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무리로부터 떨어진 외톨이나 이도저도 아닌 처량한 신세를 '낙동강 오리알'에 비유하곤 한다. 그런데 왜 '낙동강' 오리알일까? 낙동강에만 오리가 살진 않았을 터인데, '한강 오리알'도, '금강 오리알'도, '대동강 오리알'도 아닌 '낙동강 오리알'이고 보면 거기엔 그만한 사연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인터넷으로 검색된 정보들엔 신뢰가 가지 않는다. 한국전쟁 중 낙동강까지 진출한 북한군이 유엔군의 반격으로 오도 가도 못한 신세가 되었음에서 유래했다 한다. 북한군을 '낙동강 오리알'로 비유했다면, 그 이전에도 그런 말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3박 4일 순례 기간 내내 '낙동강 오리알'의 유래가 궁금했다. 오리와 직접 마주칠 일이야 없었다. 아무렴. 그냥 오리도 아니고 낙동강 오리인데 쉽게 만나줄 리가. 대신 강변을 따라 걷는 길에서 처음 보는 풀과 꽃들과 마주쳤다. 모래산으로 변한 둔치에서 고라니 발자국을 발견하기도 했다. 공사가 진행되지 않은 강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습지가 있고 농가가 있고 미루나무가 있고 모래톱을 적시며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있었다.
낙동강 1300리 길 최고의 비경이라는 경천대에서는 턱, 말문이 막혔다. 굽이굽이 돌아 흐르는 맑은 물과 모래톱, 그 앞에 병풍처럼 둘러쳐진 절벽. 문득 살아 숨 쉬는 강의 맨살을 마주하기가 부끄러워졌다. 내가 도심에서 보아왔던 한강이나 청계천은 강이라기보단 복제된 인조물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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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풍광은 거기까지였다. 무성한 숲과 나무, 야생동물들이 서식하던 둔치는 준설한 모래더미에 덮여 버렸고, 강물은 흙탕물로 변해 있었다. 한마디로 강은 처참하게 훼손되고 찢겨져 죽어가는 중이었다. 강의 전혀 다른 얼굴을 보면서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걸 어쩌지 못했다.
녹색의 둔치를 모래로 뒤덮는 현장의 '녹색뉴딜 4대강 살리기'라는 표지판에선 현기증이 일었다. 언어의 전도현상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경험이 낯설지는 않았다. '강부자'가 '친서민'이 되고 '복지의 축소'가 '복지의 확대'가 되고 사실상의 '대운하'가 '4대강 살리기'로 둔갑하기도 했으니까. '모래색'을 '녹색'이라 하고 '녹색'을 '모래색'이라 부르는 것쯤이야. 그래서였다. '녹색' 뒤에 따라붙은 '뉴딜'이라는 단어에 궁금증이 일었던 것은. 대체 무엇을 '새롭게' '딜'하시겠다는 걸까. 어쩌면 '하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이미 '했다'는 고백이 아닐까. 그러니까 마침내 녹색과 모래색의 색채관념을 '딜'했다는 미학적 고백이 아닐까.
마르셀 뒤샹은 뉴욕 전람회장에 화장실 소변기를 떼어다 거꾸로 전시해 놓고선 '샘'이라 이름 붙였는데, 그것이 20세기 미술사의 가장 획기적인 사건으로 평가받았다. 그러고 보니 녹지대를 송두리째 갈아엎으면서 '녹색 개발'이라 명명한 4대강 사업은 바로 저 뒤샹의 작품을 모방하고 응용한 인류 건설사의 전무후무한 아방가르드적 시도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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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4대강 사업, 그중 낙동강과 관련된 내용의 핵심은 강의 수면을 6m로 파고, 댐의 일종인 보를 군데군데 설치해 강물을 가두고 수위를 조절하며 강폭을 200~500m의 직선 구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강바닥에서 퍼 올린 모래로 다양한 생물종의 삶터인 둔치와 습지를 메우고 그 위에 자전거도로와 생태공원을 만드는 것이다. 이 계획에서 느껴지는 것은 획일적인 일방통행식 사고체계의 섬뜩함이다. 요컨대 4대강 사업에서 사업의 상대자는 없다. 오직 대상만 있을 뿐이다. 상대와는 관계를 맺고 소통할 수 있지만 대상은 지배하고 관리하면 그만이다.
정부의 4대강 사업이 말 그대로 '살리기'가 되려면 그 첫 번째 상대는 강 자체여야 한다. 두 번 째 상대는 그 강을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뭇 생명들이어야 한다. '4대강 죽이기 범국민대책위' 홍성태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낙동강 준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깊이 6m, 너비 200m, 길이 360km로 낙동강을 파헤쳐야 한다. 그런데 낙동강 중상류의 수심은 기껏해야 50c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중략) 실제로는 강을 완전히 파괴하는 엄청난 폭파와 굴착을 뜻한다." (<생명의 강을 위하여> 228~229쪽)
50cm와 6m의 차이. 이것이 바로 강의 소리와 4대강 사업을 집행하는 쪽의 구호의 차이이다. 4대강 사업에 대한 민심과 속도전으로 밀어붙이는 쪽의 일방적 주장의 차이이다. 강을 대상화했을 때, 강의 변화하는 환경을 고려할 필요는 사라진다. 입맛대로 일방적인 기준에 짜 맞추면 그만이다. 그들에게 강은 단지 규격화하고 관리해야 할 상품이다.
습지와 둔치를 갈아엎고 인공 생태공원을 만들겠다는 계획도 상식의 차원을 훌쩍 뛰어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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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야성을 간직한 자연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이번 순례길에서 체험할 수 있었다. 일례로 달성습지는 사람 키를 넘는 부들이 그야말로 원시림처럼 뒤덮여 있고, 기생초와 같은 야생화들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그곳이 생생한 원시성을 보존해온 것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원시적 생태계가 남아있다는 것은 한마디로 축복이었다. 이렇듯 낙동강 1300리 길 곳곳마다 조성된 자연습지와 둔치들을 없애버리고 인공적인 생태공원을 만들겠다고 한다. 이를테면 살아 숨 쉬는 사람을 리얼 돌로 대체하는 꼴이다.
흐르는 강물을 가둬 수위를 조절하고 구간의 폭을 200~500m로 직선화한다는 내용 역시 그렇다. 강이란 본디 굽이굽이 흘러가야 강이 아닌가. 강이 직선으로 흐른다면 그건 운하일 것이다. 이미 대운하는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왜 강폭을 직선화하고 보를 쌓아 강의 수위를 조절하려고 할까. 정부는 물 부족을 해소하고 홍수에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것이 얼마나 과학적 근거가 희박한 주장인지는 언급하지 않겠다. 수많은 자료들이 그 궁색한 논리를 반박하고 있으니까. 그보다는 이런 사업을 왜 그토록 빨리 해치우려 하며 그런 강박심리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독일은 수로였던 이자강을 여울과 모래섬이 있는 자연 하천으로 되살렸다. 미국도 개발로 파괴된 에버글레이즈 습지를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둘 모두 지금의 4대강 사업과는 정반대의 방향이었다. 우리는 자연 하천을 엄청난 세금을 쏟아 부어 파헤치려 한다. 울산의 태화강이 콘크리트 보를 허물고 하수종말처리장을 신설하는 등의 수질 개선 사업으로 살아났음을 애써 외면하면서까지. 언젠가 다시 회복하려면 몇 배 몇 십 배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함을 모르는 것일까.
3.
'낙동강 오리알'의 유래에 대해 힌트를 얻은 것은 순례의 마지막 밤이었다. 부산지역 환경단체 '습지와 새들의 친구'의 김경철 국장이 말해주었다. 낙동강 하구둑에 위치한 을숙도는 수많은 철새들이 날아와 서식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철새군락지이다. 그런데 이곳을 찾는 철새들 가운데 '흰뺨 검둥오리'는 다른 철새들이 떠나가도 알을 품고 가지 않아 혼자 텃새가 되었다 한다. 여기에서 '낙동강 오리알'이 유래되었으리라 추측했다.
'낙동강 오리알'의 정확한 유래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해진 것이 있다. 4대강 사업을 강행하면 자칫 수많은 철새들을 못 보게 될 것이고 그중엔 오리도 포함될 거라는 사실이다. '낙동강 오리알'이라는 말은 있는데, 주인공인 오리는 볼 수 없게 된다. 말만 남고 실체는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낙동강에는 한때 오리가 살았었지"라는 회고조의 과거 완료형 문장을 구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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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하나의 생명체로 본 제임스 러브록은 <가이아의 복수>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우리는 마치 질병처럼 행성을 눈에 띄게 무력하게 만들 정도로 수가 늘어나 있다. 인간의 질병과 마찬가지로 가능한 결과는 네 가지다. 침입한 병원체의 제거, 만성 감염, 숙주의 사망, 공생. 이중에서 공생은 숙주와 침입자가 상호혜택을 주는 지속적인 관계를 말한다."
흐르는 물을 가둬서 강을 썩게 한다면 우리는 강에게 병원체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강의 입장에서라면 말이다. 나는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오만이거나 자가당착인 것 같다. 그렇다고 인간이 병원체로까지 전락해서야 되겠는가.
강은 강처럼 흘러야 한다. '四대강'을 '死대강'으로 만들지 말라. 그 누구에게도 그럴 권리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번엔 '4대강 참사'다. 막무가내식 개발 정책으로 용산에서 5명의 철거민이 목숨을 잃은데 이어, 이번엔 4대강의 현장에 기대 살아온 숱한 생명들이 정부의 4대강 사업으로 사그라지고 있다. 강가에서 오랜 세월 터를 잡아온 이름없는 풀과 벌레들부터, 이들의 죽음을 두고만 볼 순 없다며 스스로 몸에 불을 붙인 수행자까지, 그렇게 꺼져가는 많은 '생명들' 앞에 개발의 삽날은 냉정할 뿐이다. 지난해 용산 참사에서 드러난 '개발 시대'의 잔혹성을 기록해 <프레시안>에 연재했던 문화예술인들이, 이번엔 4대강의 현장으로 나섰다. '작가선언 6.9'는 지난해 용산 참사 시국선언을 계기로 결성된 문화예술인들의 모임으로, 이번엔 '4대강 참사'의 현장에서 목도한 현실을 시와 글로, 그림으로 표현해 <프레시안> 지면에 연재할 예정이다.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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