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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실법'엔 '최진실'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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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실법'엔 '최진실'이 없다

[기자의 눈] 한나라당, 너무 기민해서 들켰다

정부와 한나라당이 지속적으로 추진해 온 '사이버 모욕죄'와 '인터넷 실명제'가 비로소 때를 만났다. 최진실 씨의 자살 사건을 계기로 이 같은 안타까운 사망을 예방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최 씨의 영결식이 있기도 전에 초대형 애드벌룬을 띄운 한나라당의 기민함은 놀라운 일이지만, 경박한 정치적 속내에 과연 고인에 대한 애도의 염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홍준표 원내대표는 5일 사이버 모욕죄 신설의 취지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농담 삼아 "○○○ 기자 오늘 안나왔나? 자기가 '최진실법'이라고 해놓고 내가 말한 법이라고 하더라고…"라고 말했다. 이른바 '최진실법'이라는 신조어를 자기가 만든 게 아니라는 얘기이겠지만 해당 기자를 힐난하는 투는 아니었다. 어찌됐건 '최진실'이라는 당면 이슈 위에 사이버 모욕죄를 얹어놨으니 나름의 성공작 아닌가. 그랬다. 한나라당의 '최진실법'에 '최진실'은 애초부터 없었다.

홍 원내대표는 이어 "MBC <PD 수첩>에 방송된 내용이 인터넷 '퍼나르기'를 통해 무차별 확산되는 과정을 우리는 봐 왔다"며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법 개정안'의 취지를 설명했다. 좀 더 명확해졌다. 사이버 모욕죄와 인터넷 실명제가 '최진실법'으로 이름을 얻게 되는 과정이 드러난 것이고, 이를 통해 한나라당의 의도가 같이 드러난 셈이다. 최진실 씨의 자살은 '계기'에 불과했다.
▲ ⓒ뉴시스

심금을 울리며 거드는 사람들이 속속 나온다. 전여옥 의원이 "최진실·정선희 케이스를 보면서 정말 '사이버 모욕죄' 입법 필요성이 시급하고 절실함을 느낀다"고 한 데 이어 장제원 의원이 바통을 받았다.

그는 "필자(장제원 의원)는 오늘 최진실 씨의 소식을 접하고 얼마 전에 필자가 직접 경험한 일이 떠올라 한동안 주체할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며 "국회에서 처음으로 긴급현안질의를 한 후 본인들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일부 네티즌들로부터 무차별한 테러를 당했다"고 고백(?)했다.

'최진실법'을 염원하는 이들의 주장은 개인 의견의 형식을 띄고 있으나, 촛불 집회에 대한 사무친 원한의 발로로 보는 게 타당하다. 장 의원이 스스로 밝혔듯이 그가 '무차별한 테러'를 받게 된 계기는 지난 7월 국회 긴급현안질의에서 미국 경찰이 경찰견으로 시위자를 쓰러뜨리는 장면 등을 동영상으로 보여준 후 '시위 진압 매뉴얼이 약하다'고 발언해 누리꾼들로부터 '장제원 열사'라는 악평을 얻은 것이었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촛불집회에서 아마도 가장 많은 '악플'을 받았을 이명박 대통령은 '최진실법'이 도입될 경우 최대 수혜자가 아닐까 싶다. '최진실'의 탈을 씌워 추진하는 이 법이 사실상 '이명박 보호법'이라는 비판이 이해되는 이유다.

'악플'도 '여론'이니 방치하자는 방임주의적 주장은 사실 '악플러' 외엔 많지 않다고 믿는다. 단죄돼야 할 범죄라는 점에도 사회적 공감대가 넓다. 이를 위해 형법상 모욕죄가 현재 기능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06년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의 아들이 병역에서 면제됐다는 인터넷 루머를 퍼뜨린 사람이 200만원의 벌금형을 받은 선례가 있다.

이번에 한나라당이 낸 법안은 피해구제의 신속성을 보강하고 고소, 고발 없이도 당국이 수사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을 추가하는 것이다. 인터넷 여론 통제의 의도가 듬뿍 담긴 이 논의가 지난 7월 22일 김경한 법무부 장관이 '사이버 모욕죄 신설'의 화두를 던지면서 촉발됐다는 건 주지의 사실. 시기, 내용, 의도 모두가 '최진실 씨의 자살'과 영 동떨어져 있다는 반증이다.

무엇을 단죄하고자 함인가?

19세기 프랑스의 풍자 만화가 샤를 필리봉은 프랑스의 루이 필립 왕을 '서양배(조롱박 모양)'으로 묘사, '국왕 모욕죄'로 법정에 갔다. 재판정에서 그는 국왕의 얼굴이 '서양배'로 변하는 과정을 묘사한 네 컷 짜리 그림을 제시하는데, 변론이 걸작이다.
▲샤를 필리봉의 변론에 사용된 그림

"제1의 그림이 국왕과 닮았다는 이유로 죄가 된다면 제1의 그림을 닮은 제2의 그림도 죄가 되고, 제2의 그림을 닮은 제3의 그림도, 제3의 그림을 닮은 제4의 그림도 죄가 된다. 그렇다면 배를 재배한 농민들은 모두 유죄인가? 배와 유사한 형태의 물건은 모두 국왕을 모욕한 것으로 고발되어야 하는가?"

모욕죄 적용 기준의 모호성을 지적하는 고전적인 사례다. 법의 처벌 이전에 우리사회의 합리적 이성은 풍자와 모욕을 구분할 줄 안다. 최 씨의 자살 사건에도 불구하고 일부 악플러들이 기승을 부리지만 인터넷 공간에선 이를 꾸짖고 나무라는 선량이 훨씬 많다. 정부와 한나라당이 추진하는 '최진실법'은 사실 '악플 단속'에 그치지 않고 자신들을 향한 '풍자'까지도 단죄하겠다는 의도가 아닐런지….

얼마 전 한나라당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한 반대 주장을 한 탤런트 김민선 씨를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한나라당은 김 씨의 주장이 심각한 '악플'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지만, 정부의 실책에 대한 국민적 분노는 김 씨의 주장에 가까웠다. 확인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오히려 김 씨에겐 이런 협박이 더욱 큰 심리적 부담이었을 터, 한나라당의 '최진실법'은 이같은 협박을 모든 네티즌을 대상으로 넓혀 놓은 것에 다름 아니다.

고려대 박경신 교수는 한 토론회에서 "객관적인 명예와 평판을 보호하는 명예훼손법리와 달리 주관적인 명예감 또는 체면만을 보호하는 모욕죄는 대부분의 나라에 존재하지 않는다"며 "(사이버 모욕죄 신설은) 한국이 유일한 사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보라미 변호사도 "예를 들면 '장하십니다' 라는 말은 듣는 사람에 따라 모욕이 될 수 있다"고 기준의 모호성을 지적하며 "'모욕'이라는 개념은 영미권에서 금전 배상도 안 되는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만약 사이버 모욕죄를 정말로 밀어붙일 생각이라면, 'MB 선정 52개 품목 소비자 물가동향 지수'처럼 '한나라당 선정 52개 주요 단어 인터넷 모욕 동향 지수'라도 만들어 기준이라도 분명히 해 놔야 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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