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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Factory.67] 집나간 조선의 '노라'들, 연극 '경성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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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Factory.67] 집나간 조선의 '노라'들, 연극 '경성스타'

[공연리뷰&프리뷰] 연출가 이윤택, 대중극시대부터 친일연극시대를 관통하다

역사의 인물과 시대적 상황을 현대 관객들에게 펼쳐 보일 때는 이 순간 과거를 여는 목적과 전달하고자 하는 바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있어야만 연극으로서의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재현이라 할지라도 연극은 다큐멘터리가 아니기에 작가나 연출가의 의도에 따라 특정 사실이 부각되며 삭제되고 추가, 재구성되는 과정 속에서 극적, 혹은 감정적 긴장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한 작품의 공연시간으로 길다고 느껴질 수도 있으나 1920~1930년 대중극 시대부터 1940년대 친일연극 시대까지, 한국 연극의 암울했던 시기를 그려내기에 두 시간 반 남짓은 결코 충분한 러닝타임이 아니다. 이 거대하고도 어려운 작업은 스케일이 큰 연출가 이윤택이라는 이름하에 모든 의심의 여지를 묵살시킨다.

▲ ⓒnewstage

그가 선보인 연극 '경성스타(김윤미 작, 이윤택 재구성연출)'는 사실과 허구를 버무렸음에도 관객으로 하여금 실제로 받아들이게 하는데 아무런 무리가 없다. 이처럼 노골적인 연극 사랑의 표현이라니. 한국 연극과 관객에 대한 연출진의 이 감탄할만한 애정은 취향이나 성향, 삐딱하게 앉아 무대를 바라보는 모든 태도를 무시하며 시대보다는 그 속에 살고 있는 인간에 대한 연민 동시에 숭고함을 느끼게 한다.

시대를 읽고 오늘을 읽는 연출가 이윤택의 연극 '경성스타'는 아랑, 고협, 청춘좌, 현대극장 등 1940년대 전반기를 대표하는 극단들의 등장과 언급만으로 일제 통제 하에 있었던 연극의 암울함을 드러낸다. 여기에 임선규, 박진, 차홍녀 등 일제강점기의 배우, 연출가, 극작가는 당시의 신파, 역사극, 만담, 육자배기, 마임 등을 재현한다. 그 첫 문을 여는 것은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나 감상적이고 통속적인 신파로 불리기도 한 임선규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다. 연극 '경성스타'에는 이 외에도 '빙화', '동학당', '부활' 등의 공연장면을 재현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이 극중극 형식은 극적 환상을 의도적으로 파괴, 무대 위의 상황 또한 실재를 가장한 연극임을 알린다. 더불어 제작과정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며 그에 따른 고뇌와 이념, 아픔 등을 그려낸다.

▲ ⓒnewstage
이 작품에는 시대를 웃기고 울렸던 연극들이 묵직한 비중으로 존재하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건 연극을 이끌어간 사람들이다. 퇴물 여배우 월희는 무대 뒤 대기실에서 말한다. "조선의 여배우들은 연극을 하기 위해 모두 집을 나갔어. 그래서 조선의 여배우들은 모두 노라야. 집나간 노라가 어디로 갔겠어? 바로 극장이야."

국내 연극의 이면사를 다루기 위해 억, 소리 나도록 변하는 입체적 무대와 수많은 배우들의 등장은 이데올로기가 아닌, 연극 그 자체를 바라보게 한다. 친일과 월북에 대한 직접적 언급 또한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연극에 대한 문제다. 시간이 흐르고 인물들은 하나씩 시야에서 사라지며 그들을 비추던 조명이 꺼진다. 연극을 했지만 죽거나 떠난 많은 사람들, 그들이 살아있는 연극 '경성스타'는 예술에 밥 말아 먹던, 오로지 연극에만 안착했던 시대의 연극인들을 통해 표면적인 억압과 환멸, 표출되는 이념과 사상을 주장하는 대신 내면의 고뇌와 저항, 동기를 부각시킨다. 겁탈당하는 우리네 여자들을 보면서도 딴전을 피우며 퉁소나 부는 조선 남자들의 입장, 분노한들 그게 조선의 현실이 아니던가. 연극에서 환상을 걷어내고 이제 우리 정직해지자는 임선규의 주장은 '연극에 이데올로기는 없다'는 직접적 발설보다 절실하다.

많은 담론을 제기하고 실행했던 이윤택이 판단하는 연극의 여러 가지 미덕은 그동안 그의 작품을 통해 증명돼왔다. 연극 '경성스타' 또한 그런 맥락에서 매우 명쾌한 작품이다. 시대를 풍미했던 경성의 스타들, 그 슬픈 이름들처럼 연극의 역사를 이루고 있는 지금의 연극인들도 충실하다 사라질 것이며 후에 누군가가 이 작품을 이야기하며 한국 역사를 논할 것이다. '우리 연극 하자'고 말하는 누군가의 희망, '연극 만세!'라고 말하는 또 다른 누군가의 의지가 문장보다 긴 여운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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