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박철언-YS, 그리고 강재섭…사반세기 애증의 역사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박철언-YS, 그리고 강재섭…사반세기 애증의 역사

'월계수회'로 부상해 결국 'YS'에 둥지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의 정치 입문과 성장 과정에서 버팀목이 됐던 두 명의 '과거 인물'들이 때 아니게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 바로 박철언 전 의원과 김영삼 전 대통령이다. 박 전 의원은 23일 이재오 최고위원이 최근 산사 칩거 도중 강 대표의 과거를 거론하는 가운데 자신을 언급한 대목에 대해 사과를 촉구했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24일 상도동 자택으로 찾아온 강 대표와 민자당 3당 합당 당시를 회고하며 회포를 풀었다.
  
  박 전 의원의 사과 촉구와 강 대표의 김 전 대통령 예방은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의 3당합당 이후 민자당 내에서 '견원(犬猿)지간' '빙탄(氷炭)의 관계'라는 말로도 설명이 부족할 정도로 극악한 정적 사이였던 김영삼과 박철언, 이 두 사람의 공교로운 등장을 놓고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한나라당의 뿌리', 나아가 '80~90년대의 강재섭'에 대한 기억을 더듬게 됐다. 어찌 보면 강 대표의 당시 행보를 되짚어 보는 것은 김영삼-박철언-강재섭 3자 사이의 '애증의 3각 관계'를 설명하는 동시에 오늘의 한나라당의 성격을 따져보는 흥미로운 접근법일 수도 있다.
  
  '월계수회'의 2인자 배경으로 정치 입문
  
  
강 대표는 김 전 대통령을 만나 "한나라당의 뿌리는 민자당"이라고 했다. 또한 그는 "나보고 민정계라고 하지만 나는 민정당은 1년밖에 안했다"고 '민정계' 꼬리표에 대한 여전한 부담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강 대표가 13대 국회를 통해 정계에 입문하기까지 맺어 온 '6공의 황태자' 박철언 전 의원과의 관계를 따져보면 이 말은 사실상 어불성설이다. 명백히 '노태우 민정당'이 '정치인 강재섭'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박철언 전 의원과 강재섭 대표의 인연은 5공 정권이 들어선 198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 전 장관의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 따르면 박 전 의원은 80년 10월 청와대 정무비서관으로 근무하던 중 당시 광주지검에서 근무하던 강재섭 검사를 청와대 법제연구반으로 발탁해 기용했다. 그 뒤 강 대표는 박 전 의원이 1985년 3월 이후 안기부장 특별보좌관으로 파견 근무할 때 안기부 특보실 연구실장으로 그를 보좌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87년 6.29 선언 다음날 박 전 의원과 강 대표의 주도로 '월계수회'가 창설된다. 두 사람의 관계는 월계수회를 빼고선 설명이 어려울 정도다. 이 때부터 강 대표가 '막후 2인자'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노태우 민정당 후보를 대통령에 당선시켜 월계관을 씌우자'는 취지에서 유래한 조직 이름에서 가늠되듯이 월계수회는 한 때 회원이 200만 명에 육박했으며, 전국에 180여 개 지회를 거느린 노태우 전 대통령의 최대 사조직으로서 6공을 관통하는 명실상부한 실세그룹이었다.
  
  노 전 대통령 집권기에 월계수회가 각종 이권사업에 개입했음은 물론이고, 박 전 의원은 월계수회를 통해 정부의 고위직 인사를 특정세력 중심으로 주물렀다. 이로 인해 '월계수회로부터 피해를 받고 있는 안기부 검찰 경찰 내무 재무 및 각 부처 20만 공무원 일동'이라는 명의의 괴문서가 언론에 배포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강재섭 대표도 박 전 의원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1988년 13대 총선 당시 전국구 후보 자리를 얻어 정계에 진출했다. 이 공천 과정에서 자신이 했던 역할을 박 전 의원은 회고록을 통해 이렇게 기록했다. "40세의 평검사를 전국구에 배정하면서 법조계의 적지 않은 반발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8년 가까이 나의 참모장 역할을 수행해 온 강재섭의 청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
  
  YS-박철언-강재섭 '애증의 3각관계'
  
  그러나 박 전 의원과 강재섭 대표는 민자당 3당 합당 직후부터 YS를 사이에 두고 각자 다른 길을 걸었다.
  
  박철언 전 의원은 3당 합당 이후 철저한 반(反)YS 노선을 걷다가 YS가 민자당 대선후보로 등장한 92년 10월 박태준 씨와 함께 민자당을 탈당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훗날 "YS와 박 전 의원은 3당 합당 직후까지 사이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고 평가했을 정도로 돈독한 관계였던 두 사람이 '앙숙'이 된 것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3당합당 이후의 정국을 보는 시각과 미래에 대한 생각이 서로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이를 더 간단히 얘기하면, '차기'를 동시에 겨냥한 데 따른 결과였다. '권력'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던가?
  
  두 사람 관계의 결정적 파열음은 바로 내각제 문제에서 비롯됐다. 3당 합당 2개월 후인 90년 3월, YS가 3당 합당의 전제였던 내각제 합의의 철회 의사를 박 전 의원에게 밝혔고, 이에 박 전 의원이 "되지도 않을 일을 왜 약속했느냐"고 반발한 사건이 끝내 박 전 의원의 탈당으로 이어졌다는 게 정설이다.
  
  그 후 YS 집권기에 박 전 의원은 슬롯머신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박 전 의원은 이를 YS의 정치보복이라며 대항했다. 또한 지난해 8월 박 전 의원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민자당 3당 합당을 전후해 노태우 전 대통령의 돈 40억 원이 YS에게 전달됐다고 폭로해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두 사람의 불편한 관계를 새삼 확인하기도 했다.
  
  이처럼 큰 강을 사이에 둔 듯한 두 사람의 관계를 오히려 승승장구의 발판으로 삼아 타고 넘은 사람이 바로 강 대표다. 그 계기는 김영삼-박철언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92년 말, 강 대표가 박 전 의원의 민자당 탈당을 따르지 않고 잔류를 택하면서부터였다.
  
  이 일로 인해 강 대표는 '박철언 오른팔', 혹은 '월계수회 2인자'라는 꼬리표를 과감하게 떼어버리고 김영삼 전 대통령과 급속하게 가까워졌다. YS는 당시 "강 의원은 역시 괜찮은 사람"이라고 평가했고, 그 뒤 대구경북권 출신인 그에게 민자당 대변인과 총재비서실장을 맡겼다. 강 대표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예뻐해 줘서 내가 클 수 있었다"고 인정하듯이, 이 때부터 '정치인 강재섭'에게 또 다시 날개가 돋기 시작한 셈이었다.
  
  강 대표는 결국 이런 과정을 거쳐 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으로 이어지는 20여년 간의 정치 현장에서, 국회 역사로 따지면 13대부터 17대까지 내리 5선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직까지도 박철언 전 의원과 김영삼 전대통령과 강 대표의 관계를 바라보는 해석은 크게 엇갈린다. 박 전 의원의 탈당 당시 YS를 택한 강 대표의 결정을 두고 "사적 인연보다 소신을 택했다"는 긍정평가가 있지만, "의리보다는 주류를 선택했다"는 부정적 평가도 적지 않다.
  
  그런 점에서 강 대표가 자찬하는 '특유의 친화력' 역시 '기회주의'의 다른 이름이라는 평가도 있다. 양지만 좇은 정치인생이라는 비판이다. 최근 강 대표와 갈등을 빚고 있는 이재오 최고위원이 바로 그 부분을 건드린 것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