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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뀌지 않는 이 세상, 조영래 변호사가 살아있다면…"

<전태일 평전> 저자 조영래 변호사 20주기 추모

12일은 조영래 변호사가 사망한 지 꼭 20년 되는 날이다. 조영래를 <전태일 평전>의 저자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으나, 정확히 그가 무슨 일을 하다 죽었는지 아는 이는 드물다. 요즘 세대는 더욱 그렇다. 지난 10일, 조영래 변호사를 추모하기 위해 모인 이들은 흘러버린 시간이 조영래 변호사를 잊어가고 있다고 한탄했다.

이날 서울 명동의 '서울YWCA연합회관' 강당에서 '조영래를 기억한다'라는 이름으로 20주기 추모행사가 열렸다. 2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고인을 기리고, 동시에 현시대에 대한 안타까움 등을 쏟아 냈다. 이들은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어 현재화하고,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 10일, 명동 '서울YWCA연합회관' 강당에서 '조영래를 기억한다' 20주기 추모행사가 열렸다. ⓒ연합뉴스

조영래와 전태일,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 의지와 집념 같아

<전태일 평전>의 저자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조영래 변호사는 노동자 전태일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았지만, 그 둘의 삶은 비슷한 울림을 준다.

조 변호사와 절친했던 장기표 신문명연구원장은 "민중에 대한 뜨거운 사랑, 모든 사람이 서로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바란 높은 꿈과 희망, 그리고 그 꿈과 희망을 이루고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 강인한 의지와 집념이 같았다"고 회고했다.

올해 유독 전태일과 조영래가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전태일 40주기, 조영래 20주기인 해여서이기도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가 그들이 목숨 바쳐 이루려 했던 것들을 완벽히 성취해내지 못해서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영래를 더욱 사무치게 추모한다.

추모행사의 사회를 맡은 박원순 변호사는 "여전히 바뀌지 않은 이 세상에서 우리는 조영래 변호사가 살아 있었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한다"고 운을 떼며 "꿈꾸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당시의 기억들을 나눠보자고 했다.

김선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회장,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 권인숙 명지대 교수, 장기표 신문명연구원장, 한인섭 서울대 법대 교수 등이 기억하는 조영래 변호사는 인권과 환경에 관심이 있었고, 시대적 문제에 치열하게 고민한 사람이었다. 또한 훌륭한 인품을 가진이었다.

조영래 변호사 부천서 성고문 고발, 민주화 투쟁의 도화선

조영래 변호사가 서울대학교 수석합격 인터뷰에서 "붙었으면 붙은 거지 수석이 도대체 뭐가 중요하냐?"라고 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권인숙 명지대 교수는 "실용적이고 가장 타당한 도덕적 기준 외에 허영심이나 명예욕, 고정관념에서 빚어지는 군더더기들은 단칼에 잘라내는 분"이었다고 추억했다.

권 교수가 조 변호사를 더욱 특별하게 기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권 교수가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날 권 교수는 조 변호사의 추억담을 시작하기 전 옛 감정이 되살아났는지 울먹이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권 교수는 "(인사말에서) 홍성우 변호사가 이제 안쓰러움과 슬픔은 벗어버리자고 했지만 잘 안 된다"라고 울음을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 1986년 당시 조영래 변호사와 권인숙 교수. ⓒ연합뉴스

권 교수는 그 당시 자신도 하루하루 고통 속에서 살았을진대 조 변호사를 만나고 나서 '엉뚱하게'도 조 변호사의 생계가 걱정됐다고 회고했다.

"1심 변론 요지도 그렇고 고발장과 함께 내 사건과 관련된 모든 글을 거의 조 변호사님이 쓰셨다. 재밌었던 것은 그분의 구두였다. 낡다 못 해 일부는 떨어지기까지 한 구두를 보고서 나는 어이없게도 그분의 생계를 걱정했다. 수임료도 안 내는 시국 사범들 변론이나 하시면서 어떻게 생활을 해 나가실지 짐작이 안 갔다."

비록 부천서 성고문사건은 당시 1심 재판부가 실형을 선고하기도 했지만, 장기표 원장은 "1986년 부천서 성고문사건에 대한 조영래 변호사의 변론은 전두환 정권의 퇴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이 사건은 87년 민주화 투쟁의 도화선이 됐고, 결국 88년 4월 성고문 경찰 문귀동은 구속됐다.

인권 감수성 풍부했던 조 변호사, "이제는 제대로 된 기록으로 남기자"

민변 김선수 회장은 조영래 변호사를 "인권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집단 소송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망원동 수재사건(1984년), 여성차별을 시정하는 계기가 된 여성 조기 정년제 사건(1986년), 주민에 의한 공해병 소송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상봉동 진폐증 사건(1987년) 등은 '인권감수성'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시도하기 어려운 사건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김 회장은 조 변호사를 단지 인권변호사로만 평가하지 않고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에는 학생운동가였고, 유신독재에 맞선 사회운동가였으며, 변호사로서 활동하면서도 시민사회운동과 문필가로서 활동했다"고 평했다. 조 변호사는 88년 민변 창립을 주도했다.

이런 소중한 기억들을 떠올리며 이들은 조 변호사를 이제는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안경환 씨가 쓴 <조영래 평전> 등이 있지만, 서울대학교 한인섭 법대 교수는 "조영래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는 분들은 주로 기존 기록에 따라서 쓴 안경환의 평전에 만족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좀 더 구체적인 사실에 바탕을 두며, 주관적인 감흥도 그대로 표현할 평전을 만들자는 것이다.

ⓒ연합뉴스

조영래를 잊은 세대…그러나 "나도 믿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한 교수가 '기록화'를 강하게 주장하는 것은 '요즘 세대'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조영래의 존재를 모르는 세대가 압도적이고, 그가 활동한 시대도 잊혀져 가기 때문이다.

"최근 파키스탄의 저명한 인권운동가이자 변호사를 만났는데, '한국에서 어떻게 군부쿠데타, 계엄령의 시대가 사라지게 되었는지'를 매우 궁금해했다. 아직도 군부의 압제하에 시달리고 있는 나라에서 이는 불가사의한 기적이기도 할 것이다. 반면 우리 청소년, 청년들은 계엄령, 군부쿠데타, 6월항쟁은 6・25나 일제시대 이야기처럼 먼 과거 일로 여긴다."

한 교수는 "신세대에게 구세대가 소중한 체험을 전해주기 위해, 또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이야기하기 위해 조영래란 자산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조영래를 기억한다'를 넘어서 '조영래는 누구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 조영래 변호사의 삶으로부터 지금 시대의 지혜를 얻자는 것이다.

그러나 희망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추모제에서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들이 만든 조영래 변호사 추모 영상은 비정규직 아이들 이야기와 조영래 변호사 이야기를 같이 보여주며 '세상이 바뀌었나?'라고 비관적으로 묻기 시작하지만 결국 다음 같은 말로 끝을 맺는다.

"나도 믿어. (조영래 변호사처럼)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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