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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에 늘 있는 '파도'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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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에 늘 있는 '파도'의 유혹

[화제의 책] 토드 스트라써의 <파도>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서쪽으로 약 50km 떨어진 도시, 아우슈비츠. 그곳에는 2차대전 당시 나치가 민간인을 학살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거대한 박물관으로 바뀐 채 아직 남아있다. 당시 건물과 경비탑, 철책은 물론 나치가 수감자들로부터 빼앗아 쌓아놓은 수만 개의 안경, 가방, 신발 등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은 이곳을 둘러보며 경악을 금치 못한다. 어떤 이들은 눈물을 흘리고, 어떤 이들은 뜬금없이 안내인에게 화를 내기도 한다. 그 내부를 둘러보고 나오는 이들의 표정은 대부분 어둡다. 그러나 과거에 대해 분노하기만 하면 그뿐일까?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정말로 역사 속에 박제된 '유적지'가 되어버린 것일까?

청소년 소설 <파도>에 등장하는 벤 로스 선생님은 우리에게 "당신도 그 같은 일을 어쩌면 저지를 수 있다"고 경고한다. 미국의 청소년 문학 작가인 토드 스트라써가 지은 <파도>는 독일에서 청소년도서로 많이 판매됐다고 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고등학교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을 각색했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를 끄는 <파도>가 한국어 번역본으로 출간됐다.

"왜 당시 사람들은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 <파도> (토드 스트래서 지음, 김재희 옮김,이프(if),1981)ⓒ프레시안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벤 로스 선생님의 그날 수업 주제는 '2차 세계대전'이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에서 일어났던 대량학살을 기록한 영상을 본 선생님과 학생들은 나치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그러나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독일 전체 인구의 10%밖에 되지 않는 나치 당원들이 그런 짓을 저지르는 동안 다른 독일인들은 왜 수수방관했을까"라는 물음이었다. 더구나 전쟁이 끝난 후 독일인 대부분이 "나는 그런 만행에 대해 전혀 모른다'라고 증언했다는 대목에서 학생들의 궁금증은 깊어졌다.

수업이 끝난 뒤 벤 로스는 의문을 해소하기 위한 '체험학습'을 구상한다. 일종의 교실실험에 착수한 벤 로스는 다음날부터 학생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지도자'가 되어 '훈련, 공동체, 실천을 통한 힘의 집결'을 주장한다. 처음에는 학생들이 의자에 반듯이 앉아서 수업과 관련된 질문에 '일정한 형식'으로 대답하는 훈련을 시작했다. 어수선하던 교실 분위기가 몇몇 구호와 동작에 의해 일사분란하게 바뀌고, 대부분 아이들은 난생 처음 '일치단결의 흥분'을 맛본다.

학생들은 한발 더 나아가 일치단결할 때 좋은 점을 스스로 발견하는데, 그것은 "모두 똑같은 상황에 놓인 가운데 차별이 없어지고 평등도 실현된다"는 것이다. 학생들의 생각은 "단결된 힘으로 우리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방향으로 점차 발전해간다.

서서히 중독되어가는 '파도'의 실험

벤 로스는 몇 가지 유인책을 마련한다. 아이들이 소속된 공동체에 '파도'라는 이름을 붙이고, '파도'만의 인사법을 개발하며, '파도'를 상징하는 기호를 만들고, 또 '파도' 소속을 확인할 수 있는 회원증도 나눠준다. 이후 벤 로스는 학생들에게 '친구에게도 파도를 전파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파도 공동체'는 며칠 새 전교생이 가입하는 거대 동아리로 부상한다.

공동체의 소속감과 일체감에 젖어든 학생들은 어느새 '파도'의 회원과 비회원을 구분하고, 비회원을 배타적인 태도로 대하게 된다. 심지어 파도의 위험성을 경고한 교지의 편집장에게 다시는 그런 글을 쓰지 말라는 협박을 하고 비회원에 대한 폭행을 서슴지 않는다.

'파도'의 절정은 이 학교의 미식축구반이 다른 학교와 경기를 하는 날이었다. 전교생이 '파도타기 인사'를 하고 '파도 응원가'를 부르며 일치단결을 과시할 때 '파도'를 거부해온 몇몇 이들은 온몸에 전율을 느낀다.

이를 지켜본 벤 로스는 이제 실험을 마무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스스로도 학생들의 변화에 신기해하고,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낀다. 그러나 '실험이 너무 멀리 나갔다'라는 생각에 마침내 벤 로스는 '파도'를 끝낼 묘책을 고안한다. 그 방법은 놀랍도록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이었다.

히틀러와 나치는 정말 '사람도 아니었을까'?

소설의 주인공이자 실제로 고등학교 역사 교사를 맡고 있는 벤 로스에 따르면, 이 수업 이후 3년 동안 당시 일에 대해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당시 경험은 학생들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이다.

누구나 2차대전 당시 나치가 수백만 명의 유태인과 집시, 그리고 전쟁포로들을 학살한 사실이 너무 충격적이기 때문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짓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히틀러의 오른팔이었던 헤르만 괴링조차 뉘른베르크의 재판 당시 법정에서 틀어준 포로수용소 기록영상을 보고 난 뒤 "끔찍했어"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그러나 소설은 "나치를 히틀러의 등장으로 인해 생긴 '특이한 역사'라고 치부하고 손을 털어버릴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벤 로스의 교실실험에서도 보았듯이 누구라도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잊은 채 누군가가 시키는 대로 하고 공동체에 속해있다는 뿌듯함에 젖어 들다보면 이와 비슷한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언제라도 되풀이된다"는 간단명료한 교훈을 이 소설은 하나의 흥미진진한 사례를 통해 독일 청소년들에게 던져준다.

'파도'에서 엿볼 수 있는 한국사회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이 책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놀랍고 또 아쉽게도 한국에서 이 소설은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듯하다.

벤 로스가 학생들을 통제할 때 써먹은 '규율'과 '훈련'은 이미 한국의 교육과정에서는 종종 쓰이는 방법이다. '파도'에 전염된 학생들이 내뱉는 말들 또한 한국에서는 사실 '익숙한 말들'이다. 학생들이 외쳤다는 "우리는 하나"라는 구호는 굳이 찾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우리나라에서는 여기저기서 들을 수 있다.

학생들은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나 혼나지 않기 위해서 부모와 교사에게 '남들처럼만 할 것'과 '시키는 대로 따라서 할 것'을 흔히 요구받는다. '남 따라 하기'가 주된 흐름을 이루는 한국의 교육현실에는 소설 속에서 묘사한 '파시즘의 씨앗'이 이미 내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파도' 집회를 거부한 학생들이 스스로를 '병역 거부자'라고 선언하는 대목에서, 병역 거부자는 물론 무엇이든 다수의 의사에 반하는 구성원은 사회적으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국의 풍토를 떠올린 것은 무리였을까?

물론 모든 공동체가 모두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길들이기'를 좋아하고 일체감과 의리를 중요시하는 한국사회에서 '파도'가 던져주는 교훈은 각별하다.

파시즘의 광기를 보며 '나는 다르다'라고 생각하는 많은 이들에게 책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역사를 통틀어 이같은 일은 많이 일어난다. 어떤 집단의 힘이 커지다 보면 거기에 속한 개인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채 자기 권리를 포기하기 쉽다. 그러다 엉뚱하게도 자기가 속한 집단 밖의 사람들을 향해서 함께 집단의 권력을 남용하고 점점 그악스러워져 얼마 후에는 아무렇지 않게 몹쓸 짓을 일삼게 된다. 바로 그 과정을 우리는 파시즘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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