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를 생각한다>가 정수복 교수가 파리를 걸으며 느끼고 생각한 점을 망라한 일종의 '총론'이라면 2권 <파리의 장소들>은 정 교수가 걸은 16개 장소 각각에 대한 세밀한 기록, 즉 '각론'이다. 그래서 파리를 추상화로 바라봤던 1권보다는 세밀화인 2권에서 그의 '파리 사랑'이 더 많이 묻어난다. 그는 이들 장소를 직접 찍은 사진과 함께 파리와 파리 사람에 얽힌 사연을 유려하게 풀어낸다.
형식상으로는 여행기와 비슷한 듯하지만 정수복 교수는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파리를 서술하기 때문에 독자에게도 마냥 먼 나라의 이야기로 들리지는 않는다. 앞의 블로거가 말한 것처럼 책을 읽다 보면, 한국의 도시, 가장 대표적으로는 서울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정 교수가 높게 평가하는 파리의 특성, 매력은 한국에선 좀처럼 찾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정수복 프랑스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 객원교수. ⓒ프레시안(최형락) |
- 2002년부터 파리에서 산 지 8년 째가 된다. 그간 '파리 읽기' 책도 두 권이나 냈다. 정 교수를 이렇게 사로잡은 파리만의 매력은 무엇일까?
"얼마 전에 파리에 왔던 신경숙 작가가 '파리에 관한 책을 두 권이나 쓴 것은 파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하더라. 맞다. 이 책은 파리에 대한 사랑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파리에 살면서 대부분 두발로 걸어다녔다. 파리는 서울의 6분의 1밖에 안되는 곳이라 걸어다니기에 아주 좋다. 파리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걷기다. 걷기는 구체적인 현실 세계로 직접 들어가는 일이고 어디든 가까이 걸어다니다 보면 그 공간과의 친근감이 생기고 애정이 묻어나게 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파리에는 파리만의 특별한 것이 있다.
파리의 역사는 세느 강의 시테 섬에서 시작해 동심원을 넓혀간 확장의 과정이이었다. 지금의 파리에는 그 역사가 고스란히 쌓여있다. 노트르담 성당으로 대표되는 중세 유적과 17세기 절대왕정기, 계몽주의 18세기, 격정적인 19세기, 급격한 변동을 거친 20세기 등 누적된 역사 층들이 켜켜히 겹쳐 있다. 파리에서는 한 장소에서 2000년의 역사와 함께 생활할 수 있다. 파리의 '아우라'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그 층이 겹쳐가며 생겨난다. 그리고 파리 내에서도 각 구역마다 특징이 다른 '다양성'도 파리의 매력이다."
파리와 달리 서울에선 이러한 '기억의 공간'을 찾기가 무척 어렵다. <오래된 미래>의 저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서울을 보고 나서 "600년 된 도시라는데 마치 30년 된 신도시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서울에는 고궁과 종묘, 4대문이나 북촌과 같은 마을을 제외하고는 일상 생활의 공간에서 좀처럼 지난 역사의 흔적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프레시안(최형락) |
"살지 않은 공간이 내가 살았던 공간을 생각나게 하는 까닭은 바로 그 시간의 흔적에 있었다. 나의 유년의 기억이 식민지 근대도시의 잔해 위에 이뤄진 것이라면 파리는 그런 도시 공간에 나타나는 근대성의 원형일 것이다" (<파리를 생각한다>)
"그런 식민지 근대성의 분위기에서 형성된 기본 정서는 그렇게 간단하게 잘라버릴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나의 정서만이 아니라 오늘 한국의 근대성 안에 이미 식민지 근대성이 녹아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파리를 생각한다>)
이러한 정 교수의 질문은 서울, 더 나아가 한국의 모든 도시들이 갖고 있는 질문이다. 식민지 근대성의 기억은 '보존해야할 기억'인가 청산해야할 기억인가? 그 기억이 남아 있는 공간은 어떻게 해야하는가? 식민지 시대의 것이라고 청산하다 보면 시민들은 '기억의 장소'에 얽힌 정서적 뿌리를 잃어버린다. 그렇게 기억과 의미가 남아 있지 않은 공간들로만 남아 있는 것이 오늘의 서울이다. 마르크 오제의 개념을 빌자면 서울은 '비장소'로 가득찬 도시인 셈이다.
- 마르크 오제는 고유한 느낌이 있는 도시의 공간들을 '장소'로, 획일적으로 디자인된 유용하지만 무의미한 공간을 '비장소'라는 이름을 붙였다. 서울은 대표적인 '비장소'의 도시가 될 텐데, 과연 시간이 쌓이면 '장소'로 거듭날 수 있을까?
"글쎄… 서울에서 24시 편의점이 50년 넘게 있을 까닭도 없고 카페만해도 2년 후에 어떻게 될지 모르도록 자꾸 이름이 바뀌지 않나. 장소가 되려면 공간이 오랜 시간 유지되어야 하는데 빠르게 바뀐다는 게 서울의 특징이다. 그래서 비장소가 장소가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파리에는 예외가 있다. 책에도 소개했지만 19세기 파리에는 공중 위생 차원에서 도로변에 남성용 변소 '데스파지엥'을 만들었다. 이것은 19세기 도시 곳곳에 다 있었는데 다 철거하고 상테 감옥 옆에 딱 한 개만 남겨놨다. 그로써 고유한 의미를 갖게 됐다. 19세기에 이런 공간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서울에서도 맥도날드가 다 없어지고 딱 하나만 남아있다면 '비장소'가 '장소'로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지 않은가."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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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의 장소들>(정수복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
"에펠탑이 파리의 상징이 된 두번째 이유는 무용성에 있다. 궁전이나 사원, 현재의 고층건물들은 어떤 기능이 있다. 그러나 에펠탑은 아무런 기능이 없는 순수한 상징이다. 에펠탑은 그 안에 볼 것이 없다. 그러나 방문의 장소로서의 에펠탑은 파리 전체를 보여준다. 순수한 상징으로 지어진 에펠탑이 파리 전체를 조망하는 장소가 됨으로써 에펠탑은 자연스럽게 파리의 상징이 되어 있다. 파리라는 도시가 가진 명성에 비례해 에펠탑의 상징성은 더욱 강화되었다. (…) 에펠탑이 파리의 상징이 되는 과정에는 파리가 이미 오래된 기념비들로 꽉찬 기억의 도시라는 점이 작용했다." (<파리의 장소들>)
- 에펠탑과 같은 건물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도시 계획뿐아니라 창조적 영감과 우연성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에펠탑은 원래 1889년 박람회 이후 철거될 것이었는데 도시의 전체 분위기와 맞아 떨어지면서 파리의 상징이 됐다. 파리 도심의 나즈막한 6,7층 건물 사이에 높이 치솟아 있고 오래된 건물 사이에 새롭게 튀어나와 있다. 도시의 의미와 예술적 영감이 조응한 것이다. 그러면서 화가나 사진작가가 에펠탑의 이미지를 재해석한 작품을 여럿 내놨고 점점 세계로 퍼져나갔다. 결국 랜드마크는 만들고자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쌓이고 의미가 커지면서 랜드마크가 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 오세훈 서울시장은 '디자인 서울' 정책을 내세우면서 반포대교 반포분수 등이 랜드마크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디자인 서울' 정책에 어떻게 생각하는지. '반포분수'를 보셨는지.
"일단은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과연 저 분수가 오래갈 수 있을지, 시간이 좀 지나면 지루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디자인이라는 말이 패션에서 나온 것처럼 디자인이란 결국 유행을 따르게 된다. 그런데 분수는 5년마다 바꿀 것도 아닌데 10년 뒤까지 지속 가능성이 있을지. 물론 랜드마크는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오세훈 시장의 사업들이 과연 서울의 이미지를 뚜렷하게 할 수 있느냐에는 의문이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
정 교수는 <파리의 장소들>에서도 오세훈 시장의 '디자인 서울' 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디자인이라는 용어는 어메너티(삶을 편안하고 즐겁게 해주는 장소의 양태나 특성)나 삶의 질보다는 시각적 효과를 우선적으로 강조하는 듯이 보인다"며 "우리 삶의 공간은 시각적인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모든 감각을 통해 온몸으로 쾌적함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세월이 흐를 수록 의미와 기억이 누적되고 퇴적되는 '장소'들이 많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 이미 오랜시간 '퇴적'된 파리는 서울이 따라가기에 어려운 이상향 아닐까.
"서울이 연구해야할 도시로는 베를린을 생각할 수도 있다. 지금 베를린은 독일이 통일된 다음에 굉장히 바뀌고 있다. 길도 다시 만들고 좋은 건물도 세우고 도시 계획을 세운다. 베를린은 위치상 유럽의 중앙에 있기 때문에 베를린 사람들은 '지금이야 도시가 새것이지만 세월의 이끼가 끼고 의미가 붙여지게 되면 훗날 파리보다 좋은 도시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서울도 마찬가지다. 도시는 살아있는 유기체니까 시장 임기 5년이 아니라 50년 후, 100년 후를 내다볼 수 있어야 한다. '아시아의 서울'이라는 별칭을 받고 싶다면 최소한 베이징이나 도쿄와 비교해서 서울이 어떤 특이성, 고유성을 가질 것이냐, 서울에서의 삶의 질은 어떻게 더 나은가 등을 고민해야 한다."
▲ <파리를 생각한다>(정수복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
"2001년 자크 시라크의 후계자인 장 티베리를 제치고 파리 시장에 당선된 베르트랑 들라노에는 2008년 선거에서 재임되었다.(…) 들라노에 시장은 2004년 '정열로 사는 삶'이라는 저서를 통해 자신의 소신을 밝히기도 했는데, 시민들의 참여를 통한 도시 행정을 자신의 주된 첧학으로 삼고 있다. '시민과 함께하는 도시계획, 당신의 의견을 주십시오' 파리 시가 도시 발전을 위한 장기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시민들에게 보낸 설문조사지의 제목이다. 앞으로 20년 동안 파리의 신규 건축, 개축, 보수, 토지 점유, 문화재 보전 등에 관련된 도시계획법을 만들기 위한 설문조사다. (…) 들라노에 시장은 파리 시의 도시계획에 대한 모든 정보를 공개하면서 시민들의 의견을 물었다. 파리시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솔직하게 내보이고 그 문제에 대한 시의 대처 방안을 제시한 다음에 그에 대한 시민들의 의견을 묻는 것이 순서이기 때문이다,"
"나의 책을 한단어로 말하자면 '목적 없는 방황'"
정 교수가 에펠탑을 두고 '무용성'을 가장 큰 특징으로 꼽은 것처럼 파리 연작 두 권에서는 공통적으로 '쓸모 없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정 교수의 전작 <바다로 간 게으름뱅이>(동아일보사 펴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책 곳곳에서 '쓸모 없음', '목적 없음'에 관한 성찰과 사색을 발견할 수 있다. 정 교수 역시 자신의 책을 한 단어로 축약하자면 'aimless wandering', 즉 '목적 없는 방황' 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쓸모 없음'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1960년대 이후 한국이 산업화를 거치며 외친 '선진국이 되자'는 구호에서 나온 개념이 '실용성' 즉 쓸모 있음이 아닐까 한다. 구체적으로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 화폐로 환산되고 양으로 잴 수 있는 것, 상품이 될 수 있는 것을 쓸모 있다고 한다. 반면 쓸모 없다는 것은 가까운 시일 내에 구체적으로 용도가 없는 것, 돈으로 환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쓸모 있음'을 지나치게 추구하면서 쓸모 없는 걸 다 버렸다. 마당 없는 집으로 이사가면서 장독대, 댓돌, 다듬이, 이불을 다 버렸다. 오래된 것, 예전 부터 있던 것을 '쓸데 없다'고 버린 것이다.
유학에는 '군자불기'라는 말이 있다. 군자는 구체적인 쓸모 있음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래서 자연경관 앞에서 서늘하고 고유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자연 경관이란 돈으로 환산되지 않고 쓸모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것들은 쓸모 없다고 버리고 경시한 것들이 아닐까."
ⓒ프레시안(최형락) |
"20대의 풋풋한 나이에 파리에 유학 왔다가 망명 작가로 일생을 보낸 시오랑. 파리 정착 이후 모국어를 버리고 프랑스어로만 글을 쓴 사람. (…) 그는 글쓰기를 통해서만 생계를 유지했다. 가난하지만 자기 세계를 지킨 고집스러운 전업 작가였던 셈이다. 그렇게 산 그의 삶에 나는 커다란 공감과 연민을 느끼고 위안을 받는다.(…) 파리에 다시 온 이후 나는 자기가 태어나서 살던 익숙한 장소를 떠나 자기가 선택한 낯선 땅에 와서 망명생활을 한 작가들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파리의 장소들>)
- 몽파르나스 묘지에 묻힌 시오랑에 관힌 글을 보면 망명 작가에 대해서 동질감, 애정을 느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책에 '자발적 망명'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한국에서 무엇을 피해서 망명을 떠났나?
"나는 나의 망명을 '정신적 망명'이라고 한다. (웃음) 앞서 낸 책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생각의나무 펴냄)에도 썼지만 한국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을 피해 망명을 떠났다. 유학 생활을 하고 나서 귀국해 여러 대학의 교수 채용에 응할 때 한국 사회를 깊게 느꼈다. 나는 납득할 수 없는 이유, 나의 능력이 아닌 어떤 이유로 교수 자리를 얻지 못했고 그 이후 시민운동도 하면서 한국인의 삶의 방식을 바꾸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내가 피하려 한 것은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에 쓴 것들이다. 현세적 물질주의, 감정 우선주의, 가족주의, 연고주의, 권위주의, 갈등 회피주의, 감상적 민족주의, 국가 중심주의, 속도 지상주의, 근거 없는 낙관주의, 수단 방법 중심주의, 이중 규범주의 등이었다. 그리고 정약용, 추사 김정일, 마르크스도 유배나 망명을 가서 작품을 쓴 것처럼 나도 자발적으로 살던 곳에서 떠나서 내가 살던 곳을 객관화, 대상화 해볼 필요가 있었다."
- 2002년 파리로 '망명' 하기 직전 시민운동과 생태 운동을 열심히 했다. 한국에서 대안 운동을 하다 '망명'을 떠난 셈인데 한국의 시민운동에서도 한계를 느낀 것이라고 보면 될까?
"환경운동을 하면서 느낀 건 이중적 태도다. '환경이 악화되서 인간이 못살게 된다'는 주장은 모두 맞다고 하면서 내 자식이 좋은 학교를, 내가 좋은 직장을 다녀야 하고 승진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바뀌지 않더라. 말하자면 운동은 하고 있는데 그에 맞는 사고는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어떤 시민운동이든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이 작동하고 있는 가운데에서 운동을 하면 겉만 운동이 되는 거지 속은 똑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대통령이 '경제 살리기'로 콕 집어 대통령이 됐기 때문에 그에 대한 좌절감이 깊다. 그래서 반정부 운동을 하면 금방 불이 붙는다. 택시운전사부터 대학 교수까지 이명박 비판하는 이들은 많다. 그런데 자기 생활은 그대로 두고 이명박 대통령만 비판하니까 촛불 집회처럼 일시적으로 끝나고 마는 거다.
결국 모든 시민운동과 함께 일반 시민의 살아가는 방식 자체, 우리 안의 문법을 바꾸기 위해 스스로 성찰하는 운동을 해야할 시점인 셈이다. 인터넷이든 소규모 집단이든 진정한 토론이 일어나고 격려하고 고쳐나가야 한다. 그래야 전체와 부분, 거시와 미시를 오가며 제대로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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