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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패배 직후의 동향
2001년 4월 '자학사관'의 시정을 내걸고 문부성의 검정을 통과했던 새역모의 역사교과서는 같은 해 8월 애초 목표였던 채택률 10%는커녕 겨우 0.039%를 획득하는데 그쳤다. 새역모 관계자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4년 후의 복수와 승리를 다짐했지만, 초전에서의 패배는 새역모 내부 구성원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다. 게다가 채택전이 끝나자마자 터진 미국 '9.11사건'은 새역모는 물론 일본의 보수 우익 전체에 큰 파문을 던졌다. 결국 새역모는 분열로 내달았다.
9.11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놓고 일본의 우익은 적지 않은 혼란에 빠졌다. 일본 우익은 그 출발부터 서구(혹은 서구문화) 특히 미국에 대한 적대의식을 공통분모로 갖고 있다. 더구나 대일본제국의 패배와 좌절을 안겨주었고 천황제와 군대에 족쇄를 채운 현행 헌법을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미국이다. 따라서 그런 미국에게 과감하게 일격을 가한 이슬람의 테러는 내심 쌍수를 들고 환영하고 싶었을 것이지만, 주지하다시피 우경화의 기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정권은 출범 직후부터 노골적으로 친미 정책을 폈다는 것이 장벽이었다. 급기야 몇몇 단체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우익단체들은 9.11테러에 대한 논평을 자제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새역모도 이런 정황을 피해갈 수 없었고, 그 결과는 9.11테러에 대해 우호적인 언행을 주저하지 않았던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小林よしのり)의 축출로 이어졌다. 고바야시는 자신의 만화에서 9.11테러에 대해 "나는 이슬람 근본주의가 테러를 일으키는 심정의 일단은 이해가 된다. 이세(伊勢) 신궁에 미군이 주둔하고, 반라의 여군이 걷는 도중에 껌을 뱉는다면 테러도 하고 싶어진다. 미국이 사우디에서 한 것은 강압적이고 오만한 문화파괴이다"라고 전면적으로 공감을 표시했다.
급기야 반미를 놓고 새역모 관계자들은 심포지엄 석상에서 직접 격돌하게 되었다. 새역모가 2001년의 패배를 극복하고 운동의 재정비를 위해 마련한 제18회 심포지엄(2002년 2월)에서 새역모 명예회장 니시오 간지 등은 고바야시 등이 미국을 비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며, '미일동맹 외에는 선택지가 없다'는 논리로 고바야시를 압박했다. 이에 고바야시는 새역모를 '충미(忠美)·충견(忠犬) 보수'라 부르며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던 고바야시와 더불어 공민교과서 집필자였던 니시베 스스무(西部邁)가 새역모를 탈퇴했고, 그 대신에 후지오카 노부카쓰가 실질적으로 새역모의 '복수극'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후 새역모는 이라크 전쟁에 대한 고이즈미 수상의 지지 및 자위대의 이라크 파병 등의 대응방침에 전폭적으로 찬성한다는 의사를 기회 있을 때마다 밝혔다.
▲ 새역모에서 펴낸 후소샤 판 역사교과서. ⓒ프레시안 |
사실 후소샤는 2001년까지 흑자 기조를 유지했으나, 2002년과 2003년은 연속으로 적자를 기록했다. 2001년에 역사와 공민의 시판본을 합쳐 71만부를 시판했다고 후소샤가 밝혔으므로 2002년은 흑자를 유지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시판본 가격을 980엔으로 낮게 책정한 탓에 이익이 나지 않았으며, 71만부라는 숫자도 판매부수가 아니라 발행부수였다고 추측된다. 출판사로서의 후소샤의 경영 논리가 새역모의 발목을 잡은 형국이다.
2004년 검정에 제출할 교과서를 사전에 판매하겠다는 계획도 중지되었다. 새역모는 제5회 정기총회(2002년 7월)에서 역사교과서의 견본(2001년도 교과서의 개정판)을 『주니어판 역사입문』의 제명으로 2003년 7월부터 판매하여 "본격적인 역사논쟁을 전개"하겠다고 공언했다. 이 역시도 2003년 3월호 기관지에 의하면 중지되었다고 한다. 이유는 개정판 작성의 어려움이나 판매량의 저조 등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새역모에게 큰 타격이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제2차 분열극
2001년 새역모의 첫 출진은 참패로 끝났고,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2005년의 복수극도 결국 0.4%라는 저조한 채택률로 막을 내렸다. 10%를 확보하겠다는 후지오카의 장담은 재차 허언이 되고 만 것이다. 잇단 패배는 그 책임 소재를 둘러싼 공방전을 낳게 되었고, 결국 새역모의 주도권을 건 권력투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2005년 9월부터 니시오 명예회장과 후지오카 부회장의 연합체와 야기 히데쓰구 회장 일파 사이에서 실패의 원인과 처방을 놓고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해가 바뀌어 2006년 1월 니시오가 사임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이후 니시오는 거의 독자적으로 활동), 이어 2월 말의 이사회에서는 야기와 후지오카가 해임되고 회장에는 다네가시마 오사무가 취임했는데, 3월의 이사회에서는 회장에서 물러났던 야기가 재차 부회장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4월의 이사회에서는 다네가시마·야기와 더불어 이사 4명이 해임되는 대신에 새 회장 대행으로는 다카이케 가쓰히코(高池勝彦, 변호사)가 부회장으로는 후지오카와 후쿠치 아쓰시(福地惇, 다이쇼[大正]대 교수, 일본근대정치사)가 선임되었다.
이해하기조차 쉽지 않은 분열극이지만 그 내용보다 중요한 것은 이후의 사태이다. 즉 2006년 10월 22일 새역모에서 밀려난 야기 히데쓰구를 이사장으로 하는 일본교육재생기구(이하 '재생기구')가 발족한 것이다. '재생기구'를 떠받치는 핵심 구성원은 다름 아닌 일본 최대의 보수우파 단체 '일본회의'의 관계자이다. 따라서 위 분열극은 두 차례의 참패를 겪은 끝에 야기를 주축으로 하는 일본회의 쪽 임원들이 후지오카·니시오 그룹과 결별을 선언하고 별도 조직을 꾸린 데서 빚어졌다.
그러면 일본회의는 왜 새역모의 활동에 관여하게 되었을까? 그 힌트는 일본회의의 과거 행적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회의는 1997년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이하 '국민회의')와 '일본을 지키는 회' 등의 조직들이 합쳐 결성된 우익 단체이며, 핵심 조직인 '국민회의'는 종교 우익인 '신사본청(神社本庁)'을 모체로 줄곧 헌법 개정과 핵무장을 주창해 왔다. 1986년 '국민회의'는 고교판 새역모 교과서인 <신편일본사>를 검정에서 합격시켰으며, 2002년에는 <최신일본사>로 이름을 바꿔 역시 고교 교과서 채택 과정에 뛰어든 바 있다. 하지만 고교 교과서의 채택은 교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탓에 <신편일본사>든 <최신일본사>든 1만 권 이상 채택된 적이 없으며, 최근에는 5천 권 이하로 떨어진 상황이다.
야기가 주연을 맡고 일본회의 감독을 했던 분열극의 전모는 이러하다. 교육위원회를 통한 채택 압력이 손쉬운 중학교 역사와 공민을 공략하고자 했으나, 두 차례의 실패 끝에 주도권 장악이 여의치 않던 새역모를 탈퇴하여 독자적인 기구를 띄운 것이다. 이를 일본의 보수 정치권의 노림수에 맞춰 진단하자면, 후지오카는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관변 학자'로서의 이용가치가 떨어지고 말았고, 대신에 야기가 선택된 것이라 봐야 한다. 새역모와 마찬가지 임무를 부여받은 '재생기구'는 독자적인 조직(후술)을 내세워 2008년에 고시된 새로운 중학교 학습지도요령에 맞춰 교과서 검정을 신청(2010년 4월)하기 위해 역사와 공민 교과서를 집필하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재생기구'가 출범 전부터 강한 정치 지향성을 보인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즉 정식 발족 3개월 전인 2006년 7월, 야기는 임기가 만료되는 고이즈미 정권의 후임을 염두에 두고 9월에 새 정권이 출범한다고 언급하면서 "우리나라의 교육을 재생시키는 최종적인 힘은 정치에 있다"는 생각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교육개혁'을 내건 아베 정권은 결국 2006년 12월 방위청을 성으로 승격하는 조치와 더불어 애국심 교육을 노골화한 교육기본법의 개정을 감행했고, 야기는 이른바 '아베 브레인 5인방' 중 한 사람으로 지목되었다(나머지는 이토 데쓰오[伊藤哲夫],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 시마다 요이치[島田洋一], 나카니시 데루마사[中西輝政]).
지유샤 교과서의 출현
'재생기구'의 출현으로 이른바 '교과서 우익'의 내분은 표면상 정리된 듯 보였지만, 이후 역사교과서 문제는 한층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앞서 '재생기구'의 출범이 교육기본법의 개정과 맞물려 있었다고 썼는데, 2007년 7월 '개정 교육기본법 바탕으로 교과서 개선을 추진하는 유식자 모임(이하 '교과서개선모임')'이 조직되면서 새역모 측과의 불협화음은 절정으로 내달았다. 새역모가 지유샤에서 역사교과서를 발행하게 된 것도 이 과정에서 파생된 결과이다. 이하 이를 개관해 두기로 하자.
▲ 지유샤에서 발간한 역사 교과서. ⓒ프레시안 |
그러면 이쿠호샤는 무엇인가? 이쿠호샤는 후소샤가 향후 교과서를 발행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것을 들은 아베 신조 수상이 후지TV(후지산케이 그룹 산하) 회장에게 전화로 직접 부탁하여 3억 엔의 자금을 받아 설립된 회사라고 한다. 교과서의 발행과 관련하여 현직 수상의 이름이 거론되는 이 상황이야말로 아베로 대표되는 보수 정치가의 기대주가 야기와 '재생기구'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보여주지만, 후소샤가 교과서 발생을 단념한 데는 새역모와의 갈등이 배경에 깔려 있다. 새역모 측의 설명에 따르면 2007년 2월 후소샤는 새역모가 집필·편찬한 교과서를 발행하지 않겠다는 통고를 했고, 동 6월 새역모 측은 이쿠호샤가 자신들의 교과서 내용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저작권을 수호하겠다는 선언으로 맞불을 놓았다. 이후 새역모는 교과서 발행을 이어가기 위해 새 파트너를 찾았고, 동 9월 후소샤를 대신하는 발행처로 지유샤가 결정되었다고 발표했다. 아래는 이상의 경과를 간략하게 도식화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2009년 검정을 통과하여 1.1%(약 1만4천 부)의 채택률을 보인 지유샤판 역사교과서 간행의 경과를 살펴보자. 새역모는 2007년 5월 후소샤와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회장이었던 고바야시 다다시(小林正, 정치가)를 해임시키고(8월 제명, 10월 '재생기구' 대표위원), 대신에 후지오카가 직접 회장 자리에 올랐다. 후소샤와의 결별, '교과서개선모임'의 출범과 연동하는 대목이다.
2008년 4월 2일, 새역모는 지유샤에서 발행될 교과서에 대해 "내용은 기본적으로 현행 <새 역사교과서>(개정판)와 다름이 없"으며, "일부 고쳐 쓰고 도판을 변경하는 등의 수정을 했"다며 후소샤판 교과서를 답습한다는 취지의 발표를 했고, 동 17일 문부과학성에 검정 신청을 했다. 후소샤는 위법적인 복제라며 반발했으나, 더 큰 난관은 검정이었다. 지유샤판 교과서는 자타가 공인했듯이 후소샤판의 복사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500곳이 넘는 오류로 인해 2008년 12월 일단 불합격 판정을 받았으며, 재신청에 들어가 136곳의 수정을 거쳐 간신히 2009년 4월 검정에 합격했던 것이다.
검정 신청과 더불어 새역모는 <새 역사교과서>의 발행을 금지해 달라는 가처분 신청도 제기했다. 이는 2009년 3월 도쿄지방재판소에서 각하되었고, 현재는 정식 소송으로 진행 중이다. 그 목적은 새역모-지유샤 협조 체계를 공고히 하는 동시에 후소샤나 '교과서개선모임'에서 맞불 작전을 벌이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데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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