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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대학생과 대학을 욕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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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누가 대학생과 대학을 욕하는가

[대학의 교육 불가능⑥·끝] 기업화된 대학, 잔인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교육공동체 벗'이 발간하는 <오늘의 교육> 2호(2011년 5·6월)의 특집 기획 '대학의 교육 불가능'을 '교육공동체 벗'의 동의를 얻어 전재한다.

<오늘의교육>은 격월간 교육 전문지로 '공교육 중심, 교사 중심의 교육 담론에서 벗어나 다양한 교육 주체들이 참여할 수 있는 교육 전문지'를 지향하고 있다. '교욱공동체 벗'은 협동조합을 모델로 삼고 있는 비영리단체로 올해 1월 창립했으며 <오늘의 교육>은 '교육공동체 벗'에 조합으로 참여하면 받아볼 수 있다.

2호 특집 '대학의 교육불가능'은 창간호에 실린 '2011년 한국 교육, 야만의 지형도를 그리다'의 두번째 기획이다. 총 6회에 걸쳐 연재될 이들 글에서는 대학생, 대학원생들이 자신으 체험을 중심으로 대학의 문제를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박복선 편집위원장은 "이제 대학은 신자유주의적 모순이 전면적으로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공간이 됐다"며 "창간호에서 주로 초·중등교육을 통해 '오늘의 교육'을 조망했다면 이번 호에서는 '고등 교육'을 통해 야만적 현실을 드러내고자 했다"고 기획의 취지를 소개했다. (편집자)
'대학의 교육 불가능'
☞ ①
"학부생 인질 잡힌 대학원생 등록금,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 ②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 가난할수록 공부할 수 없는
☞ ③ '스펙 괴물'이 된 대학생의 시한부 인생
☞ ④ "접대 자리엔 인문학 전공자 노래 한 곡이 효과적"

내가 다니는 대학을 생각하며…

나는 박사과정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대학원생이다. 나에게 지금 다니고 있는 대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들은 깨끗하게 정돈된 공원 같은 길들과 잘 가꿔진 잔디, 무엇보다 야경이 아름다운 캠퍼스, 길거리를 이동할 때도 영어로 대화하는 학생들의 모습이다. 그리고 영어로 진행하는 수업, 동남아·아프리카·중국·일본·러시아 등에서 온 '인터내셔널 스튜던츠', 삼성·LG·포스코 등의 자금으로 지어진 건물들, BK21 연구원이 되어 실적과 프로젝트 때문에 정작 읽어야 할 책들은 읽지 못하고 늘 바쁜 대학원생들, 프로젝트를 위해 수업을 소홀히 하는 교수들…….

얼마 전 카이스트 대학생들이 연달아 자살을 했다. 징벌적 등록금, 영어 수업에 대한 스트레스가 이야기되면서 순간 사람들이 '서남표 죽일 놈'을 외친다. 그러나 이런 서남표에 대한 나치식 비판을 잠시 접어 두고 대학이 한국 사회로부터 받는 압력이 어떤가를 살펴보자. 정년 경쟁을 해야 하는 교수들은 정부와 기업의 프로젝트를 수주해서 실적을 쌓는 것이 자신의 존립 근거가 되고, 대학생들은 영어와 취업에 대한 압박, 대학원생들은 BK21로 인한 실적 관리 압박, 그리고 인문학과 교수들은 인문한국HK 프로젝트를 수주하기 위해 혈안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 초등학교 교실 뒤편에 '나는야 독서왕'이라고 쓴 전지를 붙여 놓고 학생들이 책 한 권 읽을 때마다 스티커를 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신임 교수를 중심으로 영어 강의에 대한 스트레스도 심해졌다. 신규 교수 채용 시 영어로 수업을 진행할 수 있는가가 중시되며, 영어로 진행하는 수업의 비중이 얼마나 높은지가 대학의 국제화 지수를 평가하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대학들에게 왜 진로를 다양화하지 못하느냐고 욕하기는 쉽다. 대학생들에게 왜 대학을 간판 따는 곳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느냐고 비판하기는 쉽다. 교수들에게 왜 교육을 경시하고 프로젝트에만 목을 매냐고 비난하기도 쉽다. 그러나 그전에 그럼 왜 대학들은 하나같이 이런 야만(?)적인 행동을 하는 것일까? 이 시대가 대학에게 학문을 하도록 허용하는가? 지금 대한민국에서 대학 졸업장이 학생들에게 기회의 땅을 보증해 주고 있는가? 교수들이 실적 경쟁, 프로젝트 수주가 아니라 학생 교육에도 힘을 쏟을 여유를 주고 있는가?

신자유주의?! 이미 진부해진 대학에 대한 이야기

한국 사회는 IMF 시대의 충격을 뒤로하고 사회 모든 분야에서 구조조정이라는 이름하에 신자유주의 체제 속으로 빠져들었다. <대학의 몰락>에서 서보명이 지적하는 것처럼 이전까지 대학은 시대정신을 비판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며 형식적으로라도 자본주의의 질서를 비판했지만, 지금 대학은 시장의 요구에 응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현란한 광고를 만들어 내고, 대학 서열 올리기 경쟁에 몰두하며, 더 나아가 스스로 상품이 되어 마케팅 전략을 수립한다. 그런데 이렇게 시장화된 대학들이 벌이는 무한 경쟁은 필연적으로 독점을 낳았고, 독점은 더 큰 시장과의 경쟁을 추구해 결국 끝없는 독점을 향한 의지가 되었다. 이것이 한국에서 각 대학들이 대학 경쟁력 향상이라는 이름으로 진행한 개혁들이 왜 고도의 학벌 카르텔을 형성하는 쪽으로 갔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국가보다 기업이 우선하는 신자본주의 사회에선 대학 역시 시장이라는 개념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를 요구받는다. 한국의 대학들은 지금 산업과 협력해 시장성을 확보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는데, 시장성과 생산성이 뒤떨어지는 학과나 학교는 다양한 제재를 감수해야 한다. 대학이 기업화되었다는 것은 또한 생산의 과정을 사기업의 방식으로 관리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대학을 포함한 학교에서 '평가'라는 용어가 시대적 화두로 등장했는데, 이러한 변화의 이면에는 교육과 배움의 과정을 과학적인 차원에서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철저하게 관리하겠다는 발상의 전환이 깔려 있다.

이제 더 이상 대학의 주체는 교수와 학생이 아니며 기업형 행정 관리 체제가 대학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학문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배움을 통해 스스로를 발견하려는 사람들의 공동체, 소비자가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는 언제나 대학이 추구해야 할 이상이었지만, 지금의 대학은 그런 이상까지도 소유하지 못한 죽은 공동체가 돼 버렸다.

기업화된 대학에 대한 소묘

기업화된 대학에 대한 분석은 이미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서동진의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김동애 외 40인이 지은 <지식사회 대학을 말한다>, 서보명의 <대학의 몰락>, 클라이드 W. 바로우의 <대학과 자본주의 국가>, 제니퍼 워시번의 <대학 주식회사>와 같은 책들이 국가, 자본 그리고 대학 간의 관계를 분석했고 여러 학술지에도 이와 관련한 주제의 글들이 발표되었다. 이러한 연구물들에서 핵심적인 내용은 대학이 시장, 기업과 어떤 관계를 가지며 어떻게 자신의 위상을 변화시켜 왔는지와 최근 대학의 특성인 '기업화' 모습을 분석하는 것이다.

여기서 기업이란 단순히 조직의 형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행위 양식이자 행위 범주로서 의미를 갖는다. 다시 말해 대학이 기업화됐다는 것은 단순히 대학이 시장의 논리에 따라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넘어, 대학이라는 조직 속에서 구성원들이 느끼는 주관적 정체성을 포함하는 의미, 즉 통치의 양식이 변화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서동진이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에서 지적했듯이 대학생들은 자기 인생을 기업으로 대상화시키고 그를 위해 자기를 기업가로 주체화한다. 그래서 대학 생활 동안 그들은 1인 기업가로서, 브랜드로서 자신을 인식하고 관리하는데 이러한 기업가적 행위 양식의 핵심은 자율 능력과 책임 의식, 그리고 도전 정신과 창의성이다.

기업가적 주체로서 대학생들은 정치와 행정이 부패와 무책임, 무능으로 대표되므로 개혁적인 기업가 정신이 경제적 행위의 장을 넘어 행정을 비롯한 모든 사회적 삶의 장으로 확장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총학생회 운영을 비롯한 학내 의사 결정 과정에서 이러한 의식이 반영된다. 그래서 기업가 정신이 사회적 삶의 장으로 확대된다는 것은 대학 내에서 민주적인 의사 결정을 부정하고 혁신적 CEO에게 대학 경영을 일임하는 전문가적 체제를 선호하도록 한다. 대학생들은 기업화된 대학 속에서 야망, 타산, 개인적 책임과 같은 실존을 안내하는 일련의 규칙을 따르며 자기 인적 자본을 최대화하려 애쓰며, 자신을 미래로 투사하고 자신을 변혁하려 애쓴다. 이렇게 기업화된 대학의 시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대학생들은 자기 행복을 스스로 북돋워야 하는 개별화되고 능동적인 주체로 스스로를 고무시키도록 요구받는다.

기업화된 대학 : 비판적 인문학의 몰락

대학은 상아탑이라고 불린다. 영어 ivory tower는 1869년 프랑스어 tour d'ioire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상아탑은 '현실과 거리가 먼 정신적 행동의 장소'라는 의미로 대학이 사회 외부의 기관임을 알려준다. 그러니까 전통적 의미에서 오늘날 한국 대학은 상아탑이 아니며, 절망의 상아탑이 되고 말았다. 이것은 비단 한국 대학의 운명이라기보다는 세계 각각의 대학이 걸어온 운명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 중심에 자리를 못 잡고 표류하는 인문학이 있고 인문학자가 있으며 인문 정책이 있다.

그러나 눈을 조금만 돌려 보면 인문학이 장사가 덜 된다는 것은 편협한 생각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서점에 나가 보면 인문학 관련 책자가 홍수를 이루며 CEO나 기업의 입장에서 인문학은 확대일로에 있다. 기업은 사람들 사이의 효과적인 소통을 잘 생산해 내는 기업으로 진화하고 있으며 다양한 인간들의 삶의 가치들을 생산해 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앎 없이는 기업 활동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고 기업가들이 인문학과 맺는 관계는 점점 긴밀하고 복잡해진다. 이것이 최근 스티브 잡스 효과라고 불리는 현상과도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기업의 대응이 이러하다면 국가의 대응은 어떠한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조정환은 대학의 산업화와 산업에의 종속, 그리고 신자유주의화는 대학의 위기를 가져왔다고 본다. 그는 대학의 위기를 고찰할 때, 우선적으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인문학 교육의 위기라고 진단한다. 대학의 인문학과는 폐과되거나 다른 학과로 통합되었고, 혹은 실용 교육으로 전락해 교과 내용이 축소, 폐지, 변형되었다. 이와 더불어 인문학 계열 교수들의 일자리는 크게 축소되었다. 그만큼 인문 계열에 소속된 학생들의 미래는 불투명해졌고 교수들의 연구나 생활은 불안정해졌다. 인문학 계열로 진학하려는 학생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자연스런 결과이다. 하나의 사회 담론으로서 인문학 위기론의 핵심에는 이렇게 학생 축소, 교수직 축소로 위기에 처한 대학 인문학과들의 비명이 들어 있다.

그래서 국가는 인문한국이라는 프로젝트를 실시했다. 인문한국은 시장 지배가 가져온 위기 속에서 인문학 교수들을 살리는 것, 다시 말해 대학이 보호하지 못하는 학교와 교수, 학생을 국가의 힘으로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데 보호는 지배의 이면이라고 했다. 즉 국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아 연명하는 인문학과가 국가의 권위에 종속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대학이 산업에 종속되는 것은 이런 식으로 인문학의 국가에 대한 종속을 불러온다.

그러니까 인문학의 위기를 고찰하기 위해서는 조정환이 말했듯이 기업을 위한 인문학과 국가를 위한 인문학이라는 두 가지 경향이 합류하면서 나타나는 인문학의 우향우 현상을 고찰해야 한다. 우선 인문학의 국가에 대한 종속 현상을 살펴보면 대학교수들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보다 학술진흥재단에서 프로젝트를 받아 내는 일에 더 큰 관심과 노력을 쏟는다. 이 프로젝트들이 국가의 감독을 받는 한, 이 프로젝트들의 선정이, 넓은 의미에서 국민의 형성과 통제라는 국가의 기능과 목적에서 벗어나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모든 프로젝트는 방법론의 차이는 있지만 프로젝트를 시행하는 기관(기업이건, 시장이건, 국가이건)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맞춤 연구'이기 때문이다.

또한 위로부터 주어지는 재정 지원 방식은 대학 사회 내에 국가와 유사한 위계질서를 복제한다. 대학의 정교수와 비정규 연구직 사이에 위계 구조가 확립되며, 교수와 학생 사이도 마찬가지다. 학생 사회에서도 박사과정과 석사과정 사이에, 대학원생과 대학생 사이에 위계가 발생한다. 또한 각 프로젝트는 인간 사회 및 학문 활동의 제 영역에서 국가의 필연성과 필요성을 대전제로 삼을 뿐만 아니라 국가 형태에 반대하는 경향에 대한 비판과 공격을 집단적으로 수행한다. 곁가지이지만 우리가 보편적 복지 논쟁을 하면서 경계해야 할 태도가 이러한 국가에 대한 관점이다.

기업 인문학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윤 목적에 인문학을 종속시킨다. 지식 생산의 측면에서 기업 연구소들은 주로 경제, 경영적 주제에 집중해 왔지만 점점 기업 연구소들의 연구는 사회 전략, 정치, 정책 등 인문적 영역으로 확대된다. 이러한 기업 문화 조성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 인문학은 이미 대학 생활 깊숙이 파고들어 와 있다. 기업들은 이미 주요 대학들을 장악했고 적어도 대학을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놓임으로써 학생들의 의식은 상당한 정도로 친기업적이고 친자본주의적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건희가 세워 준 건물에서 컴퓨터를 하고, LG-포스코가 세워 준 건물에서 세미나를 하며, 이명박 라운지에서 대화를 나누는 대학생들에게 더 이상 청소 노동자들은 동일시의 대상이 아니라 내가 닮지 않아야 할 실패의 표상이다. 그런데 이 가시적인 형태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업 문화가 삶의 모든 영역으로 깊이 파고들어 내면화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신자유주의가 인문학의 위기를 야기했다는 지적은 일면 타당하지만 정확한 해석은 아니다. 오히려 신자유주의 시대에 인문학이 국가 인문학과 기업 인문학이라는 측면으로 진화했고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인문학은 기업과 시장, 국가에 의해 폭넓은 토양을 제공받으면서 부풀려지는 효과가 있다.

인문학의 위기는 조정환의 지적처럼 비판적 인문학의 위기에 있다. 즉 인문학이 시장의 인문학, 국가의 인문학이 되면서 글로벌 경쟁, 아웃소싱, 노동 체계의 복잡화와 노동의 인지화, 지구화, 이주노동자 등 기업과 국가 안팎의 다양한 문제들을 인문학적 사유를 통해 극복해 나가는 신자유주의적 발전 전략의 일부로 배치되고 있기 때문에 인문적 능력과 지향이 있는 교수들과 학생들이 대학을 벗어나 그 바깥에서 공장이나 농촌이나 거리, 사회 현장에서 혹은 그 현장들과 내밀한 유대를 통해 인문학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경영학부, 대학의 심장이 되다!

전통적인 대학은 전문직Professional을 양성하는 세 학부가 있었는데 바로 신학, 법학, 의학부이다. Business School, 즉 경영학부는 20세기에 들어와 네 번째 전문학부 또는 대학원으로 자리 잡았다. 구체적인 학문의 내용과 대상과 목적이 없는 경영학이 어떻게 전문학부가 될 수 있었을까. 경영학이 등장해서 중심적인 학문으로 자리 잡는 20세기의 역사는 신학이 주변으로 물러나는 시기였다. 또 오래 전 대학에서 볼 수 있는 신학의 역할 즉 학문의 궁극적 의미를 부여하고, 대학의 제도를 통제하고, 대학의 목적을 부여했던 역할을 자본주의의 신인 시장을 대변하는 경영대학이 대체하게 된다.

경영학은 세계의 경제를 움직이는 데 제일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실제로 그 교육을 받은 기업과 금융권의 엘리트들이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매니저로 세계 경제를 좌우하고 있다. 그들은 계산적 합리성을 추구하지, 윤리나 역사는 주된 고려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자본주의의 재난은 그 교육을 받은 자들이 고안해 낸 돈벌이 게임 때문이라는 게 중론이다.

경영이 대학의 심장이 됨으로써 구성원 모두는 경영자가 된다. 대통령은 국가 경영, 시장과 도지사는 도시 경영, 총장과 교장은 학교 경영, 병원장은 병원 경영, 주부는 가정 경영을 한다. 이제 통치, 행정, 운영과 같은 패러다임은 경영에 기반한 패러다임으로 전환된다. 경영패러다임하에서는 개인 또는 조직의 목적 달성을 위해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결합하는 일체의 행동이 핵심이 된다. 즉 경영은 공병호가 말한 것처럼 인간에 관한 것으로 인간의 가치관 및 성장과 발전에 관계되고 이 시점에서 경영학은 인문학이 된다.

대학이 기업화되면서 자기 계발, 성공이라는 화두가 핵심이 되었다. 대학생들과 교수들은 모두 성공과 자기 계발을 내면화하며 누구에게 고용되었다는 사고를 넘어서서 각자가 기업이며 그 기업의 경영자로서 자기 경영을 하나의 생활이자 신앙으로 삼아야 한다. 더 이상 구성원 모두는 피고용자가 아니며 관리의 대상도 아니다. 각자는 자신의 서비스에 책임을 지는 개인 기업을 경영하는 사업자이며 기업의 파트너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다른 사람과의 경쟁보다 자신이 열정과 재능에 따라 스스로를 개발함으로써 경쟁력을 높여 가지 않으면 곧 하류계층의 일원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는 압박을 받는다. 이른바 혁신에 대한 강박증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정열적, 정력적, 지배적이라고 여기며 권력과 지위 및 부를 좋아하고 타인을 설득시키는 데 흥미를 가진 기업형 인간이 대학을 통해 길러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규정하는 기업형 인간은 노동자와 자본가라는 이분법적 도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존재이며 대단히 유동적이고 동태적으로 변화해 가는 존재이고 천의 얼굴을 가진 집합적 존재이다. 기업가적 인간은 무수히 많은 익명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시장경제 속에서 조정, 중재, 혁신, 그리고 불확실성의 방어를 주로 담당하는 사람이다. 대학생들은 입학 당시부터 시스템 개선이나 비용 관리를 통해 안정적으로 현 상태를 유지해 나갈 수 있는 관리형 인재들이 아니라 남들과 다른 방식, 창의적 사고, 발상의 전환을 통해 남들이 보지 못하는 새로운 기회에 과감히 도전하는 기업가형 인재들이 되도록 요구받는다. 자연스럽게 경영 혁신, 전략 경영, 학습 조직, 네트워크 조직, 실행 공동체, 수평 조직, 권한 위임, 멘토링, 리더십, 성과 배분, 역량 중심 인적 자원 관리에 익숙해지고, 피터 드러커, 톰 피터스, 구본형, 공병호의 목소리가 대학을 울린다.

또한 최근 기업이 기증하여 설립된 대학의 화려한 건물은 학생들의 의식을 마비시키는 양식이 되고 있다. 대학에 삼성관, LG포스코관, 이명박라운지 같은 건물들이 생기면서 외국 대학에서도 보기 어려운 신축 건물의 화려함에 대학생들은 압도당한다. 대학 정문을 들어설 때부터 시설 하나하나를 이용하면서 삼성 의식, 기업 의식을 내면화하게 된다. 그 중심에 경영대학이 있다.

혁신과 기업가 정신의 정수가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이건희였고, 이들은 대학을 지배하는 신이었다. 대학 도서관에서 스티브 잡스의 프레젠테이션 기술을 읽는 대학생, 빌 게이츠를 읽는 대학생들에게 물가 상승률을 압도하는 등록금 인상에 대한 불만은 돈이 없는 것은 창피한 것, 자기 계발의 실패라는 의식으로 대체되고, 삼성관과 LG포스코관과 이명박라운지, 하나스퀘어 빌딩은 단순한 건물이나 시설이 아니라 하나의 상징 정치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며 자본주의의 은유가 된다. 각 대학은 삼성 건물을 유치함으로써, 아니 삼성과 이건희의 장학금을 받음으로써 - 아니 삼성 장학생이 되려 함으로써 - 그렇게 기부를 받을 만큼 우리 대학이 명성과 힘이 있는 것이라는 상징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상징으로서 건축은 벤야민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서술한 것처럼 기업이 자본을 앞세워 현실을 가리는 베일 역할을 자처하며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그렇기에 아케이드가 상품들의 신전이요 자본주의적 상업의 공간인 것처럼 대학교는 성공한 CEO들의 성지이며 신전으로 변했다. 대학이라는 신전에서 학생들은 돈만 있다면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는 것을 내면화한다. 영화에 나오는 영웅들을 보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깊은 신뢰감에 빠지게 되며 베일에 가려 꿈을 꾸게 되는 것처럼 대학생들은 기업가들이 기증한 건물, 그들이 제공하는 장학금을 받고 미래에 그들이 운영하는 기업에서 취업을 꿈꾸며 그 화려한 건물 아래에서 대학생들의 의식은 마비된다. 그래서 이건희,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는 대학생들의 페티쉬이며 주물이다. 그것들은 대학생들의 꿈이 투사되어서 대학생들의 소망을 대신한다.

그들은 대학 입학이 상당 부분 개인의 능력으로 취득되었기에 그것을 취득하는 데서 근본적인 제약이나 장벽은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한다. 명문대 학생이 됨으로써 교육은 우리 시대의 가장 세속적인 믿음으로서, 사회주의를 대체하며, 교육 복음education gospel이 부상한다. 교육에 근거한 차별은 무시되고, 개인의 능력에 의해 취득된, 평등한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 폐쇄적 공동체 내에서 자신의 학벌이 계급과 신분처럼 세습되도록 사회적 관계를 구축한다.

가난한 자들이 배제되는 특권층의 섬

많은 사람들이 디즈니를 찾는다. 가족들은 특별 전시관에 입장하기 위해 종종 길게 줄을 늘어서서 기다린다. 그러나 그들이 기다린 줄에는 눈에 보이는 강제성은 없으며 분명히 매끄럽고 소동 없이 평화스러운 행동이 유지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디즈니 프로덕션의 관리자와 소비를 손쉽게 하고자 하는 소비자들의 욕구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범죄학자 클리포드 시어링과 필립 스테닝은 이러한 디즈니월드를 원형감옥식 감시 능력의 현대판 구현이라고 말한다.

디즈니월드는 통제 시설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 통제는 예방적이어서 포착하기 힘들고 협력적이며 외관상으로 비강제적이며 합의에 의한 것 같이 보인다. 감시가 팽배하지만 오웰식 국가의 노골적인 통제와는 다르다. 그 근원이 정부가 아니며 그 수단도 독재자가 아니다. 통제의 수단이 되는 규율의 명령도 중앙 국가의 일원화된 명령이 아니라 디즈니 월드의 봉건영주 방식의 관할 영역과 공동 관리지, 복합 상가 등을 책임지고 있는 사적인 관계자들이 규정한 분산되어 있는 별도의 명령이다. 현대적 규율 안에서 통제는 오웰이 상정했던 것만큼 순조롭지만 그 특징들은 판이하다. 사람들은 오늘날 공동의 권력이 제공해야 할 상품을 소비하는 즐거움 때문에 규율을 준수하게끔 유혹당하고 있다.

오늘날의 대학 또한 분산적이고 합의에 따른 원형감옥이다. 산업화된 대학 안에서 모든 것은 산업화되고 대학은 미래의 CEO를 꿈꾸는 자들의 사교 클럽이 된다. 그러나 부르디외가 '개인의 자유의 소망 아래 세워진 이 경제 질서의 궁극적 토대는 사실상 실업, 불안정 취업, 해고 위협에 의한 공포 등의 구조적 폭력'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대학은 자본을 소유하지 않은 자들에게 어떤 공간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원형감옥이다.

이전의 중앙집권화된 위계적 감시 장치는 피감시자들을 서로 단절시켜 놓을 수 있는 능력에 의존했고 벤담의 감옥은 일부러 재소자 간에 의사소통을 못하게 설계되어 각 재소자는 감시관하고만 소통할 수 있어서 외관상으로는 개별화된 관계만 가능했던 반면, 새로운 감옥으로서 대학은 이러한 원형감옥의 조잡함과 야만적인 요소들을 피하면서 소비자들을 점차 개별화한다. 마케팅이 개인의 기호에 집중하듯이 원형감옥식 시장에 의해 차이와 구별 의식이 주도면밀하게 평가되고 이용·판매되면서 사회적 유대는 약화된다. 피감시자들은 분리되고 대학 사회는 단편화되지만 예전처럼 경찰봉이 등장하는 강압적 방식에 의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원형감옥식 눈길은 종이를 프린트 할 때 너에게 돈이 얼마나 충전되어 있는지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며, 언제 프린트 머니를 충전해야 할지 안내하는 배려심을 보인다.

자본이 만드는 평등한 공간은 돈이 없는 대학생들, 학자금 대출로 연명하는 대학생들에게는 손에 잡히지 않는 불평등을 생산한다. 이것은 대학에서 사회계층에 기반한 배제는 눈에 띄지 않지만 비용 접근성의 관점에서 대학은 점점 다양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며 이는 일종의 구조적 폭력으로 기능한다. 그래서 원형감옥의 감시의 눈길은 형식적으로 대학생, 대학원생들이 각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이해하고 그러한 욕구를 채워 주는 방식에 근거하여 굉장히 유연성을 갖는 것 같지만, 돈이 없는 학생들에게는 매우 살벌한 시스템이다. 이에 더해 학교 밖에서는 재개발로 월세가 오르고, 등록금, 물가가 오르면서 이들은 캠퍼스의 원형감옥에서 거주 이전의 자유를 제한받는 거주자들이며 유배자들이 된다.

그러나 기업화된 대학, 지성이 산업화된 대학에서 이러한 돈 없는 자들의 고통과 같은 것들은 타자화된다. CEO들의 지침서에는 거론되지 않고, 부는 자본의 한계 생산성과 노동의 생산성이 고르게 자신의 몫을 나눠 갖는 것이므로 빈곤의 문제는 고려되지 않는다. 노동 강도와 노동 시간을 따지는 것은 가난한 약자들의 나약한 행동으로 묘사되고 변화를 거부하는 집단으로 매도되기 때문에 무한 경쟁 시대에 창의적인 사고를 갖고 기업을 위기에서 구한, 기업가적 정신이 영웅을 넘어 신의 반열에 오르며 대학의 지성은 성공한 자들이 가진 남다른 능력, 역량으로 구조화된다.

기업화된 대학의 학생들 : 그들이 꿈꾸는 우울

한국에서 대학은 근본적으로 발전주의 국가 모델에 따라 국가의 감독이라는 논리로 학문의 자유를 지속적으로 위협받을 수밖에 없었다. 국가 형성기에 설립된 우리나라의 대학은 근본적으로 물질적인 이익이 보장되는 부문만을 좇았다. 이들은 발명을 촉진하고 산업과 전문 분야에 실질적 이익을 가져다주는 기술을 개발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1987년 이후 국가권력이 민주화되고, IMF 이후 국가 주도의 발전주의 전략이 수정되면서, 대학은 자율성을 획득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대학은 부유한 후원자들(기업)의 정치적 성향에 굴복해 갔다.

오늘날 대학을 움직이는 것은 거의 대부분이 기업이며, 이들은 백화점처럼 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대학생들은 쇼핑객처럼 대학에 들어와 상품을 사고, 세일을 노리면서 기업이 인증하는 명품을 구매하려 애쓴다. 교육기관들은 겉으로 보이는 물질적인 번영의 정도에 따라 순위가 매겨지고 있으며, 당장의 필요에 따라 대응해야 한다는 압력 앞에서 학문의 이상은 불확실해지고 그 입지를 잃어 가고 있다. 대학이 기업처럼 특허 프로젝트, 소유권 논리에 포섭되면서 제약 없이 연구자들과 대중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지식과 아이디어는 베버가 관료제를 비판하면서 사용했던 비유적인 개념인 새장IRON CAGE처럼 특허와 라이센스의 규제를 받는 독점권이라는 우리에 갇히게 되며, 지식 공유제를 사유화하고자 하는 세태에 포섭당한다. 자연스럽게 대학의 연구 풍토에서 협업은 종말을 고한다.

이렇게 해서 시장화된 대학은 다시 종교화되고 종교화된 대학은 다시 신화화되는 변증법적 과정을 반복한다. 신화는 한 시대의 핵심 가치를 이야기 형태로 표현하면서 응축된 의미로서 상징, 그리고 설득과 동의의 전략으로서 수사 기법을 활용하는데, 이러한 신화는 어떤 사회나 지배자의 핵심 가치관을 표현하는 이야기나 사건이다. 이성보다 우위에 선 감성이라는 형태로 이야기를 표현하며, 모든 이들이 희망하는 이상향, 즉 금융화된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전파하고, 환상과 자기기만의 요소를 은폐한다. 이러한 형식으로 만들어진 신화는 대학생의 사고의 틀을 짜는 집단적 개념, 믿음, 가정, 아이디어, 습성, 이해 시스템을 생산하기 때문에 사회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구조 속에서 작동한다. 그런 점에서 이 신화는 프로파간다이다. 즉 신화는 대학생을 자연의 질서를 대행하는 신을 자처한 왕(CEO)을 중심으로 통합하고 개인주의적 학생들에게 권위를 부과하는 사회적 핵심 요소이며, 자본의 공공성을 구성한다. 따라서 신화 속에서 대학생들은 변화를 부정하고 현 상태의 지속을 강화하며 이 자본주의 신, 시장의 신의 제자가 되기를 희망한다.

신화 속에서 탁월한 수사법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특히 탁월한 수사법은 이성적인 사고와 함께 인식의 틀을 짜게 되는데 신화를 접한 대학생들에게 감정을 통해 확신에 이르게 하는 감정적 설득 작용을 강화하며 은유적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수사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한 대로 확신할 수 있는 지식episteme이 아니라 의견doxa에 관한 것으로 에토스ethos, 로고스logos, 파토스pathos가 종합된 것이다. 그래서 신화와 상징, 수사는 서로 얽혀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 시장의 신화 속에서 수사적 전략은 독자들이 신화를 접하면 특정 해석의 틀을 적용하도록 유도하며 독자를 특정 입장과 태도로 초대하며 신화 안에서 보는 세상은 전에 보이던 것과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권력과 특정 관점을 생산하는 프로파간다이다.

신화가 프로파간다의 중심이라면 상징은 그 겉옷에 해당한다. 그래서 상징 구조가 없는 신화는 신화가 아니다. 이처럼 신화는 풍부하게 상징을 담고 있다. 상징은 사상과 달리 시각적이며 정보가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그 자체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함께 채워진 무수한 연상 관계까지 지시하는 역동적인 관계항이기 때문에 상징은 가치를 표현하는 수단이며 생각의 주요 매개체이고 경험을 규정짓는다. 그래서 어떤 의사소통이 일어나려면 상징이 구성되어야 한다. 신화 속에서 상징의 기법들이 사용되면서 신화는 대학 구성원들의 관심을 끌며 장기간 기억 속에 각인된다. 그리고 상대방의 마음에 말을 걸며 비판력과 분별력을 제거한다. 그래서 상징의 핵심은 속기술, 즉 복잡한 아이디어를 단순한 형태로 요약하는 데 있다. 이러한 상징, 수사는 신화 속에서 서로 영향을 미치며 감정, 이데올로기, 가치관을 통합하는 프로파간다이다.

서보명의 말처럼 모든 학문은 결국 믿음에서 시작한다. 지식은 가치중립적일 수 있지만, 그 내용이 가르쳐질 때는 이미 학문이나 학교라는 제도권의 믿음 체계하에 다듬어진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믿음은 종교와 연관된 개념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국가주의와 과학주의하에서 교육이 전파하려는 믿음은 종교적 믿음과 본질적으로 같다. 대학 또한 그 교육의 한계에서 자유롭지 않다. 고등교육을 대변해 온 대학은 사회나 국가적 지원을 전제할 뿐 아니라 그 미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믿음이 더 크게 작용한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대학의 이념이 어떤 사회적 믿음에 의해 제도화되었는가를 살펴야 한다.

우리는 미래를 위해서 현재라는 시간을 희생하고 있다. 이 말은 불행히도 우리가 현재를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어떤 미래로 가기 위해 현재의 행복과 만족을 끊임없이 유예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미래라는 것을 누가 제시했는가? 내가 선택한 것인가? 전혀 그런 것 같지 않다. 대학생으로서 그들은 주입받고 기획된 욕망 속에 살고 있다. 그 기획된 욕망 속에서 미래의 부유함을 꿈꾸며 우울한 대학생들은 오늘도 기업이 된 대학을 배회하고 있다.

참고문헌
서동진(2009).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돌베개.
서보명(2011). 대학의 몰락, 동연.
제니퍼 위시번, 김주연 옮김(2011). 대학주식회사, 후마니타스.
클라이드 W. 바로우, 박거용 옮김(2011). 대학과 자본주의 국가, 문화과학사.
조정환(2011). 인지자본주의, 아우또노미아.
미셀 푸코, 정일준 옮김(1994). 미셀푸코의 권력이론, 새물결.
이희원 옮김(1997). 자기의 테크놀로지, 동문선.

정용주는 이메일이 서너 개쯤 되고 혈액형은 성격 파악 어렵다는 AB형인 교사입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조합원이지만 의식은 점점 노동자로부터 멀어져 갑니다. 물질적인 부자보다 마음이 부자인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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