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율 스님이 4대강 사업으로 훼손되는 낙동강의 모습을 담은 두 번째 사진전을 열었다. 이번엔 낙동강 1300리 물길 중에서도 '제1의 비경'으로 꼽히는 경천대가 주제다. 4대강 사업은 그 이름처럼 하늘을 떠받드는 모습(擎天臺)의 경천대조차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관련 기사 : '낙동강 제1경' 경천대마저 '4대강 불도저'에 흙무덤)
8일 사진전 오프닝에 앞서 서울 종로구 조계사 인근에서 지율 스님을 만났다.
▲ 지율 스님이 자신이 찍은 경천대 사진을 설명하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
'4대강 삽날'에 휩쓸린 낙동강…"이것은 잔인한 기록이다"
스님이 낙동강으로 처음 발걸음을 내디딘 것은 지난해 3월이다. 남모르게 낙동강을 수차례 오간 뒤, 지난 11월에는 아예 상주에 터를 잡아 '지역 주민'이 됐다. 매일같이 상류 구간을 오르내렸고, 안동에서 부산까지 낙동강 전체를 완주한 것도 다섯 차례에 이른다. 그렇게 온 몸으로 담은 낙동강의 풍경이 고스란히 '기록'이 됐다.
스님은 기자를 만나자마자 사진전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천성산 싸움 때부터 사진을 찍는 일은 익숙하다는 그는 '기록이 가진 힘'에 대해 강조했다.
"사업이 예정대로 진행되더라도, 누군가는 그 모습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처음에 낙동강에 왔을 때 정말 놀랐다. 아, 우리 강이 이렇게 아름다웠구나…예전엔 몰랐었다. 그런 낙동강이, 이제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아침에 본 모습과 저녁의 모습이 다르다. 비록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해도, 이렇게 지켜본 파괴의 현장들을 기록하고 정리해 우리 강이 어떤 힘과 논리에 의해 파괴되고 있는지 남겨야 한다. 그래서 멀지않은 미래에 이 사업이 다시 평가받게 해야 한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사진전이다. 이번엔 스님 혼자만의 작업이 아니다. 이상엽, 최항영, 김흥구, 최형락 등 다큐멘터리 사진가 10여 명과 경천대를 방문했던 시민들도 힘을 보탰다. 이번 전시에 '시민 사진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경천대 사진만 6000장 가량이 나오더라. 저마다 경천대에 대한 기억과 추억, 느낌이 있는 거다. 그 감정들을 모으고 싶었다. 각자가 기억하는 낙동강은 어떤 모습인지….
사진전은 일종의 중간 점검의 차원에서 마련했다. 운동은 사람들에게 질문하는 방식으로 진행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왜 4대강 사업을 반대하고 강을 지키자고 하는지에 대해서도, '설득'하기보단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4대강 사업에 관한 이야기 대부분이 과학이다. 홍수가 어떻고, 수질이 어떻고…일반인이 쉽게 접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다. 사진은 다르다. 사람들의 직감과 감성에 호소할 수 있다. 누구나 어린 시절 강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 기록을 통해 우리가 앞으로 잃게 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스님이 낙동강으로 처음 발걸음을 내디딘 것은 지난해 3월이다. 남모르게 낙동강을 수차례 오간 뒤, 지난 11월에는 아예 상주에 터를 잡아 '지역 주민'이 됐다. 매일같이 상류 구간을 오르내렸고, 안동에서 부산까지 낙동강 전체를 완주한 것도 다섯 차례에 이른다. 그렇게 온 몸으로 담은 낙동강의 풍경이 고스란히 '기록'이 됐다.
스님은 기자를 만나자마자 사진전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천성산 싸움 때부터 사진을 찍는 일은 익숙하다는 그는 '기록이 가진 힘'에 대해 강조했다.
"사업이 예정대로 진행되더라도, 누군가는 그 모습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처음에 낙동강에 왔을 때 정말 놀랐다. 아, 우리 강이 이렇게 아름다웠구나…예전엔 몰랐었다. 그런 낙동강이, 이제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아침에 본 모습과 저녁의 모습이 다르다. 비록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해도, 이렇게 지켜본 파괴의 현장들을 기록하고 정리해 우리 강이 어떤 힘과 논리에 의해 파괴되고 있는지 남겨야 한다. 그래서 멀지않은 미래에 이 사업이 다시 평가받게 해야 한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사진전이다. 이번엔 스님 혼자만의 작업이 아니다. 이상엽, 최항영, 김흥구, 최형락 등 다큐멘터리 사진가 10여 명과 경천대를 방문했던 시민들도 힘을 보탰다. 이번 전시에 '시민 사진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경천대 사진만 6000장 가량이 나오더라. 저마다 경천대에 대한 기억과 추억, 느낌이 있는 거다. 그 감정들을 모으고 싶었다. 각자가 기억하는 낙동강은 어떤 모습인지….
사진전은 일종의 중간 점검의 차원에서 마련했다. 운동은 사람들에게 질문하는 방식으로 진행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왜 4대강 사업을 반대하고 강을 지키자고 하는지에 대해서도, '설득'하기보단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4대강 사업에 관한 이야기 대부분이 과학이다. 홍수가 어떻고, 수질이 어떻고…일반인이 쉽게 접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다. 사진은 다르다. 사람들의 직감과 감성에 호소할 수 있다. 누구나 어린 시절 강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 기록을 통해 우리가 앞으로 잃게 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 '시민사진전' 내부 전시관 모습. ⓒ프레시안(최형락) |
스님은 사람들에게 "과학이 아닌 직감으로 호소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그의 사진은 지독하리만큼 냉정하다. 과장도 꾸밈도 없으며, 대신 정직한 발품과 뚜렷한 문제의식이 4대강 사업에 대한 '팩트'들을 건져 올렸다. 스님 자신도 낙동강 기록을 '잔인한 작업'이라고 표현했다.
"주말마다 답사단이 낙동강에 내려오면서 사실 거의 매일 같은 장소에 가지만, 사실은 항상 처음 가는 것과 다름없다. 어제 본 풍경이 오늘 내 눈 앞엔 없으니까…. 아침에 들렀다가도 저녁이 되면 궁금해진다. 또 얼만큼 팠을까, 또 어떻게 변했을까. 사실 잔인한 기록이다. 가서 보고 찍는다고 (공사를 막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속상하니까 가게 되는거다. 사람들이 내가 낙동강을 잘 안다고 말들을 하는데, 사실 많이 보진 못했다. 자연이 가진 그 모든 것들을 생각할 때 인간이 얼마나 많이 볼 수 있겠나."
▲ 지난해 12월, 낙동강에서의 지율 스님. ⓒ프레시안(최형락) |
"생명의 가치에 무감해진 사회…천성산 때는 몰랐다"
두 발과 눈으로 변해가는 강의 모습을 지켜본 지율 스님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스님은 상주에 터를 잡은 이유부터 설명했다.
"지난해 3월부터 낙동강을 돌아다니다가, 어디엔가 자리를 잡아야겠더라. 당시 내가 머물었던 곳은 강에서 너무 멀었고, 좀 편해지고 싶기도 했다. (웃음) 무엇보다 최소한 상주 위쪽의 상류는 건드리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다섯 번째 완주 때에는 지류를 돌아다녔는데, 그제야 강의 전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강이 물을 담는 큰 그릇이라고 한다면 그 물을 채우는 것은 지류다. 몸으로 따지면 강의 혈관인 것이다. 상류를 보호해야 하류도 지킬 수 있다. 그래서 자리 잡은 곳이 중간 지점의 상주다."
그렇게 1년 넘게 낙동강과 끊임없는 대화를 나눴다. 강의 모습은 하루가 다르게 변했다. 진초록빛의 구담습지가 메마른 준설토로 뒤덮이고, 한 때 주모가 살았다던 강가 나루터의 주막 자리엔 콘크리트 제방이 쌓이는 모습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봤다. 스님의 말처럼, '잔인한' 기록이었다.
"사실 천성산 때는 아무 것도 몰랐다. 그래서 부딪히는 것마다 벽이었다. 환경영향평가법이 있는데 지켜지지 않는 게 벽이었고, 함께 했던 사람이 등을 돌리는 것도 벽이었다. 그 벽을 경험하고 극복하고나서 4대강 사업을 보니, 이제 그 본질을 알 것 같다. 사실 4대강 사업은 그 본질이 토건 자본에 있다는 점에서 경부고속철도와 닮아있다. 기업, 보수언론, 전문가 그룹의 '공모'도 너무나 흡사하다.
그래도 천성산 때는 생명의 문제가 중요했다. 도룡뇽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반응했지만, 지금은 더 많은 생명이 죽어가도 사람들은 외면한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생명의 가치에 훨씬 무감해졌다."
"어느 파도에 벽이 무너질지 모른다"
사실 이만큼 환경문제가 전국적인 현안이 됐던 적은 없었다. 환경단체는 물론이고 종교계와 그간 잘 움직이지 않았던 학계까지 나서 반대했던 것이 4대강 사업이었다. '4대강 정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한 해였다. 그럼에도 주요 공정은 이미 절반을 넘어섰고, "이대로라면 더 이상 사업을 막을 수 없는 것이 아니냐"라는 회의론도 고개를 든다. 그럼에도 지율 스님은 끝까지 '희망'을 얘기했다.
"이 운동은 운동의 끝과 상관없이 성공한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4대강 사업이 예정처럼 강행되더라도 말이다. 정부 입장에선 사업을 무리없이 완공하는 것이 성공이겠지만, 다른 쪽에서 생각하면 4대강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었던 사람들까지 나서서 사업에 대한 목소리를 냈다. 환경단체나 종교인들이야 잃을 게 없다고 하지만, 교수들까지 불이익을 감수하며 나선 것은 대단한 일이다.
이 사람들이 계속 파도를 만들고 있다. 첫 번째 파도, 두 번째 파도, 그 다음 파도…. 어느 파도가 벽을 무너뜨릴지 우리는 아직 모른다. 영화 <빠삐용>을 보니 그런 장면이 나오더라. 빠삐용이 섬에서 탈출할 때, 파도가 안으로만 밀려들어 나가려해도 다시 떠밀려왔다. 그러나 계속 기다리다가 결국 바깥쪽으로 치는 파도를 잡아 탈출한다. 그런거다. 지금은 밀리는 것 같지만 언젠가 파도는 바깥으로 칠 수 있는 것이다."
"문수 스님 가신 그 자리에…부처님 맨발로 왔다면 어디에 왔겠나"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맞은 편 조계사에서는 봉은사 직영사찰 지정 철회를 요구하는 봉은사신도회의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었다. 조계종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스님의 목소리가 격해졌다. 스님은 최근 낙동강 공사현장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마애보살좌상에 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관련 기사 : 고려시대 마애보살좌상, 4대강 공사로 구멍 '뻥')
"부처님이 세상에 오실 때 어떤 곳에, 어떤 모습으로 오겠나? 마애부처상을 보고 너무 안타까웠다. 1000년 동안 흙 속에 묻혀있던 부처님이, 4대강 발파 공사에 구멍이 났다. 그게 불상이라서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의미를 생각해보자는 거다. 그게 보물이고 아니고가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부처님이 왕좌를 버리고 갠지스강에 맨발로 걸어갔던 것처럼, 그런 장소에 왔다는 의미다. 그렇지 않은 출연은 의미가 없는 거다. 부처님이 돌부처가 아니라 맨발로 왔다면, 어디로 왔겠나? 청와대로 갔겠나?
그 강변에서 문수 스님이 돌아가셨고, 수경 스님이 떠나셨고, 많은 중생들이 그 강가에 찾아가 매달리고 있는 그 자리에…그 자리에 시현하신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선 거기에 대한 의미 부여를 전혀 못하고 있다. 그 자리를 우리가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부처님의 제자라 할 수 있겠나."
두 발과 눈으로 변해가는 강의 모습을 지켜본 지율 스님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스님은 상주에 터를 잡은 이유부터 설명했다.
"지난해 3월부터 낙동강을 돌아다니다가, 어디엔가 자리를 잡아야겠더라. 당시 내가 머물었던 곳은 강에서 너무 멀었고, 좀 편해지고 싶기도 했다. (웃음) 무엇보다 최소한 상주 위쪽의 상류는 건드리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다섯 번째 완주 때에는 지류를 돌아다녔는데, 그제야 강의 전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강이 물을 담는 큰 그릇이라고 한다면 그 물을 채우는 것은 지류다. 몸으로 따지면 강의 혈관인 것이다. 상류를 보호해야 하류도 지킬 수 있다. 그래서 자리 잡은 곳이 중간 지점의 상주다."
그렇게 1년 넘게 낙동강과 끊임없는 대화를 나눴다. 강의 모습은 하루가 다르게 변했다. 진초록빛의 구담습지가 메마른 준설토로 뒤덮이고, 한 때 주모가 살았다던 강가 나루터의 주막 자리엔 콘크리트 제방이 쌓이는 모습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봤다. 스님의 말처럼, '잔인한' 기록이었다.
"사실 천성산 때는 아무 것도 몰랐다. 그래서 부딪히는 것마다 벽이었다. 환경영향평가법이 있는데 지켜지지 않는 게 벽이었고, 함께 했던 사람이 등을 돌리는 것도 벽이었다. 그 벽을 경험하고 극복하고나서 4대강 사업을 보니, 이제 그 본질을 알 것 같다. 사실 4대강 사업은 그 본질이 토건 자본에 있다는 점에서 경부고속철도와 닮아있다. 기업, 보수언론, 전문가 그룹의 '공모'도 너무나 흡사하다.
그래도 천성산 때는 생명의 문제가 중요했다. 도룡뇽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반응했지만, 지금은 더 많은 생명이 죽어가도 사람들은 외면한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생명의 가치에 훨씬 무감해졌다."
"어느 파도에 벽이 무너질지 모른다"
사실 이만큼 환경문제가 전국적인 현안이 됐던 적은 없었다. 환경단체는 물론이고 종교계와 그간 잘 움직이지 않았던 학계까지 나서 반대했던 것이 4대강 사업이었다. '4대강 정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한 해였다. 그럼에도 주요 공정은 이미 절반을 넘어섰고, "이대로라면 더 이상 사업을 막을 수 없는 것이 아니냐"라는 회의론도 고개를 든다. 그럼에도 지율 스님은 끝까지 '희망'을 얘기했다.
"이 운동은 운동의 끝과 상관없이 성공한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4대강 사업이 예정처럼 강행되더라도 말이다. 정부 입장에선 사업을 무리없이 완공하는 것이 성공이겠지만, 다른 쪽에서 생각하면 4대강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었던 사람들까지 나서서 사업에 대한 목소리를 냈다. 환경단체나 종교인들이야 잃을 게 없다고 하지만, 교수들까지 불이익을 감수하며 나선 것은 대단한 일이다.
이 사람들이 계속 파도를 만들고 있다. 첫 번째 파도, 두 번째 파도, 그 다음 파도…. 어느 파도가 벽을 무너뜨릴지 우리는 아직 모른다. 영화 <빠삐용>을 보니 그런 장면이 나오더라. 빠삐용이 섬에서 탈출할 때, 파도가 안으로만 밀려들어 나가려해도 다시 떠밀려왔다. 그러나 계속 기다리다가 결국 바깥쪽으로 치는 파도를 잡아 탈출한다. 그런거다. 지금은 밀리는 것 같지만 언젠가 파도는 바깥으로 칠 수 있는 것이다."
"문수 스님 가신 그 자리에…부처님 맨발로 왔다면 어디에 왔겠나"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맞은 편 조계사에서는 봉은사 직영사찰 지정 철회를 요구하는 봉은사신도회의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었다. 조계종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스님의 목소리가 격해졌다. 스님은 최근 낙동강 공사현장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마애보살좌상에 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관련 기사 : 고려시대 마애보살좌상, 4대강 공사로 구멍 '뻥')
"부처님이 세상에 오실 때 어떤 곳에, 어떤 모습으로 오겠나? 마애부처상을 보고 너무 안타까웠다. 1000년 동안 흙 속에 묻혀있던 부처님이, 4대강 발파 공사에 구멍이 났다. 그게 불상이라서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의미를 생각해보자는 거다. 그게 보물이고 아니고가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부처님이 왕좌를 버리고 갠지스강에 맨발로 걸어갔던 것처럼, 그런 장소에 왔다는 의미다. 그렇지 않은 출연은 의미가 없는 거다. 부처님이 돌부처가 아니라 맨발로 왔다면, 어디로 왔겠나? 청와대로 갔겠나?
그 강변에서 문수 스님이 돌아가셨고, 수경 스님이 떠나셨고, 많은 중생들이 그 강가에 찾아가 매달리고 있는 그 자리에…그 자리에 시현하신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선 거기에 대한 의미 부여를 전혀 못하고 있다. 그 자리를 우리가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부처님의 제자라 할 수 있겠나."
▲ 경천대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낙동강 상류의 모습. 4대강 공사가 계속되면 이곳의 자연 경관도 곧 사라질 것이다. ⓒ프레시안(선명수) |
"다시 돌아오는 파도처럼, 무기력해지진 말자"
사진전 준비 시간이 다가오면서 인터뷰도 막바지를 향해갔다. 스님에게 '4대강 공사가 계속될 거라고 보나"라는 질문을 던졌다. 한참을 생각하던 지율 스님이 입을 열었다.
"자식이 불치의 병에 걸렸다고 해서, 곧 죽을 거라고 이야기하는 부모는 없다. 남들이 다 못 고친다고 떠나도, 부모만은 버리지 못한다. 그런 것이다. 저는 단 한 번도 이 사업이 끝까지 진행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자연의 순리에도 맞지 않고, 생존 조건에도 맞지 않은 공사다.
끝까지 이대로 밀고 간다고 생각해버리면 나도 무기력해질 것이다. 모두 무기력해지진 말자는 거다. 파도가 계속 밀려오면 언젠가는 벽이 넘어진다. 그런 이야기들이 필요한 시기다. 언젠간 이 사업이 재검토되는 때가 올텐데, 그 때 우리가 지혜로워야 한다. 언젠간 각성의 순간이 올 것이다. 사업을 막는 것은 현실적인 운동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이 '깨닫는 것'이다."
'경천대 시민사진전'은 오는 14일까지 조계사 나무갤러리에서 계속된다. 사진전은 이후에도 다른 장소에서 이어질 예정이며, 경천대 관련 사진과 사연 '초록공명' 까페(cafe.daum.net/chorok9)에 올리면 시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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