(나라 현)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해 간 일본 최초의 통일정권으로 성립한 시기는 잘 알 수 없다. 야마토 조정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근거는<일본서기>에 있는 기록을 근거로 한 것이다. <일본서기>는 720년 편찬된 일본 최초의 정사라고는 하나, 왜의 왕가를 미화하기 위해 편찬한 사서로 수많은 윤색과 가필, 날조와 조작의 기록으로 이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신빙성이 의심되는 설화적인 서술이 많아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인식되어 왔다. 그<일본서기>에 의하면, 신공왕후가 보낸 왜군이 369년 한반도로 건너와 가야 7국을 점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 우익 교과서들은 이 기사를 근거로 한 임나일본부설을 그대로 받아들여 교과서에 기록하고 있다. 그것이 '야마토 조정은 반도 남부의 임나(가야)라는 지역에 거점을 구축했다고 생각된다.'라느니, '마침내 임나는 신라에 멸망당하여 야마토 조정은 조선반도에서 발판을 잃었다.'라고 서술을 해 놓은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송서] 왜국전의 <무가 중국 황제에게 보낸 편지>소개는 [송서] 왜국전의 왜 무왕의 상표문을 인용한 것인 데, 원문 그대로를 전달한 것이 아니라,' 바다를 건너 조선반도에서 95개국을 평정했습니다.'로 적어, 원 사료에는 없는 '조선반도'를 삽입하여 서술해 놓았다.

이외에도 야마토 정권이 남조의 조공국이 된 이유를 고구려와 대항하여 조선 남부와의 연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고 기술한 것도 문제가 있다. 왜가 남조의 조공국이 될 수밖에 없었던 야마토 정권 내부의 사정 등 현실적 측면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유샤 교과서는 본문의 서술과 그림 도판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지도에 있어서도 심각한 역사적 오류를 보이고 있다. [4세기 말의 조선반도]라는 지도에서 임나의 영역을 낙동강 서쪽 지역부터, 전라남북도는 물론, 충청북도 일부까지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다.

수정해야 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그렇다면 임나일본부설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어떤 모순점을 안고 있기에, 교과서를 수정해야 하는 것인가?

첫째, 임나일본부의 이름의 모순부터 생각해 보자. 일본은 7세기 이전에는 국호가 없었다. 단지 왜국으로 불렸을 뿐이다. '일본'이라는 국호는 7세기 말에 처음으로 사서에 등장을 한다. 따라서 4세기 말에 한반도에 세워졌다는 통치기관에 '일본'이라는 말이 들어갈 수는 없다. 이것은 누군가에 의해 일본이라는 국호가 사용된 7세기 말 이후에 임나일본부라는 기관 이름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4세기 초에 성립한 야마토 정권이 과연 고작 수 십 년 후인 369년 바다를 건너 한반도 남부까지 지배하는 능력이 됐을까를 생각해볼 수 있다. 당시 왜는 아직 제철 기술도 없어서 가야에서 철광을 수입하여 철제 투구와 철제 무기를 만드는 실정이었고 4세기까지는 말도 탈 줄 몰랐다. 5세기부터 겨우 말을 사육하여 타게 됐다. 이러한 왜가 어떻게 말을 자유자재로 타고 다니며, 철제 무기를 다량 소유하고 있는 가야를 정복할 수 있을까?

셋째, 고구려는 과연 야마토 정권의 굳센 저항에 부딪혀 한반도 남부 지역을 정복할 수 없었을까? 당시 왜는 백제의 요청에 의해 출병한 원군이었을 뿐이다. 주력 부대는 어디까지나 백제군이었다. 그리고 광개토대왕의 비문에 의하면, 왜군은 광개토대왕의 군대에 의해 괴멸당하며, 패퇴일색이었다. 대표적인 기록이 광개토대왕의 경자년 전투에 대한 다음의 비문이다.

(영락)10년 경자에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관군이 이르자 왜적이 물러가므로,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렀다. 성이 곧 귀순하여 복종하므로, 순라병을 두어 지키게 했다, 신라의 농성을 공략하니 왜구는 위축되어 궤멸됐다…

후소샤와 지유샤 교과서는 똑같이 광개토대왕의 신묘년 기사를 해석과 함께 소개하여 광개토대왕의 군대와 싸운 군대가 임나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야마토정권의 군대인 것처럼 서술했다. 그러나 단지 '왜'로만 표현되어 있는 군대가 과연 야마토 정권이 보낸 군대인가 하는 것은 확실치 않다. 또한 신묘년 조를 둘러싸고 여러 주장이 있는 데도, 여기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이 비문의 내용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제시하고 있다.

넷째, 임나일본부가 만약 가야를 200여 년간 통치했다면, 가야 땅에서도 왜와 관련한 유물이 쏟아져 나와야 한다. 일례로 낙랑이 수백 년간 지배했던 평안도 지역에서는 중국 한나라 지배계층의 사치품들이 많이 발굴됐다. 그러나 가야 땅에서 나오는 것은 장기간에 걸쳐 가야가 자체적으로 발전해 나간 가야적인 유물들만 출토되고 있다.

다섯째, 가야는 예로부터 철의 왕국이었다. 지금도 가야 땅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유물은 철로 된 투구, 갑옷, 철제검, 철정이라는 철덩어리들이다. 특히 환두대도와 함께 철제 갑옷과 철제미늘쇠(돌출된 부분으로 달리는 적의 기병을 끌어 떨어트리는 무기)가 발굴되는 것은 가야가 군사적으로도 강한 나라였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임나일본부설은 이미 1920년대부터 일본 학자들에 의해 부인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 학자가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로, 그는 임나일본부를 기록하고 있는<일본서기>가 얼마나 설화적 이야기로 가득찬 사서인가 하는 것을 논리적인 고증을 통해 입증했다. 그 후로부터 최근까지 일본 학자들은 임나일본부의 성격을 지배기관이 아니라, 왜 왕권이 한반도의 선진문물을 적극 수용하기 위해 임나에 파견한 외교적인 성격을 띤 사절단, 혹은 왜인들을 초빙한 가야 여러 나라들의 외교기관으로 인식하고 있다.

한국 사학계에서 임나일본부와 관련한 대표적인 연구주자는 북한의 김일성대 총장을 역임한 김석형과 언론인 출신의 사학자인 천관우를 빼놓을 수 없다. 김석형은 일본 측이 임나일본부설의 결정적 증거로 주장하는 칠지도에 대한 해석을 백제가 왜에 하사한 것으로 뒤집음으로써 한국 사학계의 반격을 선도했고, 천관우는 임나 기록의 주체를'왜'가 아닌'백제'로 해석하여, 왜 계통의 용병을 거느린 백제가 369년부터 562년까지 북부 가야 지역을 지배했다는 학설을 내놓아 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재일 사학자 이진희는 문제가 되는 광개토왕비의 신묘년 기사를 일본 군부가 석회를 발라 위조했다는 주장을 내놓았고, 그 후 이 주장에 대해 한중일 역사학계가 각각 다른 주장을 펼치면서 논란의 열기는 현재까지 식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 사학계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허구적인 학설로 생각되고 있다. 삼국사기는 물론 삼국유사에도 전혀 거론되고 있지 않으며, 여러 가지 정황과 고고학적 증거로 볼 때도 임나일본부설은 인정될 수 없는 것이다.

2001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사태를 계기로 양국 정상간 합의에 따라 2002년 출범한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2008년 12월 도쿄에서 열린 합동심포지엄에서, 임나일본부설은 사실상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 사실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공동 역사교재에는 어떻게 쓰였을까?

왜국은 478년 중국 송의 황제에게 책봉을 요청했다. 송 황제는 왜국 부(武)왕에게 "사지절 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 왕(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辰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그렇다면 신라나 가라는 왜국의 지배 아래 있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칭호에 기록된 지역 이름과 실제 지배는 일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주보는 한일사Ⅰ> p.124~125

임나일본부설은『마주보는 한일사Ⅰ』에서 전혀 그 내용을 서술하지 않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마주보는 한국사Ⅰ』에서는 송서 왜국 전에서 武왕에게 내린 칭호가 그렇게 된 이유를 설명하면서, 우회적으로 신라나 가야가 왜국의 지배하에 있지 않았다고 명시하고 있다.

일본열도에 철기 및 제철 기술을 전하는 데 가장 직접적인 역할을 한 것은 한반도 남부의 김해를 중심으로 하는 가야지역이다. 3세기 말경 왜는 가야지역에서 생산된 철 원료와 철 제품을 받아들여 사용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의 철 교역은 일본열도에서 직접 제출을 할 수 있게 된 5세기말, 6세기 초까지 지속됐다. <한일교류의 역사> p.50

한일교류의 역사』에서도 임나일본부설은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다. 단지 한일 양국 고대 교류사의 한 부분으로 일본열도에 철기와 제철 기술을 전해 준 나라가 김해를 중심으로 하는 가야지역이었으며, 일본열도는 제철 기술이 5~6세기 초까지도 아직 발달하지 않아, 한반도에서 들어오는 철 교역에 의존하여 철제 무기를 제조했다는 사실을 기록함으로써, 가야에 일본보다 앞선 선진문화가 존재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위 글은 동북아재단에서 2009년 발행한 책 <과거를 넘어 미래로-일본 교과서 역사 왜곡 편>에 실린 글으로, 저작권은 동북아재단에 있음을 밝힙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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