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ewstage |
- 학창시절
고등학교 시절, 저는 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시를 참 좋아했었죠. 박목월선생님 문하생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등단했으니 등단한 사람 중에는 최연소였죠. 시와 클래식, 서양문학에 탐닉하며 학창시절을 보냈어요. 밤새도록 시를 썼으니 엉뚱한 학생이었죠. 대학생활은 순탄치 못했습니다. 유신 때라 시국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기도 했고요. 입학하고 다시 학교를 나와 국가 공무원시험을 봤고,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야간학교를 병행하면서였죠. 그 후 '공감'이라는 월간 잡지 편집부 기자로 들어가게 됐습니다. '공감'은 외국 문화 사조나 미술, 연극, 춤, 건축 등을 총망라하는 최고의 권위자들이 모인 공간이었습니다. 그렇게 만난 사람들이 지금도 친구로 지내고 있습니다. 예술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동지들이지요.
▲ ⓒNewstage |
1978년도 10월, 국악예술고등학교 여학생 둘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예술제에 초청하려고요. 시민회관 별관 극장에서의 공연이었습니다. 당시 해당 학교의 국어 선생님과의 친분이 있어 초청에 응했습니다. 전통 공연 예술에 대해 큰 관심은 없었어요. 그 기회를 빌려 처음으로 묵도하게 됐어요. 라디오나 TV에서 봤던 국악과는 너무도 달랐죠. 문화적인 충격이었습니다. 한국에 살면서도 우리 전통공연예술이 이렇게 훌륭한지 몰랐어요. 그리고 이를 전승하는 아이들과 함께 호흡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습득해뒀던 영어교사 자격증이 있어 국악예술고등학교에 지원했고 영어교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전통예술을 습득하는 모습이 즐거웠습니다. 학급을 담당하면서 진로지도에 관한 고민이 생겼습니다. 민속음악은 참고문헌도 잘 없습니다. 아이들에게 진로를 알려주기 위해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경기도문화재위원 등으로 변신을 하게 됐죠. 어느새 우리 국악에 있어서는 최고의 자리에 올라와 있었죠.
▲ ⓒNewstage |
아이들이 너무 많은 학비를 내고 다닌다고 생각했습니다. 영어만 가르칠 수 없었습니다. 국립학교로의 전환이 절실했죠. 승인을 받으려면 문화관련 기관 5개에 승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일이라면 시작도 힘들었을 거예요. 하지만 결국 이뤄냈습니다. 제가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 꼭 이루고 싶은 것들
전 관장님이 꼼꼼하게 문화예술회관을 잘 운영해 주셨어요. 노원문예회관이 접근성이 떨어지고 제정자립도가 낮은 편임에도 인지도가 높고 좋은 공연이 이뤄진다는 대외적인 인식이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조건에서 잘 운영했죠. 그러한 부분들은 고이 계승하고 더욱 부흥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노원문화예술회관이 보고 싶고, 가고 싶은 공연장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주민들과의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일방적인 것보다 다양하게 서로 균형을 이루면서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구민들을 위한 공간, 소통하는 공간으로 만들어 가겠습니다. 저는 약속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구민들에게 약속한 것은 꼼꼼하게 챙길 것입니다.
- 구민들께 전하는 앞으로의 각오
노원구는 63만 인구로 서울시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구로 꼽힙니다. 예전에 허화벌판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은 놀라운 발전이죠. 어려웠던 시대의 그늘이 아직도 노원구에 자리하지만 지금은 문화적 수준이 높으신 분들이 꽤 많이 늘어났습니다. 상향된 문화욕구 뿐만 아니라 소외계층을 위해서도 일할 것입니다. 특히 노원구의 커뮤니티와 접촉하며 소통하는 공간으로 만들겠습니다. 정치와 문화예술 등은 흔들리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계층이 함께 어우러져 고급문화를 즐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